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큰 초자연적 기적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1,12)
모든 신자들이 초자연적인 이적에 대한 소망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의 어려운 일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일어나 더욱 그분을 신뢰 감사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바람이 있습니다.
“초자연적”(超自然的)이란 자연의 섭리를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물리학적으로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파괴되고, 수리학적 공식이 무용지물이 되며, 경제학적으로는 input에 전혀 비례하지 않는 output이 산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제정해 놓은 법칙마저 스스로 깨트리는 행위가 바로 기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나 간사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기적을 그렇게 소망해놓고 일단 일어나고 나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감격이 시들해지면서 급기야 당연한 일처럼 여깁니다. 초자연적 기적이 아니라 단지 일상사보다 조금 더 큰 경사가 일어났다고 간주합니다.
이렇게 기적에 대한 감사가 감소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이미 일어나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큰 기적도 물질계 내에서 가시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사안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어쨌든 일어났기에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리라 간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의 법칙을 어기면서까지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몰라도 갈수록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드는 본성이 신자가 된 후에도 생생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진짜 초자연적인 기적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전혀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엄청나게 좋은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 과정과 결과를 아무리 해도 자기 눈으로 전혀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초자연적이 되려면 자연계 내에서 인간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한계조차 완전히 뛰어넘어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완악한 본성은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질과 양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즉 기적은 그 정도가 가장 우수한 것(supernatural)으로 간주해버립니다. 따라서 그 본성마저 꼼짝 못하게 만들어야 초자연적(preternatural)인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말로는 도저히 전후 경과를 설명할 수 없는 대신에 저절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그런 일말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聖靈)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5-7)
영생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는지,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는지 되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성령으로 나면 된다고 하자, 그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의 역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긴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일을 곰곰 따져 보십시오. 너무나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도덕성, 종교성, 영성이 니고데모와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될 만큼 열등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아예 믿으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부, 반발, 분노 심하면 저주까지 했었지 않습니까? 아무 이유 없이 예수가 싫고 미웠습니다. 그러다 언제인가 모르게 아무 이유 없이 예수님이 좋아졌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순종하고 싶어졌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기에 그분의 사정을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일방적으로 택하시어 주권적으로 베푸신 구원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로 하나님이 들어오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은혜가 베풀어진 전후 과정은 우리의 오감으로는 전혀 감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자연계 안에선 그 궤적이나, 뒤에 남기는 흔적이나, 심지어 회전하는 그림자도 단 하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이 우리의 영혼 깊숙이 좌정하시어 우리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이 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자연을 초월한 기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서 그분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영원히 그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전 우주를 만드신 천하 만물의 주인이자 통치자가 아빠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그분과 영원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미 영생을 소유한 것이며 벌써 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이적을 지금도 날마다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열역학 법칙, 수리적 공식, 인과응보의 자연섭리 등을 초월할 수 있는 신분과 자격과 심지어 능력도 갖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초인(超人)이 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분의 자녀가 된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와 개인적으로 맺어가는 관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이성으로 이해는커녕 오감으로 인식조차 못해도, 아니 그럴수록 더더욱 그분의 놀랍고도 오묘한 은혜와 권능이 넘치도록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교제와 동행 전부가 초자연적인 이적들로 가득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3:7,8)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솔직한 영적 실상은 어떠합니까? 여전히 눈에 보이는 이적만 찾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 받을 때는 분명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적이라고 감격하며 찬양 했지만, 자연계 안에 이미 실현되고 나니까 차츰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이적을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 자신의 투자나 노력 하나 없이 큰 열매를 맺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 정도로 격하시키는 큰 불경입니다. 다른 말로 이런 이적은 많이 바랄수록 오히려 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놀랍고도 오묘한 간섭이 가져오는 결과가 너무 유익하고 좋기에 자신의 거룩한 성숙을 도모하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아니 그전에 그분의 자녀가 되고 그분 품 안에 있는 것 만한 기적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된 후에 일어나는 범사가 초자연적 이적이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신자는 받은 복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하지만 지금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넘치는 이적 가운데 있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그분의 사정을 아는 것이 바로 초자연적 이적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삶 가운데, 특별히 환난 중에 그분 특유의 사정을 헤아려가다 그 환난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임을 진정으로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최고 큰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연계 내에서 크게 벌어졌다가 금방 사라지는 지금껏 추구했던 기적 대신에, 이미 얻은 영생을 누리며 속에서 생수가 끝없이 솟아나는 참 기적을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10/1/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