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을 크게 훼방하고 있는가?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삼하12:13,14)
신자들이 사단에 대해 가장 기본적으로 오해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사단은 모든 악의 원천이기에 신자로 어떡하든 범죄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단의 숨겨진 흉계는 훨씬 더 음흉합니다. 그렇게 단순하게만 알고 있으면 오히려 사단에 넘어가기 더 쉽습니다. 본문이 그 음흉한 흉계를 잘 알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다윗은 충직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는 그 부정을 감추려고 우리야마저 전쟁에서 죽게 만드는 너무나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 잘못을 꾸짖었습니다. 부하를 이방족속의 칼로 죽였기에 다윗의 가문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 처를 빼앗아 자기 처로 삼았기에 다윗의 처들이 백주에 다른 사람과 동침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역시 다윗이었습니다. 곧 바로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고 자백했습니다. 그래서 나단은 다윗의 죄는 사해주되 그 아이가 죽을 것이며, 또 이 일로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가 생길 것이라고 말을 맺었습니다. 문제는 다윗이 자기 잘못을 자백했기에 하나님이 용서해주신 것은 이해가 되지만 왜 아무 죄 없는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또 원수는 대체 누구이며 훼방할 거리란 무엇이며 왜 그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아이는 물론 간음죄의 열매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자기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이뤄진 일로 인해서 실제로 범죄한 당사자들은 멀쩡한데 자기가 대신 죽어야합니다. 아무리 죄의 삯이 사망이라 해도, 나아가 다윗 대신에 죽는 일종의 대속 효과가 있다 해도, 아이 입장에선 너무나 억울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도 조금 심한 것 아닙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당신의 종으로 선택했지 아이를, 그것도 불륜의 씨앗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다윗은 죽일 수 없는 반면에 그 죄가 너무 크기에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내려야 했습니다. 역으로 다윗을 살려야 할 이유는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으로서 현실적 업적을 쌓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의 가문을 통해 메시아가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또 아이의 억울한 사정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신비로운 경륜 안에서 풀어질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로선 그 이상의 구체적 사정은 전혀 알 수 없으며 또 알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께 절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출생과 죽음은 오직 그분만이 주관하신다고 겸손히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할 부분은 이 일로 원수에게 훼방할거리가 생겼다는 데입니다. 원수는 물론 이방인들, 이스라엘 내의 불신자들, 나아가 그 배후에 있는 사단의 세력들을 총칭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실한 종으로 알려진 다윗의 범죄가 모든 이방 족속과 불신자들에게 큰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믿음과 삶 사이에 크나큰 괴리를 보이는 신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뒷구멍에서 호박씨 까는 위선자라고 비방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도 개독교라는 오명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자더러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당부하면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7)고 결론지었습니다. 신자가 빛 대신에 어둠에 다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람들의 비방을, 그것도 그분과 함께 도매금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기본적 의미 외에도 더 깊이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나단 선지자는 원수의 훼방거리를 다윗의 범죄보다는 그는 사함 받고 아이가 죽는다는 사실에 직접적으로 연결시켰습니다. 다윗의 범죄뿐 아니라 위에서 살핀 대로 아무 죄 없는 아이가 심판 받는 일로 또 다른 훼방거리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나단의 견책이 있기 전부터 다윗의 간음죄는, 그것을 은폐하려 시도했다는 사실까지는 몰라도, 유대사회 최대의 스캔들이 되었을 것 아닙니까? 남들은 모르겠거니 다윗 혼자만 착각했거나, 아니면 시중에 루머가 돌대로 돈다는 보고를 받고도 왕의 체면상 짐짓 모른 체 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미 사단의 훼방거리가 된 지 오래였기에 나단이 지금 말하는 훼방거리는 전혀 다른, 최소한 추가되는 내용이어야 했습니다.
쉽게 말해 불신자들이 볼 때는 범죄한 다윗은 멀쩡하게 살아서 왕으로서 호사와 권력을 계속 누리는데 비해 왜 죄 없는 아이가 죽어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뿐 아니라, 어느 모로 보나 불공정한 것 아니냐고 비방할 것입니다. 왕이라서 꼭 살려두어야 한다면 아이 대신 차라리 간부(姦婦)이자 어미인 밧세바를 죽여야 할 것 아니냐고 반발할 것입니다. 왕인 다윗이야 죽은 밧세바 대신에 얼마든지 후궁을 더 둘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의 상벌의 원칙이 전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죄 지은 자는 반드시 벌 주고 의로운 자는 반드시 상 주어야 옳다는 것입니다. 불신 세상이 공통적으로 갖는 너무나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을 가야만 한다는 구원관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신자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참소자 즉, 검사의 역할에 더 충실합니다. 신자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사망으로 이끕니다. “네가 그러고도 신자라 할 수 있느냐? 감히 일국의 왕으로서 이방 백성도 짓지 않는 죄를 짓지 않았느냐?” 죄인의 양심을 살금살금 건드려 정죄 의식에 파묻히게 합니다. 범죄 소탕의 의지가 강한 자가 검사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듯이, 역설적으로 말해 사단은 어떤 죄라도 심판받아야 한다고 따지니까 도리어 죄를 싫어하는(?) 꼴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계12:10) 사단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줄곧 참소했습니다. 의인 욥을 두고도 그 믿음을 걸고 하나님께 내기하자고 덤벼들었지 않습니까? 이 일로도 하나님께 당신이 택한 충성된 종, 다윗의 꼴을 보라고 비아냥거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졌다고 큰소리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 참소를 견디지 못해 벌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윗과 밧세바를 벌주었어야 합니다. 대신에 죄 없는 아들을 죽였습니다. 사단의 참소에 넘어가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만 행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는 왜 죄 없는 아들을 죽이느냐는 비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충분히 그럴 줄을 아시고 즉, 사단의 훼방거리를 자초하면서도 아이를 죽인 것입니다.
왜 우리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계시록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권세”로만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택한 자는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온전한 회개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여전히 그 체질인 진토인지라 때로는 쓰러지기 마련임을 그분이 더 잘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아니 지을수록 더더욱 예수님의 보혈로 씻으셔서 거룩으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그분이 베푸시는 모든 것이 선합니다. 신자에게 주시는 것도 신령한 생명뿐입니다.
다윗에게 그가 범한 잘못과 똑 같은 종류의 벌을 훨씬 강한 세기로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참으로 엄정하십니다. 그럼에도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기에 벌을 주신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정확하게 깨달아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가 당신께서 택한 종이 아니라면 심판을 해버리든지 아니면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컨대 다윗, 밧세바, 아이 모두에게 심판이 당신의 궁극적 뜻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택한 백성이 거룩해지는 것만이 그분이 소망하는 최종목적지였습니다.
사단은 그 반대입니다. 인간을 정죄하여서 서서히 절망으로 빠지게 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이끕니다. 죄 지은 자가 반드시 벌 받아야 한다는 너무나 공의로운 명분을 앞세워서라도 끝까지 참소만 합니다. 사단이 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은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죽을 죄인이라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분만이 인간을 온전한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불신자가 사단에게 죄의 노예로 묶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포악한 죄를 짓기를 즐기거나 기괴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바로 사단과 같이 참소자의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 믿는 자가 죄를 짓느냐고 자꾸 따집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야 옳지 어떻게 예수 믿었다고 흉악한 죄인도 천국 보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끼리 당을 지어서 자기들끼리만 천국가려 한다고 비방합니다. 세상의 불의를 그냥 두고 보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도 없다고 하나님마저 참소하려 듭니다.
결국 사단이 궁극적으로 바라고 지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바를 불신자들이 대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훼방하려 드는 것입니다. 사단은 욥에게는 현실적 불행으로만 그 내기를 이기려 했고, 또 예수님에게는 골고다 언덕에서 최종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모년에 더 완전한 믿음으로 자라게 해서 곱절의 복을 내렸고, 골고다 십자가는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의 부활로 승리케 하셨습니다.
아담의 원죄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이는 결코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있어도 여전히 영적 차원에선 아주 어리석고 연약하며 무능합니다. 또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책감이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집니다. 죄의 본질상 그러합니다. 인간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훼파되었기에 정죄감은 반드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사단은 그 정죄감을 무한정 키워서 구원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듭니다. 신자가 회복되려는 기미가 조금만 보이면 무슨 수단이든 동원합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지금도 다윗이 진심으로 회개하자 사람들로 여호와 심판의 공평성을 물고 늘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정도 음모는 꿰뚫어보시고 신자더러 그럴수록 즉, 하나님께 이해가 안 되는 징계를 받고 세상의 비방을 받을수록 더더욱 참 회개를 통해 거룩한 소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단의 음흉함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항상 사단의 훼방거리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년에 더 크게 승리한 욥처럼,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반드시 그 훼방거리를 거꾸로 사단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선한 행실로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사항은 어떤 실패나 범죄에도 절대 자책하며 넘어져 있어선 안 됩니다. 사람 눈치는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일어서고 또 일어서야 합니다. 아무리 회개를 열심히 해도 거기 머물러 하늘 푯대로 나아가지 못하면 오히려 사단에게 큰 훼방거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주님 이끄는 대로 한 걸음씩 전진하다 보면 어느덧 주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9/10/2010
딱 두 마디로 "반사" "반사" 하면서 지내던게 떠오르네요.
그건 다름아닌 그런 욕을 한 친구에게 그 내용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뜻이었죠.
사단의 어떠한 훼방거리도 구원의 거울로 "반사" "반사"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오뚜기"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