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현 감독의 ‘하늘의 언어’를 읽고 갓피플몰에 올렸던 독후감입니다. 상당한 의견 대립이 예상되는 주제입니다만, 조금은 중심 잡을 필요가 있는 책인 듯하여, 한번 생각해 본 것입니다. 이어서 두어번 방언 관련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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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글쓴이(정순태)의 변 : 절대적 지지가 절대적 옳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때로는 ‘분별력’이 ‘신앙 자체’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으며, 만약 ‘분별’을 경시한다면 이는 마치 면도칼을 잡고 주먹 쥐는 것과 같습니다. 이 책도 ‘분별력’이라는 검증 렌즈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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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현 감독은, 참 독특한 사역을 감당하는, 호감이 가는 평신도입니다. 팔복①(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후 저자의 책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는 편입니다. 직접 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부흥의 여정」은 물론이요, 직접 쓰지는 않았으나 깊이 관련된 「부스러기가 꽃이 되다 / 천국의 섬」등도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교훈과 은혜 누리곤 했습니다.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빛나는 방언 문제를 다룬 “하늘의 언어-하늘 문을 여는 열쇠”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피상적으로 읽으면 응당 은혜 받을 만한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상당한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갓피플몰에 등록된 많은 호평과 다른 감정이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소수지만 몇몇 분들께서 비슷한 부분을 짚어주셨기에, 혼자만의 오해가 아닐 수 있다는 위안을 얻기는 했습니다만…
한 마디로 저자는, 아주 조심하며 기술하고는 있으나, ‘방언은사의 가치와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경도된 관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 방언은사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의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①초대교회에만 필요했던 제한된(특히 시기적으로) 은사라는 견해와, ②현대에도 필요한 보편적 은사라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각 진영마다 당연히 나름대로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평소 ‘100점짜리 이론(신학)은 없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으며, 방언에 관해서도 중도적 이해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①번 견해처럼 방언은사를 초대교회에 한정된 은사로 보지는 않지만, ②번 견해의 ‘보편적 은사’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②번 견해는 불가불 ‘믿는 자라면 누구나 받아야 하며, 방언을 못하면 구원여부를 심각하게 짚어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방언이 구원의 증표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뒤에서 다시 정리되겠습니다만, 방언의 은사적 위상은 성경의 보증을 받으나, 구원 얻은 자의 증표로 인식하는 것(특정 교파처럼)은 잘못이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 차이를 염두에 두고 저자의 주장이 지니는 몇 가지 미비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미비점을 살피기에 앞서, 이제 책을 읽으시려는 분이 계신다면 조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본문을 읽기 전에 후기 형식으로 첨부된 8개 문답을 먼저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의문답에는 분명 독자가 읽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의구심까지 미리 예견하여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으나, 본문은 ‘방언의 필수성’에 중점을 둔 논리가 강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읽어두면, 저자의 강한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치우침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이 확인되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책의 미비점 내지 주의해야 할 첫 번째 사항입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성경해석의 자세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단일구절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특정구절 하나를 인용하여 강조하면 엉뚱한 해석에 이르게 됩니다. 큰일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문맥적 해석’의 필요성을 조언하곤 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옳은 자세입니다.
그런데 저자의 책에도 ‘특정구절의 지나친 강조’ 형식의 주장들이 눈에 띕니다. 이미 앞서 이를 지적하신 분들이 계셔서 다소 중복되는 감이 들지만, 그래도 한번 더 살피겠습니다.
저자는 고전14:5절(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을 인용하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모두 다 받을 수 있는 은사가 있으니 그것이 ‘방언’이다.”(p.75)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은사는 차별적(특별은사)이지만 오직 방언만큼은 보편적(일반은사)이라는 뜻입니다. 또 “방언은 단순히 개인적인 은사의 문제를 넘어선다.”(p.206)라고 주장합니다. 역시 방언의 보편(일반) 은사론의 연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심각한 오해로서 특정구절의 지나친 강조 내지 확대 해석의 일례입니다. 왜냐하면 고전14:5절의 문맥상 의미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흐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신령한 것”을 설명하면서 ‘몸의 비유’를 통해 각종 은사들과 직분들을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12:31절에서 “더욱 큰 은사, 제일 좋은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사랑’(13장)입니다. 14장은 사랑을 부연하되 예언과 방언의 2가지 은사를 들어 설명을 이어갑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이 12-14장에서 강조하는 요점은 사랑》예언》방언이라 할 것이며, 14:19절에 가서 예언과 방언의 가치를 극명하게 정리해 줍니다. 즉, ‘일만 마디의 방언 = 다섯 마디의 예언’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즉, 큰 틀에서 볼 때, 고전12-14장은 방언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구절이 아니라, 사랑(은사의 하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해야만 고전13:1-2절의 진정한 의미(사랑 없는 방언과 예언의 무용론)를 감 잡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전 12-14장의 강조점을 고려한다면, ‘방언의 보편은사론’ 보다는 ‘사랑의 보편은사론’이 더욱 타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믿는 자라면 누구나 방언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기보다,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는 뜻이지요!(물론 사랑의 실천 부분으로서의 어려움은 오늘의 범위를 벗어나기에 생략합니다).
그러므로 저자처럼 고전14:5절을 뚝 떼어내어 진의를 곡해하면 곤란합니다. 저자가 확정적으로 인용한 고전14:5절은 성도라면 누구나 받아야 할 방언의 필수은사 보증구절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은 ‘성도는 무조건 방언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방언 말하기를 바라지만 방언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 혼자만의 오해는 아닐 것입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12장을 다시 살피겠습니다. 12장 4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임을 천명하면서 이후 각종 은사의 종류를 열거하십니다(물론 다른 곳에도 또다른 은사의 종류가 나옵니다. 학자들은 대략 27 내지 31가지의 은사 목록을 제시하곤 합니다만 사실 모든 것이 은사로서 그 종류는 한정되지 않는다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각양 은사는 다양할 뿐 아니라 특정은사를 공통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29-30절에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히 선언하십니다. 여기에 거론된 직분들과 은사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방언 문제도 포함됩니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이 말씀은 ‘모든 성도는 반드시 방언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일지라도 방언은사 못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명백한 의미의 문장입니다.
두 번째 주의사항입니다.
저자가 열정적으로 방언을 강조하다보니 자칫하면 ‘방언 =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언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대다수의 방언 현상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은 오직 하늘나라의 언어일 것이라는 생각이 고착되어 있습니다(어떤 분은 고전14:2절만 뚝 떼어 극단적으로 강조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도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방언의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방언통역의 은사도 있다는 성경의 선포가 이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좀 더 폭넓게 생각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록 흔한 빈도수는 아니지만, 오지 선교를 하시는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처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여러 가지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곤 하는데, 방언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언 현상 중에는, 비록 현지인들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즉,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미개인이 독일어를 구사하는 경우 등 입니다. 체험자들의 책을 통해 전해들은 간접 지식입니다(저자의 책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정확한 간접지식 인용은 그만하고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도 방언이 인간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사건 기록인 행2:5-13절입니다. 여기에는 천하 각국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의 출신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역명만 따져도 바대를 비롯하여 15개입니다. 그러면서 11절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듣는도다.”라고 하십니다. 15개가 넘는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아는 지방언어(이것이 바로 방언입니다!)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 당시의 방언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천상의 언어’가 아니라, ‘너무나도 익숙한 자기 고장의 현존언어’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방언=하늘언어’라는 고정관념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방언=인간언어’의 개념도 포함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이는 개인 추정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이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일)를 인간의 이해수준 이내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는 당연히 하늘언어로서의 방언 현상(고전14:2)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이때 이것(방언)이 그냥 하늘언어로 표현될 수 있고, 때로는 특정성도에게 의미가 해석될 수 있고(방언 통역 은사), 또 다른 경우에는 ‘인간언어’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늘언어’로 한정된다고 받아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세 번째 주의사항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인간의 고질적인 지레짐작 현상입니다.
성도들의 하나님의 뜻에 관한 보편적인 이해는 아마 이럴 것입니다. ;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한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동도 잘해야 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대접받아야 한다.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잘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설교들과 경건서적을 통해 증명되는 요약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개발한 강령은 이럴 것입니다. ; 아브라함과 요셉과 다윗과 엘리야와 다니엘 등의 모든 신앙선배들의 긍정적 측면만 강조하여 ‘오늘날의 성도들도 남보다 뛰어나서 인정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다.’라는 결론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상향성 원리’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를 ‘승귀욕망’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남보다 비교우위적 위치를 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상이지요.
일면만 보면 가능한 해석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달라집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 보아야 합니다. 상향성 이해의 근거가 되는 신앙선조들 어느 누구의 사례에 접목시키더라도 주님은 결코 설명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철저한 ‘하향성’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지위(창조자)를 자랑하기 위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되시기 위해 오셨을 뿐입니다. 자랑의 본체이시나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으셨던 분이십니다. 이 점을 놓친다면 성경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상향성 원리에 발목 잡혀 ‘자랑거리’와 결탁된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손실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자랑거리에 우리가 아는 모든 은사들을 대입시켜 보십시오. 지식, 지혜, 능력 등은 물론이요
금식과 구제와 십일조 등 모든 신앙행위들을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은사들과 직분들과 행위들을 하나하나 대입시켰을 때,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던가요?
좋습니다. 오직 ‘방언’만 적용하지요. 자! 방언 받았으니 자랑할 충분한 자격이 확보되었다고 확신하십니까?
아무리 성경을 살피더라도, 방언을 포함하여 그 어느 것도, 자랑의 근거가 될 만한 은사(선물)가 아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었던 바울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갈6:14). 바울은 방언을 자랑거리에 포함시킨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물론이요 바울도 강조하지 않았던 방언이 왜 ‘믿는 자의 유일한 증표’로까지 확대 해석되어야 하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네 번째 주의사항은, 첫 번째 주의사항에 대한 보충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특정요소(금번 주제인 방언 포함)만으로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인생처럼 종합적 견지에서 평가되어야 하듯, 성경해석도 특정인의 이해(익숙하거나 공감하고픈 해석)에 고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또 다른 해석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자유일 것입니다.
갓피플몰을 검색해 보면, 보다 진솔한 이야기를 고백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특정 은사를 강조하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능력으로 치부하기 쉬운 축사와 신유와 방언과 권위 등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쉬운 고통과 아픔과 실패와 좌절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발견해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성경의 본 뜻에 훨씬 근접한 바른 이해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향성 원리(승귀욕망)와 다른 시각에서 우리 신앙을 조명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냥 은혜로워 보이는 저자의 주장(일부 성경해석 포함)도 충분하거나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미비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위에서 지적된) 미비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와 관련된 의문사항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검토해 보는 것은 독자 개개인의 소관일 것입니다. 저자에게만 맡겨놓을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맺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사 받았다고 구원은 떼어 놓은 당상이 아니며, 또 방언 못 받았다고 구원이 물 건너간 것 아닙니다. 방언은사 유무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근거가 전혀 아닙니다. 받았으면 감사할 일이요 받지 못했으면 그러려니 하면 그만인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목사은사 받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과 동일한 논리입니다). 방언은사가 자랑거리나 자포자기의 근거로 작용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이제는 방언에 대해서도 좀 더 열린, 아니 성경적인, 이해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록 위와 같은 몇 가지 미비점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주장에 무조건 함몰되지 말고 수용 및 유보 부분을 슬기롭게 가려서 읽는다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비교적 좋은 책을 쓴 저자에게 감사드립니다. ♣
♥ 후기 : 또 다른 아쉬움 하나
저자의 첫 번째 책(팔복①)은 특히 2가지 면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는 평범 속에서의 비범을 찾아낼 줄 아는 저자의 혜안입니다. 최춘선 할아버지의 신앙도 놀랍지만 그것을 발견한 저자의 안목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담담한 필치였습니다. 저자 자신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자기 숨김). 무척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몇 권의 책이 더 발간되고, 금번 ‘하늘의 언어’에 이르러서는 ‘모범적이라 할 만한 위의 둘째 항목(자기 숨김)이 크게 위축된 것 아닌가?’라는 감이 느껴졌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무척 강하다고 생각됐고, 이는 의도성 여부와 무관하게, 저자 자신이 드러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해는 됩니다. 첫 책을 쓸 당시 저자는 무명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수긍하든 부인하든,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명사(VIP)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깨달은 바를 강하게 말할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점, 저자 자신(또는 자신의 생각)이 제법 강하게 어필되는 현상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아집에 가까울 정도의 자기확신으로 똘똘 뭉친 신학자/목사들의 열변(설교/책/주장)에 식상했기에, 저자의 「자기 숨김」 모습을 보며 신선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의 책에서는 그 정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혼미한 이 시대에 분별의 은사를 구해야겠읍니다.
물론 사랑을 전제로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