썩는 밀알에도 두 종류가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며칠 전 우연히 일본 TV에서 본 한 젊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작은 섬에서 민영화된 우체국을 운영하고 있지만 원체 주민 숫자가 적어 매달 적자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주민이 주문한 생필품을 육지로부터 운반해주는 택배 업무도 겸해보지만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섬 주민이 외지로 보내는 소포 포장을 자기 돈을 써가며 더 튼튼하고 안전하게 해주었습니다. 트럭에 실어 배로 운반할 때도 화물에 손상이 안 가게 담요 같은 것으로 둘러쌓습니다. 주민들에겐 단순한 화물이 아니라 정성과 사랑이 담긴 귀중한 선물이기 때문이라 절대 소홀히 다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주민의 대부분이 노인 부부라 집안에까지 일일이 들어가 화물을 픽업하거나 배달해 주었습니다.
당장 문 닫고 떠나버리면 그만일 텐데도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은 그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우체국마저 없어져 버리면 가뜩이나 외로운 노인들이 외부와 접촉이 끊겨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온 편지, 소포, 물건들을 배달해 줄 때 반가워서 활짝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청년의 진정한 보람과 기쁨이 되었고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썩는 밀알의 대표적 본보기였습니다. 자신의 부귀영화는 아예 안중에 없고 오직 주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이었습니다.
불현듯 그 청년이 예수 믿는 신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섬 주민 전부를 자연히 전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이 청년처럼 예수 믿지 않는 일반인도 얼마든지 썩는 밀알이 될 수 있지만 신자의 썩는 모습은 조금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인의 밀알이 썩어도 분명 열매는 맺습니다. 그 섬에 그 청년이 없다고 가정해보면 그가 맺은 열매가 얼마나 크고 귀한 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청년이 담당하고 있는 일의 열매일 뿐입니다. 주민들로선 청년에게 아주 감사하며 칭찬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물론 인간적인 따뜻한 정과 의리가 교통되지만 그것뿐입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선행은 베푸는 자만의 베푸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자신의 여유분을 나눠주는 셈입니다. 예의 청년의 경우에도 재정적으로는 적자일지 몰라도 청년의 힘과 열정 즉, 노인들에 비해 월등한 여유분을 갖고 나눠준 것만은 분명합니다. 요컨대 의인은 한명 뿐이며 나머지는 다 수혜자입니다.
신자가 썩으면 자기가 속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밀알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전부 그렇게 되는 것은 어렵지만 궁극적 지향점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신자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이유가 모두 교인이 되어 교회 짓고 함께 예배드리라는 뜻만은 아닌 것입니다. 의인 한 명만 배출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의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 청년의 경우는 주는 자의 선행과 받는 자의 감사가 열매였습니다. 반면에 신자의 경우는 신자 자신이 열매이면서도 주위에 새로이 만들어진 주님의 자녀가 열매입니다. 일반인의 의는 선행과 그 결과가 열매라면 신자의 의는 오직 사람이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목표하는 바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함께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주께 대하듯 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렇게 되어 가는 과정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부가 주고 또 전부가 받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또 그 청년이 나눠준 사랑은 기실 자신의 것뿐이었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하나님의 것으로 즉, 자신의 것은 하나 없어도 나눠줍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하나님이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채워주심은 재정적인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소원과 열정과 힘을 더 많이 주십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도움은 궁극적으로 상대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자신이 하나님에게 받은, 혹은 그분께 쓰임 받는 통로가 되어서, 은혜를 나누어주어 이웃도 그분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일반인의 의는 결국 한 개인의 수고로만 끝납니다. 한 사람의 위인은 탄생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심령에 진정한 평강이 있었느냐는 별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일을 하는 동안에 기쁨과 보람과 가치마저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자기 의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자칫 자기 자랑으로 흐르기도 쉬울 뿐 아니라 그 모든 일의 종국에는 허무하다는 고백만 남게 됩니다.
성자라 불렸던 간디마저 인생 말년에는 아무 빛을 발견할 수 없다고 실토했습니다. 단언컨대 그 청년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한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한탄이 그의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썩는 밀알에 대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청년처럼 일방적으로 손해 보고 희생하더라도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계명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신자라면 물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니 참 인간이라면 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선행만 고집하면 자칫 그 자체가 자신의 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기 본문의 일차적 뜻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한 것이지만 초점이 썩어 없어지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와 동일한 모습의 열매가 더 생긴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곡식이 일단 땅에 뿌려지면 수많은 동일한 곡식이 열리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영혼 구원의 직무를 제자들에게 위임하면서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신자는 반드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장 가까운 구성원들부터 또 다른 썩는 밀알이 되도록 변화시켜야 합니다. 누룩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자꾸 번져나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신자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시기에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권세를 우리 모두 이미 받았지 않습니까? 요컨대 신자가 날마다 자신부터 십자가에 죽이는 대신에 그분의 빛이 자기를 통해 이웃으로 비춰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작금 예수 믿는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 기도드리는 일은 너무나 잘합니다. 그런데 다 같이 썩는 밀알이 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서 더 화려해지려고 그러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인 의마저 드러내지 못하니 불신자들로부터 욕까지 들어먹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썩는 밀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해도 뭐할 텐데, 아니 최소한 그런 밀알을 알기라도 해야 할 텐데, 오히려 보통의 밀알도 되지 않으려드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11/16/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