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하32:1-8절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아주 짧은(?) 기간에 예루살렘 성 밖의 물 근원을 폐쇄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만 가지고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분명 설명이 곤란한 난해구절이 됩니다. 왜 그런지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 본문의 문자적 느낌은, 히스기야 왕이 오래 전에 산헤립의 침공을 예견하여 미리 ‘물 근원 봉쇄’ 작전을 수행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침공이 시작되고 난 이후에 부랴부랴 서둘러 작업한 듯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 산헤립이 앗수르를 출발하여 예루살렘 포위 공격할 때까지 소요된 시간이 얼마가 됐든지에 관계없이, 히스기야의 방비작업은 쉽지 않은 공사였을 것입니다. 오늘 의문점인 지하수갱 공사(물 근원 폐쇄 작업)도 그렇고, 6절 이후부터 기술되고 있는 성과 망대와 외성과 밀로 중수 공사 또한 오랜 기간을 요하는 작업들입니다.
▲ 오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왕하 18장은 다른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보다 사실적인 것 같습니다.
○ 재위 6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왕하18:10)을 목격한 히스기야는 향후 있을 지 모를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해야겠다고 다짐했을 수 있습니다. 급기야 히스기야 14년에 산헤립의 침공이 현실화되었으므로, 약 8년 정도의 대비기간이 있었다 하겠습니다.
○ 이 정도의 기간이라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지하수갱 작업을 비롯한 여러 공사를 완공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확보된다 하겠습니다.
○ 한편 왕하20:20절에는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이 히스기야의 치적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로는 지하수갱 작업의 기간을 추정할만한 단서를 찾기는 어렵다 하겠습니다.
▲ 한편 삼하5:8절에는 다윗 왕 시대에도 이미 지하수갱이 존재했다는 암시를 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水口)로 올라가서 다윗이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바로 “수구로 올라가서”입니다. 그 당시까지 이스라엘은 여부스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점령전쟁을 결심하고 내린 명령이 바로 8절 말씀입니다. 결과는 성공(점령)이었습니다. 이 ‘수구’에 관한 설명은 분분합니다.
○ 그런데 마침 김계환 형제님께서 좋은 자료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 설명이 바로 삼하5:8절의 다윗 왕의 “수구”에 관한 것입니다. 형제님의 소개 원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에서 오류를 발견했다고 할 때 이들은 결국 이들 자신의 말들로 심판을 받는다. 구 예루살렘 지하에 복잡한 고대 상수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것이 매우 조잡하게 설계되었다고 여겼다. 더 나아가 이들은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에 관한 성경의 기술이 오류라고 이야기 했다. 왜냐하면 언급되는 수 터널이 그의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들 고고학자들이 이 두 가지 설명 모두에 틀렸음이 밝혀졌다.
예루살렘 지하 수갱의 자세한 연구를 통해 이 수갱들이 정교하게 디자인된 이중 상수시스템으로 밝혀졌다. 거의 3000년 전 고대 엔지니어들은 구 예루살렘의 천연의 수로를 변경시켜 독특한 시스템을 창조해 냈다. 새로운 터널들은 현존했던 수로를 서로 연결시켰고 그리하여 가장 적은 양의 일로서 그들의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조사에 의하면 예루살렘 벽의 바깥쪽에 이 수로에 이르는 두개의 입구가 있었다. 이들 중의 하나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정복하는데 사용했던 천연입구였다. 이 입구들이 천연의 것들이었고 다윗시대 이후에 건설된 것이 아님을 우리가 지금 알기에 그 어느 누구도 이에 관한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의심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많은 오류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은 사실들을 알아갈수록 매번 성경은 진실함이 증명되어왔다.』
○ 김 형제님 제공 자료를 보강하는 내용의 설명이 더 있습니다.
『다윗이 천혜의 요새 시온 산성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었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수구’에 해당하는 ‘친누르’는 ‘하수도/배수로/지하통로’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기혼 샘에서 남쪽 저수지로 흘러 들어온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직으로 파놓은 갱도(坑道)를 의미한다. 이 갱도는 성 안에서 성 밖으로 연결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성안으로 군사들이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다윗이 이곳을 통해 적진지에 들어가 공을 세우는 자에게 푸짐한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요압과 그 군사들이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대상 11:6). 한편 이 수갱(水坑)은 1886년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1967년 워렌(Charles Warren)이 재차 발견하여 현재 ‘워렌 수갱’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이 수갱이 B.C 2000년경에 예루살렘 거민들에 의해 건설되었음도 밝혀내었다.』
○ 그런데, 김 형제님이 제공하신 자료에 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삼하5:8절에 관한 또 다른 해설입니다(IVP성경배경주석 p. 467).
『한 세기 이상 많은 해석자들은 다윗이 워렌의 수구(Warren's Shaft), 곧 주민들이 기혼 샘물을 길었던, 바위를 깎아 낸 굴을 통해 그 성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라이흐(Reich)와 슈크론(Shukron)이 터널 조직망을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워렌의 수구는 다윗 시대에 물이 지나가는 터널로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지하 급수망과 연결되지 않았다고 단정을 내렸다.』
○ 성경 기사만으로, 다윗 왕이 수구를 통해 예루살렘 성에 침투했는지를 증명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견과 학자들의 연구결과도 일치된다 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나 또 다른 설명에 의하면, 고대 근동에서 바위를 깎아 내어 만든 최초의 급수시설은 BC 13세기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 시대의 수구의 존재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할 것입니다.
- 어찌 되었든, 히스기야 이전부터 예루살렘 성에 지하수갱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습니다.
▲ 아무튼 히스기야 왕의 지하수갱 작업과 관련된 학자들의 고고학적 발굴 및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됩니다.
○ 지하수갱 작업은 예루살렘 성 밖의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으로부터 성 내의 실로암 샘을 연결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갱도의 높이는 1.2-2 미터, 넓이 0.6 미터, 총길이 약 520 미터의 S 자형의 천연 및 인공 터널입니다.
※ 마침 목사님께서 “히스기야 수로터널”이라는 귀한 자료를 알려주셔서 보다 정확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정리하겠습니다.
○ 오늘 본문의 분위기는 산헤립의 침공개시 후,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진 히스기야의 긴급공사인 것처럼 해석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성경의 여타 구절(왕하18장, 왕하20장, 삼하5장)과 학자들의 연구결과 및 논리적 판단에 의하면, 이 공사는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완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대규모 굴착공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습니다.
○ 따라서 오늘 본문은, 전에 없던 지하수갱을 최초로 굴착하는 공사였다기보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수갱을 약 8년 동안 재정비한 보수공사였다고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 오늘은, 설명하기 힘든 의문이라기보다는, 성경 한 구절에 얽매여 지엽적으로 해석할 경우 잘못을 범할 수 있으므로, 성경 전체를 염두에 두고 폭넓은 시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