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이해 안 되는 하나님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출1:6,7)
사람들은 세속 역사에는 그런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가르며 출애굽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합니다. 또 사실이라 쳐도 자기 백성만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애굽을 무참하게 패배시킨 하나님이라고 비방합니다. 가나안 족속을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진멸하라는 명령을 접하면 하나님을 저주하며 거부합니다. 이런 오해와 미움의 원인은 하나님이 심판하신 외양만 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고활동이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에 의해 좌우되며 나아가 결과만 중요시하는 그들로선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인간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무조건 맞추어주어야 한다고 끝까지 완악하게 고집합니다.
성경은 원칙적으로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자를 세뇌시켜 하나님을 지극 정성을 다해 섬기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책도 아닙니다. 당신의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뜻을 당신 백성과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밝혀 놓은 책입니다. 영원토록 자존하며 만물을 운행섭리하시는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으로, 특별히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절대적으로 당신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진리를 계시한 책입니다.
다른 말로 인류 역사도 그분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이끌어가 가신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무조건 방치하고 외면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어떤 민족 전체가 4백년이 넘게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된 적은 역사상 없습니다. 식민지를 확장 수탈하던 제국주의 시절에도 그러지 않았으며, 심지어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편 나치제국도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로 그토록 오랫동안 애굽의 노예가 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백성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애굽과 가나안, 즉 불신자의 죄악을 알고도 당장 벌하지 않고 오랫동안 인내하며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었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들은 이스라엘이 4백년 넘게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다는 점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 동안에 애굽과 가나안은 우상숭배에 절어 온갖 죄악에 탐닉해 있었다는 사실은 아예 깨닫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열 번의 재앙을, 그것도 약한 것에서 차츰 강도를 높여서 주었지만 그들의 생명은 손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애굽이 끝까지 회개는커녕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 애굽이 하나님에게 대들다가 온갖 재앙을 겪다가 군대도 꼼짝 없이 수장(水漿) 되었다는 소문을 익히 듣고는 떨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성 전투 때에, 아니 그 후에도 그들은 얼마든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완악했던 것은 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선 열 번 재앙이 찰 때까지, 여리고 성에선 일곱 번의 행진이 찰 때까지, 사실은 수백 년이 넘게 참아 주셨습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들 잘못에는 완전히 눈을 감고 현실적 손해가 되는 일만 생기면 단지 이해할 수 없다는 핑계로 무조건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걸고넘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묘막측한 분입니다. 인간 이해의 부족이 절대로 그분의 불공정과 불완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는 영원을 꿰뚫도록 완전하신 그분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단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모든 믿는 자에게 넘치도록 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은혜 안에 들어오지 않은 불신자로선 당연히 그분이 이해 안 되어 싫어하겠지만 신자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다함이 없는 긍휼로 신자를 위해 당신께서 죽기까지 하셨지 않습니까? 신자가 잘 이해되지 않는 현실 상황 때문에 그분을 의심 내지 불신하면 혹시 불신자처럼 자기 죄를 외면하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7/22/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