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용 목사의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를 읽고, 갓피플몰에 위 제목으로 올렸던 서평입니다.
이미 인터넷(www.usaamen.net)을 통해 접했던 내용이지만, 책으로 읽는 맛은 또 다르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교회 내의 리더십 내지 권위의 왜곡현상에 대해 고민하는 성도라면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오늘날 교계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인 영적 리더십의 오류에 관한 저자의 비평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비록 저자처럼 모든 자료들을 다 읽지는 못했으나, 기실 나 또한 오래 전부터 ‘현재의 교회 리더십으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인식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목사도 아니고 박사도 아니며 단지 학사 학위 하나 달랑 가지고 있는 서리 집사 주제에, 교회(그것도 우주적 교회)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칠실지우(漆室之愚)의 전형일 것이기에, 혼자 끙끙거렸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적 소양을 갖춘 현직 목사인 저자가 나의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줬으니, 나로서는 마냥 감사할 밖에 없다.
저자가 붙인 제목은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이다. 여기서 ‘사람’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나 서리집사 등도 포함될 것인가?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흐름상 ‘사람’은 ‘목사’로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목사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로 읽어도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전적인 공감을 표시하는 바이다.
나도 가끔 ‘목사의 권위’를 비판하곤 한다. 오늘날 현실교회에서 보듯, 무소불위적 권위의 화신으로 간주되는 목사 특히 담임목사의 위상에 대해, 신앙적으로 결코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목사가 교회의 주요 직분이기는 하지만, 때론 성령님의 권위마저 능가하는 막강 권세를 부여 받은 존재는 아니다.’라는 것이 나의 평소 소신이었다.
저자의 주장이 그렇고 나의 소신도 그렇듯, 목사의 무소불위 권한 위임의 근거는 성경이 아니다. 하나님의 원 계획에는 천사에 비견되는 특등 성도층이 없다. 현실교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특권층 목사는 인간 논리(일반 리더십 이론)의 산물일 뿐이다. 권위 위임의 근원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 설명의 일단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신령한 자의 대표로 인정되고 있는 목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목사는 신령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일 뿐이다. 다만 목사의 심령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른바(칭의) 신령한 자로 간주될 뿐이다. 이는 장로를 포함한 평신도들도 모두 동일하다. 목사가 신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신령한 것이다. 따라서 목사만 신령하다는 목사성직주의는 철저히 거부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때, 너무 편의적으로 해석한다. 성경의 모든 위인들의 경우가 그렇지만, 아브라함과 다윗 두 분만 예로 들어 보자.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고 이삭을 번제로 드림으로써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자격을 완벽하게 획득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완전’은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창25장을 보면 후처 그두라와의 사이에 시므란 등 6명의 아들들을 얻는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사라의 사후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147세가 넘은 나이에 ‘서자들을 더 낳았다.’는 성경 기사는, 상(上) 노인네(가장 늙은 노인을 가리키는 말) 아브라함에게 어울리는 올바른 행위의 열매라고 할 수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늙어서까지 실수의 연발이다.
다음은 다윗이다. 다윗이 십대 후반 내지 이십대 초반, 골리앗과 싸울 때의 신앙은 참으로 모범이 된다. 오직 하나님 만 의지하는 신앙의 전형이다. 또 10년 이상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에도,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에게 손댈 수 없다며,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모두 포기하였다. 이미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정도의 신앙수준이다.
정말로 다윗은 최고 수준의 신앙에 이르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밧세바와의 간통 사건은 그의 나이 약 49세에 발생했다. 당시에는 전장에 나가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이 왕의 보편적 임무였다. 그러나 다윗은 왕궁에 남아 늦잠이나 잤다. 그 결과는 우리아의 살해와 밧세바와의 간통으로 나타났다. 다윗은 이것이 죄인 줄도 몰랐다. 선지자 나단이 지적하자 겨우 깨달았다. 골리앗이나 사울을 대할 때의 모습과 너무 대조되지 않는가? 그것도 나이를 더 먹어 훨씬 더 성숙했어야 할 시기에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노년에 다윗은 쓸데없이 인구조사를 실시했다(삼하24장). 이때 별로 영적이지 못한 요압이 극구 반대한다. 요압의 만류(삼하24:3)는 무척 영적이다. 하지만 다윗은 못 알아듣는다. 67세에 이른 다윗이지만 요압보다도 못한 영성이다. 이러한 다윗의 잘못에 대한 벌은 백성들이 온통 뒤집어쓴다(삼하24:15). 과거의 신앙 공로와 현재의 연륜에 비추어 이해되지 않은 형편없는 영성이다.
아브라함이든 다윗이든,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어떤 신앙 위인들이든, 아무도 위대할 수는 없다.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일 뿐이다. 나이가 60을 넘고 140을 넘어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위인의 정의는 이것이다. 『언제(나이가 어리든 많든) 어디서나(어떤 환경과 처지이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임을 알고, 두 손 번쩍 들고 항복한 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얻은 자!』 여기에 인간 측면에서의 자격과 자질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자비와 은혜’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성경을 이런 시각으로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속뜻을 조금이라도 감 잡을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그 누구든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목사들의 위상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신학을 공부했고 박사 학위를 지녔다. 열심히 공부하여 지식적인 자격을 구비하였다. 교회를 개척하여 수만명 수십만명이 모인다.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이다. 설교는 청산유수처럼 매끄럽다. 놀라운 신유 내지 환상도 체험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완벽한 신앙인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근거로 ‘객관적 자격이 구비된 목사야말로 완전한 신앙인이며 따라서 그에게는 당연히 영적 권위가 있다.’고 말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위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살펴 본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자리에, 목사를 대입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목사에게는 영적 권위가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며(이 말을 성경과 성령님의 권위까지 부인하는 것으로 몰아붙이면 곤란하다), 이를 저자는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고 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나는 저자가 절규하듯 부르짖는 주장에 전적인 공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저자의 책은 문제제기 수준일 뿐이다. 아직은 대안의 제시가 없었다. 만약 인터넷을 통해 미리 읽지 않았다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을 법한 부분이다. 하지만, 추측컨대 저자는 후속작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비점(아직 다루지 않은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더 깊은 대안의 제시로 진전되기를 고대한다.
많은 성도들이 잘못된 이해에 붙잡혀 있을 것으로 우려되는 “영적 리더십”에 대하여 바른 시각을 제공해 준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