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1,2) 죄책감에서 해방되어라.(2)

조회 수 847 추천 수 28 2010.09.27 18: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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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에서 해방되어라.(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자일수록 영적 실패에 대한 실망감이 커집니다. 아무리 작은 죄를 범해도, 경건생활에 조금만 나태해져도 나는 왜 아직 이 모양인가 곤혹스럽다 못해 스스로도 자신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자꾸 싫어지고 심하면 하나님이 자기가 실족하지 않도록 주위 여건과 마음을 온전히 다스려주지 않은 것 같아 원망마저 듭니다.

죄에 민감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영적으로 성숙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박수를 쳐야하지 결코 실망할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그런 실망감이 너무 자주 반복되니까 솔직히 힘이 빠지고 하나님의 동행은 물론 구원 여부마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리 궁리해 봐도 “오호라 이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실 자는 그리스도뿐이라”는 바울의 고백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돌고 돌다가 완전히 탈진한 후에야 골고다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사역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밖에 소망이 없으며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자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나온 자백이긴 하지만 정말로 온전한 자백인지 조금 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만이 소망이라고 말했을 때 단순히 이제는 정죄함이 없음에 안도하는 수준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었겠습니까? 틀림없이 후자일 것입니다. 그에 반해 십자가로 돌아가자는 우리의 고백은 전자로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라도 지난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지우려는 종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의리를 갖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공동체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마피아 갱단입니다.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의 대부 영화 시리즈에는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코끝이 시큰할 정도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어지간한 의로는 그들 사이의 섬김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지 못합니다. 인생을 사는 방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의로운 행위를 많이 했어도 결국 추구하는 목표는 돈뿐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죄악 자체를 평생 직업으로 삼았기에 동료를 위해 생명을 던지는 최고 의로운 행위를 해도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인간의 의로운 개별 행위로는 하나님의 구원에 절대로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인생을 살아가는 일관된 방향이 달라야만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 전체를 보고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 같은 위인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해 괴롭다고 실토했듯이 성자(聖者)를 구원해주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도저히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죄인을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죽음에서 건져주십니다. 죄인의 행위를 바로 잡아서 구원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거저 주시어 살려내는 것입니다.

왜 자신을 구원의 은혜로 인도하였는지는 본인은 물론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영원히 그분의 신비에 속할 뿐입니다. 택함 받지 못한 자는 아무리 의로운 행위를 해도 은혜 밖에 있을 것이며, 반대로 택함 받은 자는 어떤 큰 죄에 빠져 있었어도 구원을 베푸십니다. 불공평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생 전체로 보았을 때에는 모두가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을 살려냈다면, 그 후에는 아무리 큰 죄를 범했어도 다시 죽일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분을 따라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중에 범한 잘못을 두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모자라고 비참하고 추했던 한 사람을 그냥 살리신 것입니다. 그 성품이나 행위를 바로 잡아 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그분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분께 진정으로 엎드리기만 하면, 사실은 그분께서 그렇게 하도록 이끄셨지만,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단번의 용서로 영원한 용서가 이뤄집니다. 변개, 수정, 타협, 포기, 취소는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토록 정죄함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복음 안에 이미 들어온 신자에게 하나님의 사죄는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죄감에 매일 이유가 전혀 없기에 정작 신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다시 출생케 하여 당신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혈연관계로 맺어주셨습니다.

부자 관계란 서로의 필요와 기분에 따라 만났다 헤어지는 교제나 거래와는 전혀 다릅니다. 설령 각기 부모와 자식으로서 할 바를 다 못할 수는 있어도 호적에 기록된 내용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이름은 하늘의 호적부인 생명책에 이미 올라가 있습니다. 세상의 부자 관계도 아무도 간섭 못하는데 어찌 하나님과의 부자관계가 바뀔 수 있겠습니까?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아비는 스스로 집 나간 자식마저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문밖에서 기다립니다. 먼발치서 먼저 아들을 발견하고 뛰어나가 끌어안아 주십니다. 과거의 잘못은 일절 묻지도 않고 오히려 잔치를 배설합니다.  

돌아온 탕자가 절감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회복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전히 자신은 그 집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아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종으로라도 받아주면 감사하겠다고 여겼습니다. 내가 지은 죄의 벌도 당연히 받을 것이지만 먹고사는 일만 해결했으면 만족하겠다는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아비는 곧바로 전혀 주저함 없이 당신에게 똑 같이 귀중한 둘째 아들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부자 관계란 세상 어떤 것으로도, 심지어 자신들이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되지 않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아비가 아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너무나 엄청납니다. 인간의 부족한 말로는 도무지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한 인격체로 당신의 전 인격을 걸고서 대해주셨고, 또 대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의로 완전히 덧입혀진 인격체로 말입니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처럼 대하십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자 축복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0-22)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가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그들의 말을 인하여 믿는 모든 자를 위해 하신 기도를 보십시오.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들 안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심지어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영광을 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앞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6-29)

모든 신자로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속하지 않게 따로 불러내워서 구원을 주시면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은혜로운 것입니까? 평소에는, 특별히 죄책감에 묶여 있을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내용 아닙니까? 성부 하나님의 온전하심 정도로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왜 나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들게끔 “택하신 까닭”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어떤 죄도 영원토록 용서해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함을 이 땅에서부터 체험으로 누리고 자신과 주위에 실현하여 확장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려면 십자가 진리를 정확히 알아 그 진리만 붙들고서 그 진리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쓰러지고 넘어져 다시 십자가의 예수님 앞으로 돌아왔다는 의미가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니 다시 성화를 이뤄보자고 결단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됩니다. 반드시 그분의 자녀가 된 이후의 정체성과 특권을 다시 확인하고 실행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십자가가 어떤 죄책감이라도 없앨 수 있다는 것만으로 복음이 아닙니다. 전의 반에 해당될 뿐입니다. 후의 반이 더 중요합니다. 실제로 주님의 은혜로 거룩해질 수 있기에 진짜 완전한 복음이 됩니다.

신자는 주님의 전부를 이미 받았습니다. 최소한 그분이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갖고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동행해 주십니다. 우리를 거룩케 해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여 간구하면 우리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모든 면에 당신의 참 생명으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분명 죄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너를” 해방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이전의 범한 잘못들을 용서해 준 것이 아닙니다. 한 죄인의 존재 전부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이 삶의 실제적 능력이 되된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살아난 것입니다.

“내가 숨 쉬고 누워 자고 침 삼키는 순간에도 주님의 권능이 온전히 임재해 있음을 믿습니다. 내 마음의 중심을 붙들어 생각까지 거룩하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진리에 따르도록 해주시옵소서. 내 지은 죄를 일일이 자백하오니 당신의 보혈로 씻어주시되, 용서 받은 그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신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으로 나를 충만히 채워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 바라고 기뻐하시는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언제 어디로 이끌든지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따라가게 하시옵소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의 충만으로 나의 모든 부분과 내가 행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과 장소에 충만케 해주시옵소서. 아멘”  

당신은 언제 어떤 모습이든 주님과 일대일로 전인격적 대면, 교제, 동행을 이루고 있습니까? 쉽게 말해 아버지 하나님 앞에 그분의 사랑스런 아들과 딸로 서있습니까? 단지 용서 받은 죄인으로 눈물 흘리며 계속 엎드리고만 있습니까?  

9/27/2010

김광찬

2010.09.28 09:06:58
*.6.1.81

아멘 †

김순희

2010.09.28 09:35:35
*.160.176.34

잘 살펴 보아야할 두 가지 관점, 정죄감이 사라진 안도감인지 아니면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확신인지를,
쉽게 말해 아버지 하나님 앞에 그 분의 사랑스런 아들과 딸로 서있는지 단지 용서 받은 죄인으로 눈물만 흘리
며 계속 엎드리고만 있는지... 아멘!! 아멘!!

Steve

2010.10.30 11:48:25
*.169.221.248

죄책감은 하나님 앞에 매우 불경스러운 믿음의 자세입니다. 왜냐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이 내 죄를 용서하시기에는 다소 모자란다는 불신이 밑바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불신의 행위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죄 사함의 사역이 내 죄의 용서에는 미비하다고 그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와 같다는 표현까지 하셨습니다.
깊이 새겨 들어야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 죄책감에 빠져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가요...?

빌립보서 3장 13-14절 말씀에서 어떤 자세로 대처해 나갔는지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백한 죄는 잊어버리고 계속 전진하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도달하려고, 계속 전진] (빌립보서 3:13)


구원받기 전에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독선적인 (self-righteous: 자기 의) 운동으로 악명 높았습니다 (빌립보서 3:16).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흉악한 죄를 용서해주셨을지라도 그 죄책감에 대한 기억이 바울의 영적인 삶을 절름발이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범한 죄를 단절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영적 성숙을 향한 현재의 목표에 집중하였습니다.

일단 한번 자백한 죄는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처럼 우리도 잊어버려야만 합니다. (시편 103.12, 이사야 43:25). 어떤 사람이 우리를 화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증오에 차서 (악에 차서) 화를 내고는 하나님께 그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리지 못하면 그 죄는 우리로 하여금 증오심이 쌓이게 하고 복수심에 목마르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정신적으로 범하는 죄) 죄는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하고 단절하지 않으면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죄에 즉시 불을 당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죄는 원래 속해 있던 과거에 내버려두어야만 합니다. 그리해야만 기독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영적 성숙을 향하여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계속 전진]. (빌립보서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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