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년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왕상19:1,2)
혼자서 갈멜 산의 바알 선지자들과의 중과부적의 대결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엘리야에게 기다리는 것은 잘 아시는 대로 처절한 낙심이었습니다. 당장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협박에 놀라 그 당당하던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은 눈 닦고 찾으려야 보이지 않고 꽁무니를 감춘 채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영적인 큰 승리 다음에 조금이라도 자만하면 영적인 실패가 따른다고 해석 합니다. 물론 너무나 맞는 영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교만 내지 방심했다는 기록은 물론, 그런 힌트조차 성경에는 없습니다. 본문에 이어서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3절)라고만 말할 뿐입니다. 그로선 분명히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을 판단해보고는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적 침체라는 단순한 이유 외에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 본문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세벨이 군대를 보내 바로 엘리야를 죽이면 되는데 구태여 사자를 통해 내일 죽이겠다고 예고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마치 도망가게끔 시간 여유를 준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일은 상대가 전혀 눈치 못 채게끔 전광석화처럼 해치우지 않습니까? 그럼 이세벨이 갈멜 산에서 당한 무참한 패배 소식을 듣고 엘리야가 두려워졌고, 그래서 괜히 큰 소리 한번 쳐본 것에 불과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와 정 반대입니다. 도리어 자신감이 흘러넘쳤습니다. 엘리야도 그간에 이세벨이 저지른 폭행과 그녀의 잔인한 성격을 익히 알았습니다. 정말로 “이 형편을 보고” 살려고 도망간 것입니다. 이세벨은 그가 아무리 도망쳐도 이스라엘 경내에선 언제든, 아니 하루 만에 붙잡아서 죽일 수 있다고 진짜로 큰소리 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바알과 앗세라 신들의 권능을 회복 내지 과시하려 든 것입니다. 자기도 엘리야처럼 미리 예고하여서 그대로 이뤄지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에게 “네가 믿는 여호와 신에게 맘껏 의지해보라! 어떡하든 내가 너를 하루 만에 죽이고 말 것이다. 과연 여호와와 바알 중에 누가 더 힘센 신인가 가려보자. 갈멜 산에선 어쩌다, 자신이 참석하지 않는 바람에, 한번 졌을 뿐이다.”라는 강력하고도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세벨은 당시의 모든 우상 선지자들보다 더 신념에 차고 독한 여자 사제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경고에 왜 그 당당하던 엘리야가 주눅이 잔뜩 들게 되었습니까? 그에게 정말 어떤 영적 침체 현상이 온 것일까요? 그러나 영적 승리 뒤에는 항상 기쁨과 감격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지 낙심되는 일이 생길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언뜻 그가 영적 승리감에 도취되어 여호와 앞에 간절히 무릎 꿇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그분의 뜻을 물을 여유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갈멜 산 사건과 이세벨의 경고 사이에는 하루나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아무리 믿음의 선지자라해도 그런 큰일을 치르느라 체력도 고갈되었을 것입니다. 숨 돌릴 틈이라곤 전혀 없던 차에 포악한 이세벨의 공식적 전갈을 받았으니 겁부터 덜컥 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답게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무런 확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승리는 몰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해주실 것이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여기면서 자꾸 두려워지는 것을 자기 의지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전개된 상황을 보면 이 경우가 훨씬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가 흔히 저지르듯이 교만, 방심, 나태, 실족, 타락이 원인이 되어서 영적 침체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던 현실 상황에만 사고의 초점이 몰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세벨이라면 원하는 바는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이룰 것이기에 두려워진 것입니다. 상황이 아주 위급하게 전개되는 것을 확인했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그에게 인도는커녕 보호의 신호도 전혀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재(不在)하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큰 승리 다음에 바로 침묵 모드(Mode)로 들어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입니까?
이세벨의 마수에서 벗어날 길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광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죽음을 각오하는, 아니 실제로는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이세벨이 내일 이맘때쯤에 죽이고 말겠다고 큰소리 친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경내에선 도망갈 곳이라곤 광야뿐인데 그곳에 단신으로 들어가면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고 간주한 것입니다.
엘리야도 광야로 향한 길을 가다가 시종을 돌려보냈습니다. 이일과 아무 연관 없는 종까지 광야에 죽으러 들어갈 이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광야로 하루 길을 들어간, 이세벨이 예고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로뎀 나무에 아래에 앉아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4절)라고 자포자기 했습니다.
하루밖에 광야를 걷지 않았기에 벌써 신체적 고통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완전 탈진한 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 절이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5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광야로 들어가면 죽게 마련이니까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넉넉하오니”라고 했음), 차라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개괄적인 그림이 어떻게 그려집니까? 이세벨은 정말 독을 품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기세등등하게 설쳤습니다. 자신 있게 미리 경고까지 했습니다. 예상대로 엘리야는 도망갔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생명을 위하여 도망”했지만,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했습니다. 어디로 가도 이세벨의 추격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광야로 들어갔는데, 엄밀히 말해 자살하러 들어간 셈입니다. 아직은 천사가 수종 들어줄 줄은 알지도 상상도 못했던 때입니다.
이세벨이 원하는 그대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녀로선 손도 안 대고 코를 푼 격이 되었습니다. 궁정에 바알과 앗세라의 선지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선 콧노래 부르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눈에 가시 같은 엘리야가 제거된 것입니다. 자기 말 한마디로 그 큰 패배를 곧바로 승리로 역전시켰으니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최종승자는 바알이지 여호와가 아님을 자신이 입증해보인 것입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지금 이스라엘 전체에 여호와를 위해 헌신하는 자는 자기뿐이며 그분마저 침묵하고 있다고 여겨서 완전한 고립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평소의 그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사단이 그의 극도의 무력감에 편승해 그를 농락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시 간절히 매달려 이세벨과 대적하려 시도도 하지 않고 도망부터 갔으며, 또 광야로 도망가다가 죽어버리려 했던 것 모두가 사실은 사단이 심어준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여호와 하나님마저 그가 완전한 절망에 빠지도록 묵인했습니다. 지금 사악한 여종 이세벨의 뒤에서 사단이 기세등등하게 함께 설치는 꼴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다른 쪽에선 탈진한 여호와 종 뒤에 하나님마저 침묵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분명 사단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궁극적 승리는 항상 하나님의 몫입니다. 엘리야가 여호와마저 침묵하시는 절대 절명의 고독감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죽으려고 광야로 들어갔던, 그 대적 이세벨은 궁정에서 신나게 승리의 잔치에 취해 있든지 간에, 그분은 당신의 하실 일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이루실 뿐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분의 섭리와 주권에 훼방은커녕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종마저 사단에게 마음껏 농락당하게 놓아두시고도 당신의 뜻은 이루십니다. 사단이 제 멋대로 활개 치고 다니는 것 같아도 그마저 당신의 놀랍고도 완벽한 계획 가운데 이미 들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당신께서 그곳으로 사단을 이끌었지만, 신구약 통 털어 가장 큰 능력의 종이라 할 수 있는 엘리야도 사단에게 끌려 다니도록 하나님은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방치는 잠시 뿐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차면 당신의 계획은 완벽히 이뤄지고 당신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납니다. 지금은 그 영광이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이세벨과 그 일당이 벼락 맞아 죽었습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그들이 궁궐에서 신나게 파티를 벌이도록 방치하셨지만 이 역시 잠시 뿐입니다.
그보다는 엘리야를 다시 세워주는 모습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혹시라도 엘리야가 이세벨과 전투를 벌려 이기게 할 것이라고 섣불리 기대해선 안 됩니다. 단순히 엘리야가 갖고 있던 영적 고뇌만 해결해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고독감에 빠졌습니다. 그분의 일을 하기에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고민만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이 아니라 미세한 성령의 음성으로 말입니다. 그는 도망치기 전에 분명히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드렸을 테지만 듣지 못했던 바로 그 음성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나의 일을 하는 종도 네 혼자만이 결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가 여호와께 묻고 또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사단을 멸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사단이 공중권세 잡도록 허락해 두었습니다. 죄악을 심판하고 사단을 멸하는 것이 그분의 하시는 일 가운데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를, 특별히 당신의 종을 온전한 확신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케 하는 것만이 그분의 최우선 관심사입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우리와는 달리 교만, 나태, 실족, 의심, 불평 등에 기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것처럼 그는 철저하게 고립무원이 되는 완전한 격리의 자리에까지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했던 셈입니다.
“나 혼자 이세벨 도당과 상대하게 해놓고 이제는 보호마저 해주지 않으시면 어떡합니까? 정말로 나를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모실 것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그 뜻은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골고다 십자가에 완전히 올라가자 비로소 하나님은 이세벨은 예후에게 멸망당할 것이며,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이스라엘에 남겨 두었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엘리야의 경우는 하나님 일을 끝까지 혼자 감당하다 너무 지쳐서 생명까지 내놓을 지경에 이른 영적 침체였던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와 말씀에 등한히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와 손해를 입어서, 어떤 힘든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고난이 지속되어서, 예배가 시들해지고 기도마저 안 되는 그런 류의 침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흑암의 세력에 의해 막히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너무나 안타까워서 외치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 성 밖에도 나가본 적이 없기에 함부로 영적침체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온전한 십자가는 짊어지지 않고서 현실적 어려움은 무조건 다 도매금으로 십자가라고 치부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현실적응력이나, 좋게 보아주어야 종교적 실력에서 조금 뒤쳐진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왜 로뎀 나무의 천사는 안 보내주느냐고 불평하기 바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가, 특별히 주의 일을 전임으로 하는 종들이 끝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붙들고 살기만을 원하십니다. 세상 앞에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의 향기를 드러내기를 소원하십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엡1:6)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엡1:10) 하십니다.
우상에 굴복하지 않고 죄악에 물들지 않은 채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신자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비취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신자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행하면 하나님도 끝까지 당신의 방식에 따라 보호 인도하십니다. 많은 동역자도 붙여 주시고 궁극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신자는 광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크신 능력으로 무슨 문제든 해결해 주신다는 초보적인(?) 신뢰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절대적 진리이신 당신만 증거하겠다는 순수하고도 변함없는 믿음만 갖고 있으면, 설령 죄악과 사단에게 져서 넘어가더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통해 당신의 거룩한 뜻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입니다.
그것도 실족의 순간에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넘어져 있는지, 앞으로 어떤 결과가 될지 신자가 전혀 깨닫지 못해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해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고 오히려 의심과 불만이 쌓일 때라도 그분은 당신의 일을 당신의 일정과 방식으로 신자를 통해서 이루시고 계시다는 것과, 그 결과도 신자에게 반드시 유익하게 나타나고야 만다는 것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사단이 아무리 까불어도 하나님은 눈도 깜짝 않으신다는 믿음입니다. 신자에게 어떤 치사하고 더럽고 험악한 일로 농간을 부려도 그분은 꿈적 않으십니다. 엘리야 같은 믿음의 위인마저 당장 닥친 환난의 와중에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신실하게 수행하고 계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신자에 대해서 신경 쓰시는 분야는 오직 하나입니다. 진리 가운데 굳건히 서서 진리를 드러내겠다는 열심과 헌신이 있는지 여부입니다. 만약 우리가 실제 삶에서 진리를 담대하게 구현하고 있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이를테면 로뎀 나무 아래에서 더 이상 떨어질 데가 없는 절망 가운데 엎드러져 있어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단에게 밀 까부르듯이 농락당했지만, 주님의 진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더 큰 은혜와 권능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영적 원리와는 무관하게 지금 너무나 힘든 일 가운데 있습니까? 세상의 죄악과 사단의 유혹을 철저히 배격하십시오. 대신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만은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입술에서 저절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탄식이 나오는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말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신분이 되었지 않습니까? 또 성경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늘과 땅의 만물을 통일되게 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9/28/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