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찌된 일인고?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눅1:41-43)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까지는 직선거리로는 100 키로 남짓으로 당시의 도보 여행으로는 한 달이 채 안 걸렸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자 바로 갔으니 임신 1개월 미만의 몸입니다. 주위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임부 본인조차 자각 증상을 못 느낄 때입니다.
친족 엘리사벳도 외견상으로는 마리아가 임신했을 낌새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문안함” 즉, 그간 일어났던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조카의 말이긴 해도 콧방귀도 안 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동일한 천사의 고지를 통해 늙어서 수태한 그녀로선 마리아의 말을 얼마든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아주 유력한 증인으로서 하나님은 그녀더러 먼저 수태토록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복중 아이가 뛰놀았다는 것입니다. 임신 6개월 말인지라 태아가 복중에서 활발히 움직일 때이긴 하지만, 마침 그 때에 그 움직임이 아주 강했다는 뜻입니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이아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4절)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태아도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선 축복한 셈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엄마의 지각작용이 마치 컴퓨터 데이터 전송되듯 태아에게 그대로 전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아기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기도하고 말씀보고 경배할 수 있었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태아에게 엄마의 기쁨이 느껴진 것입니다. 태아도 얼마든지 감정을 느끼며 그 표현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특별히 임신 첫 두 주간의 세포분열 속도는 엄청나다고 합니다. 계속 그 속도로 성장하면 출생 때에 약 12톤의 무게가 될 정도라고 합니다. 첫 2주 동안의 현란할 정도의 증식 과정 중에 인간이 갖출 기본적 골격의 바탕이 다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낙태를 임부의 선택 사항으로 자유롭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런 생명의 신비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입니다. 가장 빠르게 성장이 이뤄진다면 그야말로 생명이 가장 왕성한 증표이지 않습니까? 태아가 스스로 지각할 수 있는 시기 이전에는 낙태를 허용해도 된다는 약간 느슨한 주장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임신되자마자 이미 뇌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도 그 때야 뇌가 생기는 양 호도하는 짓입니다.
첫 두 주는 하나님이 엄청난 능력으로 가장 큰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시기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로 빨리 성장하고 있었던 시기를 기억은커녕 인식도 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 시기에 그 복중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손으로 그 아이를 붙들고 계십니다. 당신의 형상을 닮음에 전혀 부족함 없이 세밀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엄마의 자궁에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태아를 감싸고 계신다면 당연히 무덤까지도 그 사랑은 변함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인간의 사회보장제도가 인간의 안위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원천이자 수여자이자 운행자이신 하나님만이 모든 이의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첫 두 주가 이럴진대 이미 임신 6개월이 된 엘리사벳의 태아를 하나님이 붙드시어 당신의 구속계획에 또 다른 등장인물로 들어 사용하지 못할 리는 없는 것입니다. 뱃속의 아기가 힘차게 움직임으로써 그 엄마로 하여금 마리아의 동정녀 임신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고 오히려 격려 축복할 마음이 들게 했을 것입니다. 늙어 수태가 힘들었던 자기도 천사의 고지로 임신했기에 앞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드러날 것이 확실한데, 처녀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더 엄청난 그분의 계획이 실현될 것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는 성경 표현대로 그런 깨달음과 믿음 또한 순전히 성령이 간섭하여 그녀의 마음에 심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라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큰 소리는 확신의 바탕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으며 또 그런 확신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견고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아무리 그녀가 마리아의 동정녀 임신을 확신했어도 성령의 간섭이 아니고는 임신 한 달도 채 안된 태아를 두고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고백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낙태찬성론자나 일부 자유주의 기독교인들마저 생명이 아니니 죽여도 된다는 이상한 벌레 같은 형체에 불과한 아이를 향해서 말입니다.
그녀의 이어지는 고백을 보십시오. “이 어찌된 일인고?” 도저히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입에서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성령의 간섭으로 깨닫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으로선 자신의 놀라운 임신에서부터 시작해 지금 조카 마리아의 더 놀라운 임신소식에까지, 나아가 바로 그 순간 태아가 힘차게 뛰는 것까지 단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태아가 기뻐하는 것도 감지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이 두 임부에게와 그들의 복중에서도 자신들로선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와 풍성함으로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단순히 동일한 체험을 한 두 임부가 서로 의지가 되고 힘을 합쳐서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나가자고 다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성령의 간섭을 통해서 함께 나누고 있으며 그렇게 나누는 중에도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온전히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끼리의 교제가 갖추어야 할 가장 모범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신자를 포함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 특별히 고난을 이겨낸 경험을 다른 이에게 전해주고 가르쳐서 함께 그 고난을 이겨나가거나 힘을 보태주는 것으로 그칩니다. 신자의 교제에도 당연히 그런 도움의 섬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선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 각자가 받은 은혜를 공유해야 합니다. 또 서로 나누고 위로 격려하는 일에도 반드시 성령의 충만한 간섭이 따라야 합니다. 자칫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것은 분명히 맞지만 나누는 과정 중에 자신의 인간적 의가 드러나 자랑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간증과 나눔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대신에 교제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신자의 입에서 “이 어찌된 일인고?”라는 찬탄이 저절로 튀어나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겸비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자격, 조건, 공로, 행적, 의, 심지어 기도와 믿음조차도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진정한 고백이 따라야 합니다.
나아가 그 고백은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함으로 끝나야 합니다. 엘리사벳이 “내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라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 신자가 누리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에만 입각합니다. 신자의 신자된 것은 오직 예수 안에서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도 오직 당신의 독생자의 의를 더 높이는 역사 안에서만 드러날 뿐입니다.
엘리사벳은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24,25절)고 했습니다. 자신의 수태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에 대해 다섯 달까지는 완전한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에게 확신을 심어주게 될 것이라고는 믿었습니다. 바로 그 일이 지금 일어났고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태아의 힘찬 움직임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아니 스스로 자각도 못하는 임신 첫 두주 동안에도 당신만의 은혜와 권능으로 당신의 택한 종을 붙들고 계십니다. 장차 놀랍고도 엄청난 당신의 일에 쓰시려고 예비하고 계십니다. 신자는 바로 그런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그분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아니 온전히 믿는 자가 신자입니다.
세상 사람은 초정밀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초음파로 진단해도 뇌가 아직 안 보인다고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을 눈도 깜짝 않고 죽이지만 신자는 그래선 안 됩니다. 단순히 낙태를 반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는 같은 초음파 사진을 보아도 태아를 통해 그 생물학적 기능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초정밀 현미경이라도 여전히 보이는 것을 더 크게 보는 것뿐입니다. 믿음은 초정밀 현미경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을 볼 줄 아는 능력입니다. 또 신자와 그 교제에 충만히 임하는 성령의 주파수는 어떤 최첨단 초음파 기계로도 잡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라야 그 풍성한 운행을 감지하고 나누며 하나님께 경배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내 주의 나를 향한 은혜는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의로운 오른 손이 태초부터 영원토록 나를 놓은 적이 없고 또 없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끼리 모여서 교제를 나누면 정말 이구동성으로 오직 그리스도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매 순간, 모든 일 가운데 “이 어찌된 일인고?”라는 찬탄이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최소한 그런 고백이 나오도록 범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구출은커녕 끝이 날 낌새조차 전혀 감을 못 잡을 정도로 고난의 미로를 헤매고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신자에게 전자현미경은 없어도 그것과 비교도 안될 만큼 고성능인 성령의 안테나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크심과 오묘함과 아름다움과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그 모든 것에 넘치도록 함께 함을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무시로 하나님 말씀 보고 기도하면서 그분을 묵상하면 고난의 미로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미로가 미로로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분의 때와 방식으로 출구가 완연히 드러나리라는 확신은 갖게 됩니다.
본문이 뜻하는 바를 한 마디로 줄이면 어떻게 됩니까?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 요한이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주 예수께 경배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하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도 본문의 두 임부와 두 태아처럼 하나님의 놀랍고도 큰 계획에 주연배우로 이미 쓰임 받고 있다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뜻이지 않습니까?
8/4/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