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도 부인 못하는 십자가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5,6)
어떤 기독교 이단은 구원에 사다리 원리를 적용합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받되 그 선행이 하나님 보기에 완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며 한 계단씩 완전을 향해 걸어 올라가다가 죄를 범하면 한 계단만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해야만 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면 마땅히 그 전체를 완벽하게 행해야만 한다는 것은 상식이며 또 도무지 완전에 이를 자는 없다는 사실을 그 이단도 인정했다는 반증입니다.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유독 강조한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그런 상식조차 무시하고, 바울이 지적한대로 사람들로 이간을 붙여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는 욕심에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들과 교인들의 인기몰이 경쟁을 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인간들, 말하자면 교회라는 조직체가 규정한 제도나 방식에 따라 구원을 준다는 뜻이며 교회가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뜻도 그런 비상식적 오류를 방지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인간이 만든 어떤 계명이나 수단으로도 절대 구원의 효력이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생부터 부활 승천까지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제도와 계명이 그분께 영향을 미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오직 선만 행하셨던 그분을 죽여 버린 것이 인간, 그중에서도 도덕적 의인과 종교적 경건주의자들이었지 않습니까? 인류 역사상 단 한번 밖에 없었던 완전한 선을 최악의 죄악으로 갚은 인간들에게, 저들이 자기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 달라는 그분의 십자가 외에 과연 그 어떤 것이 구원에 유효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할례나 무할례나 구원에 아무 효력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무할례가 율법 없는 믿음이 아닙니다. 할례는 유대인을, 무할례는 이방인을 상징하므로 인간의 모든 철학, 도덕, 종교를 총망라해도 구원의 길이 그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범한 것이기에 당연히 구원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구원으로는 절대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그런 것들이 하나님 밖에서는 즉 인간끼리 자기 잘난 것을 다투는 데에만 효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기에 반드시 성령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쪽에서 한 죄인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셔야만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그분이 그 죄인을, 그것도 당신과 원수 된 상태에 있음에도, 오직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그 죄인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의 반대편에서 죄악을 즐기며 그분을 외면, 부인, 저주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게 해주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그 사랑에 대비해 자신의 실체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죄인인지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나아가 그 죄인으로 겸비하게 그 크신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한 후에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준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란 선행과 공적은 단 하나도 개입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넘치도록 부어졌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동안 세상 방식과 인간 계명으로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심령의 텅 빈 부분에 그분의 사랑으로 가득 찼고 나아가 자신의 그분을 향한 사랑의 불꽃도 점화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헛되고 헛될 것만 같았던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숨겨져 있으며 때가 되면 거룩하고 신령한 열매가 반드시 맺히게 될 것을 확신하며 소망을 안고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생전 처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힘도 얻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오직 예수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없다면 그 이단처럼 사다리만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평생을 마치니 당연히 헛될 것 아닙니까?
7/21/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