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16:17-18(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 방언만큼 성도들의 논쟁을 촉발시키고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주제도 드물 것입니다. 저 또한 몇 편의 글을 통해 개인적인 소견을 밝힌 바 있으나, 이해의 정확ㆍ부정확을 떠나, 저의 변함없는 생각은 ‘방언의 위상을 지나치게 격상시키지는 말자.’입니다. 즉, 방언이 성경의 보증을 받는 은사의 하나인 것은 명백하나, 그것이 믿는 자의 유일한 증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받은 성도가 있을 수 있고 못 받은 성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또한 이왕이면 받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여기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이 주제도 아무리 논의해 봐야 결말이 나지 않습니다. 옹호론자든 비판론자든 아니면 신중론자든(저는 여기에 해당됩니다), 나름대로 성경적 근거를 다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모든 견해가 다 맞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처럼 해석하게 된 동기 구절을 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실 방언 논쟁은 별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더 다루는 것은, 위 본문을 방언과 관련하여 해석할 때 자칫 잘못하면 매우 독단적인 해석으로 흐를 위험성이 크다고 생각되어서 입니다. 만약 본문을 근거로, ‘주님도 방언을 성령시대의 대표적 표적으로 예언하셨다.’라고 이해한다면, 이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진실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 사실 본문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하신 말씀으로서, 문맥적으로 해석해야하겠지만, 두 구절만으로도 정확한 의미파악이 가능하겠기에 간략한 방법을 택하도록 하겠습니다.
● 17절에는 말씀 이행의 주체가 된다고 여겨지는 인칭대명사 2개가 나옵니다. “믿는 자들”과 “저희”입니다. 둘 다 복수인 것은 분명한데 누구를 지칭하느냐는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성경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들’이라 했다면 12명으로 한정되겠지만 그같은 지시 대명사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불명확한 단어는 할 수 없이 ‘선한 추정’의 도움을 빌려야 할 것입니다.
● 우선, 당시 주님의 육성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불명확하나 일단 사도들은 다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 외에 다른 제자들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20절에 “제자들”이라는 단어와 연결해도 될 듯싶습니다). 일단, 정확한 인원수는 모르지만, 주님 당시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포함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 “저희”라는 복수형 인칭대명사도, 개역성경은 ‘저희’를 한번으로 처리했지만 NIV는 they를 5번 사용했습니다. ‘저희’는 해석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당시 현장에 있었던 자들만 지칭하려 했다면 ‘저희’가 아닌 ‘너희’로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아닌 ‘저희’로 기록한 데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비록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으나, 위에서 말한 ‘선한 추정’ 기법을 원용하여, “믿는 자들=저희”를 ‘초대교회 이후 전 성도들’로 받고 싶습니다. 전(全) 역사에 속한 성도들 모두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오늘날의 우리들’까지 포함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본문의 “믿는 자들과 저희”는 ‘오늘의 우리들까지 포함된 전 성도들’(비가시적 우주적 교회 구성원들)이라는 의미로 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여기까지는 논리적으로 별 하자가 없을 듯싶습니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아주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즉, “저희”를 ‘오늘의 우리들까지 포함된 전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도 큰 문제는 없으나, 이어지는 다섯 가지 표적과 연계시킬 때는 극히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에 기록된 표적은 5종(五種表蹟)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 방언을 말하는 것, 독사에게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 것,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는 것,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것 등입니다.
● 얼핏 생각하면 【믿는 자들=누구나 5종표적을 행한다.】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심한 자의적 해석일 뿐입니다. 이럴 때는 주님께서 주신 이성을 선하게 활용하여 좀 더 폭넓은 해석을 시도해야 합니다.
● 5종표적의 실행에 관한 성경 기사는 일일이 살피지 않고 함축적으로만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5종표적들이 전부 시행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축사/방언/치유 등 3종표적은 여러번 기록되었으나, 뱀 표적은 오직 바울 사도만 해당되고(행28:5), 음독 표적은 단 한 건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5종표적이 성경기록시대(AD 40년 후반부터 100년 사이) 이후에도 발생했었는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검토는 오직 성경 범위 내로 한정시킬 수밖에 없음을 동의해야 합니다.
● 주님께서 명시적으로 말씀하시고 성경에 기록된 5종표적일찌라도 이행된 것도 있지만 이행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도 한번쯤 다루어 볼 가치가 있으나 오늘 주제와 상이하므로 생략하겠습니다.
● 이제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모든 사도들/모든 제자들/모든 성도들은 누구나 5종표적을 다 행했느냐(과거) 나아가 반드시 행해야 하느냐(현재)의 문제입니다. 정말로, 믿는 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누구나 다 5종표적을 행해야 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인지요!
● 한 가지 더 짚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새 방언”에 관한 해석입니다. “방언”은 (헬) 글로싸(glossa)로서 지난번 상세히 살폈기 때문에 생략하고, “새”에 대해서만 다루겠습니다.
○ “새”는 영어 new로서 원어는 카이노스(kainos)가 사용되었습니다. ‘새로운, 사용하지 않는, 알려지지 않은’의 뜻입니다.
○ 따라서 “새 방언”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방언’으로 이해하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받으면 많은 문제가 야기될 수 있습니다. 따져 보겠습니다.
○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새 마음”(겔36:26)도 주셨고, “새 사람”(엡4:24)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변화된 ‘새 모습 내지 형상’을 기대할 테지만 사실은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새 마음과 헌 마음’이나 ‘새 사람과 옛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요! 외형상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단지, 영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즉, 차이는 보이는 외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좀더 인간적으로 말하면 ‘인격’)의 문제입니다.
○ 이같은 논리를 “새 방언”에 적용해 봅니다. ‘새 방언과 헌 방언’의 차이가 무엇인지요. 혀 꼬이는 것처럼 반드시 외형적인 현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새 방언”은 ‘새로이 변화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변화된 언어’로 받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일 수 있습니다. 변화된 영성과 인격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그것이 영어든 한국어든,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새 방언”이 아닐는지요!
○ 주님의 사례도 신중히 검토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2위 하나님으로서 실상 성령세례가 불필요하신 분이십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기 전부터도 이미 세 분 간의 교제는 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임재 현상(마3:16)이 나타났습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겠지만 역시 오늘 주제와 멀기에 그냥 ‘제자들에게 체험과 확신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만 하겠습니다.
○ 문제는, 주님께서는 ‘방언’에 대하여 오직 오늘 본문에서 단 한번 말씀하시고는, 더 이상 아무 언급이 없으셨다는 점입니다. 만약 방언이 필수론자들의 주장처럼 그토록 중요한(믿는 자와 아닌 자를 구분할 정도의) 역할을 하는 은사라면 자세히 가르쳐 주셨어야 합니다. ‘너희가 다른 은사는 다 못 받아도 괜찮다. 하지만 방언만큼은 꼭 받아라. 그래야 천국 문이 열린다.’라고 엄하게 경계해 주셨어야 합니다.
○ 나아가 몸소 본보이기 좋아 하셨던 주님께서는 중요한 기도는 모두 방언기도하심으로써 반드시 방언의 가치를 극명하게 알려주셨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나 대제사장 기도(요17장)는 방언기도였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셨다는 기사는 전혀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던 당시 언어(아마도 아람어)로 된 것들 뿐이었습니다. 주님도 방언 못하셨으니 문제가 되는 것인지요!
● ‘모든 성도는 반드시 방언해야 한다.’는 해석의 타당성이 증명되려면, ‘성도라면 누구나 축사와 신유와 뱀과 음독 표적까지 몽땅 전부 다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도라 할지라도 모두가 축사은사 하지 못합니다. 신유은사 못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5종표적이 아무리 명문화된 주님의 약속이라 해도, 독사에게 손 내밀고 극독물을 물처럼 마셔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 오늘 본문의 5종 표적 중 어느 하나라도 실행되었다면, 이는 전달되는 복음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것이지, 표적을 행하는 인간의 가치나 능력을 보증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주제를 해석할 때, 철저히 준수해야 하는 필수요건 중의 하나입니다!
● “믿는 자들에게는……새 방언을 말하며”라는 말씀을 ‘주님의 약속이므로 모든 성도는 전부 방언해야 한다.’라고 단정한다면, 이는 문맥적 해석은 차치하고, 문자적/문법적 해석마저 등한시한 것입니다. 무모한 해석인 것이지요.
● 지극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유독 방언만큼은 ‘꼭’이라는 특정 수식어를 붙여서, ‘모든 성도는 꼭 방언해야 한다.’고 단정해 버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수없이 반복 말씀드립니다만, 방언은사의 필요성과 좋은 점은 충분히 공감하나, 방언을 믿는 자의 보증수표를 보는 견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방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이득이 크다 할지라도, 치우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정리합니다. 방언은 분명 은사의 하나입니다. 은사는 값없는 선물로서 받는 자의 자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방언 하는 자만 성도일 수 없습니다). 아울러 은사는 다양하며 이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주실 자에게 주시는 것이 주님의 주권입니다). 따라서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자랑하거나 특별히 높일 수 없습니다. 만약 특정 은사를 과도하게 높이면 고린도교회처럼 꾸중 듣습니다.
●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지 말고 담담히 받아 들였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