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중인 신자에게 가장 적합한 위로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1:7)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가장 적합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끝까지 어려움을 견디어내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저희도 함께 기도에 동참하겠습니다.” 누가 봐도 아무 하자 없는 정답입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바울 사도는 훨씬 다른 내용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충고하거나 혹은 “이렇게 저렇게 될 테니까 믿고 안심하라”고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고난 중에 있지만 우리 소망은 견고하다고 합니다. 마치 교인들은 힘들어 울고 있는데 바울은 그 아픔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웃고 있는 꼴입니다. 쉽게 말해 고난을 이겨내기보다 계속 당하라고 권한 셈입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예란 반드시 자발적, 헌신적, 끝까지의 의미를 수반합니다. 자발적 참여이기에 의심, 불평, 불신앙, 분노, 짜증, 슬픔 등과는 원칙적으로 무관합니다. 자기가 좋아서 한 일로 화내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현실적인 고달픔이 따를지라도 충분히 감내해 냅니다.
신자란 머리 둘 곳도 없이 외롭게 수난의 길을 가셨던 주님을 기쁨으로 따라가는 자입니다. 그 길이 불편하고 힘들다고 여겨지면 처음으로 돌아가 정말 평생토록 마땅히 걸어갈 길을 다시 선택해야 합니다. 한 번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거나 스스로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연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온전히 깨닫고 그 뜻 안에 자기 전부를 던져 넣었는지 재점검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 교인 가운데도 너무나 쉽게 또 자주 넘어지는 우리처럼 고난으로 믿음이 떨어져 낙심에 빠진 신자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신자가 당하는 고난의 근본 뜻은 바로 예수님이 당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실” 것이라는 위로는 엄밀히 말해서 틀린 것입니다. 지금 현재 당하는 고난은 악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발적 헌신적으로 고난에 동참한 자로선 그 고난이 결코 악이 아닙니다. 단순히 선으로 가는 필수 코스인 것만도 아닙니다. 주님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자신도 걸어가고 있는 너무나 영광스런 일입니다. 비록 전승이긴 해도 베드로는 주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조차 너무 과분하다고 여기고 자원해서 거꾸로 매달렸다지 않습니까?
바로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 소망을 갖는 두 번째 이유가 등장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기에 (주님의)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신 것이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된 것 같이 너희 고난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항은 “위로해주라”고 권하지도, 또 “위로해주리라 믿는다.”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위로에도 동참할 줄을 “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될 것이 너무나 빤하다는 것입니다. 앎이란 가능성, 개연성은 물론 믿음보다도 더 확실한 경우입니다. “믿음”만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도 포함되지만 “앎”은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대체 이런 앎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무엇보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죄에 빠진 모든 이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했던 사도들에게 고달픔은 없고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위로가 넘쳤던 것입니다. 주님과 더 깊고도 친밀한 교제가 이뤄지는 가운데 신비하고도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주님이 맡긴 일을 하고 있으면 밖으로는 온갖 핍박이 난무해도 안으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강과 자유로 충만해졌던 것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笞杖)을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굻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말하자면 바울이 당한 이 수많은 역경 중에도 한 번도 주님의 위로가 넘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그러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다면 감히 그런 줄 앎이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일에 헌신하면 현실적 상황이야 어떠하든 주님의 위로가 넘치도록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 하나의 절대적 공식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믿음으로 환난을 이겨내는 것은 너무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하나님이 하시기로 원하시고 작정만 하시면 언제든 누워서 떡 먹기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신실한 신자일수록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지 않을 때가 오히려 더 많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고난을 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믿음의 자세가 단순히 기도하여서 환난이 끝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고난에 동참하여서 고난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것도 어려움을 인내 내지 감내해 내는 정도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신나게 그 길을 걷고 있되 주님의 넘치는 위로까지 받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받은 주님의 위로를 아직도 고난 중에 있는 연약한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나눠주어야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믿음으로 인내하며 간절히 기도하여 고난을 이겨내십시오.”라고 권면하면 고난은 무찔러야만 할 대적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난을 믿음의 기도로 겨우 물리쳐만 봤지 고난 중에 넘치는 위로를 전혀 받아보지 못한 신자가 해줄 수 있는 권면에 불과합니다. 그 배후에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고난이 사라진다거나, 사라져야 한다는 사상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과 기도 자체가 고난을 없애주는 능력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만사의 궁극적 최종적 주관자는 절대로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다시 바울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28,29절) 세상 어떤 역경보다 성도들의 약함과 실족으로 안타까워지는 것이 자기로선 더 큰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요컨대 신자가 자기에게 닥친 현실의 고난만 이겨내는 것은 성숙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주님이 허락하셨고 내가 기꺼이 동참한 고난이기에 그 고난이 바로 주님의 위로임을 “안다”고, 믿는다가 아니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고난을 끝내주지 않는 한 평강을 얻지 못하는 자에게는 결코 참 위로가 없습니다. 고난에 대한 진정한 승리도 얻지 못합니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끝나기 전까지는 그저 괴롭고 힘들 뿐입니다.
혹시 고난 중에 있는 자가 있습니까? 어쩔 수 없이 끝날 때까지 인내만 하고 있습니까? 주님 가신 길을 기꺼이 따라 가기에 주위에 꼭 나눠주고 싶은 주님의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신실한 신자일수록 고난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수긍하십니까? 내가 겪는 고난보다 주위의 연약한 성도의 아픔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십니까? 그렇다면 베드로처럼 주님 가신 너무나 영광스런 길을 이미 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상급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클 것입니다.
9/8/2010
저는 그 이유가 제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당할때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믿음안에서의 격려를 구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그분들께 못드린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히 믿음의 공동체의 성도들인데도 막상 어려운 일을 만난 것을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부터 꺼내지지가 않더라구요.'
이메일이나 전화로는 가능한데 왜 직접 만나서 얼굴을 대면하면 믿음으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그건 저나 다른 성도님이나 고난가운데서는 사람이 일단 인간적인 위로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힘든데 믿음으로 이기라는 말이 어쩌면 냉정하게 (?) 들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힘든데 상대방은 너무 침착하구나 느낄수도 있고 냉정하게 들릴수도 있고 사랑없이 원칙론적으로 말하는 사람처럼 느껴질수도 잇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힘든 가운데 가장 냉정하게(?) 말하시는 분이 의외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냉정함 때문에 마음이 아픈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주님의 냉정함이 진토에서 저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냉정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께로부터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부터 듣는 냉정한 (?) 말이 우리 영혼을 살려 주시는 말이 될때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토라지고 삐지고 주님께 불평하는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하게 된것 같습니다.
뭐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영적 세계에서 삐순이 삐돌이는 사탄의 밥이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일단 삐순이는 절대 안된다 알고 나니 주님께서 가장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시고 계시는데 알기 전에는 냉정하시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