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래 들어 또 다시 방언의 효능을 과도히 강조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귀중한 은사 가운데 하나인 방언에 대해 폄훼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이 증거 하는 이상으로 특정 은사를 부각시킨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기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 ‘하늘의 언어’ 독후감(서평)과 단상 ‘천편일률적인 성경해석의 위험성’을 통해, 방언에 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이때 오순절 다락방 사건도 조금 다루었습니다.

● 그런데 오순절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 약간의 견해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즉, 일부는 120명이 동시에 성령체험(여기서는 방언을 주제로 다루기 때문에 방언체험) 했다는 견해이고, 일부는 120명이 아닌 소수의 사람들만 방언 받았다는 견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장과 2장 전체를 조심스럽게 검토해야 합니다. 몇 가지 항목을 살피겠습니다.

● 행1:1-11절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이후 40일 동안의 지상사역을 마무리 하시며 성령세례를 약속하셨고,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땅 끝 전도사명’을 주시며, 드디어 승천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성경기사는 승천 직전의 상황(40일째) 묘사인지, 아니면 승천일 이전의 수 일간 진행된 상황 설명인지 명확치 않은 것 같습니다. 6절의 “저희가 모였을 때에”를 고려한다면 며칠 정도의 기간일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 이 구절에서 주님의 승천장소는, 거의 모든 학자들의 주장(이해)과 같이, 감람산으로 하겠습니다(12절 참조). 아마 타당할 것입니다.

● 그런데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의 숫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부활목격자 전원(500여 명 이상=고전15:5-8)이 승천장소에 모두 참석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늘 본문의 범위 내에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11절까지 “저희, 사도, 너희, 제자들, 갈릴리 사람들” 등 인원수를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모두 복수입니다. 여러 명이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정확한 숫자는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일단 ‘여러 사람이었다.’는 정도로만 정리하겠습니다. 다만, 11절의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해석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행1:12-14절입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소위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정되는 다락에 모입니다. 이때 다락에 모인 인원은 몇 명이었을까요? 11 사도와 모친 마리아와 주님의 형제들 대여섯 명(누이들 포함할 경우)과 수 명의 여자들 등 20여 명 전후가 아니었을까 추정됩니다. 이들이 모인 장소가 ‘다락’이므로 20여 명을 훨씬 상회하는 많은 인원이 모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들이 다락방에 모여 한 일은 기도입니다(14절).  

● 여기서 “다락”으로 번역된 (헬)휘페로이온(huperoion)은 ‘윗층, 다락방’(a higher part of the house)으로서 수십 명 이상을 수용하기는 어려운 공간일 것입니다.

● 행1:15-26절입니다. 이곳에서 갑자기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너무나 유명한 ‘120문도’입니다! 그렇다면 120문도는 누구입니까? 일단 13-14절에 언급된 약 20여 명이 포함될 것입니다. 이외에 갈릴리와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 등 여러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추가되었을 것입니다!

●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아주 조심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2-14절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의 수와 15-26절의 120명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12-14절과 15-26절은 시간적으로 분리된 별도의 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가의 다락방(크게 봐서 집)은 결코 120여 명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마가의 집이 아무리 크다 해도 10여 일 간 120명을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 또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 맛디아를 선출하는데 있어서, 베드로가 즉흥적으로 제안 및 시행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다락방에 모였던 소수의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미리 인도받은 바에 따라 베드로가 대표하여 진행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 나아가 신국제역(NIV)을 참조할 때, 개역성경 15절은 잘못 번역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NIV는 이렇습니다. “In those days Peter stood up among the believers (a group numbering about a hundred and twenty).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한다면, ‘이즈음에 베드로가 믿는 자들 가운데서 일어서서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모인 숫자는 120여 명 정도였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 무슨 의미냐 하면, 개역성경은 15절이 14절에 연결되는 사건으로 해석될 소지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아주 애매한 번역입니다. 그에 비해 NIV는 훨씬 명쾌합니다. In those days라는 단어만 가지고도 이는 14절에 연결된 사건이 아닌, 이후 며칠간의 시차를 두고 발생되는 사건임을 충분히 감지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간 관계상 헬라어는 검토하지 않겠습니다).  

● 결국, 1장의 일련의 사건들을 인원수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①40일 동안의 사건 총괄(1:1-5)=인원수 미상, ②승천광경(1:6-11)=목격자 약 20여 명, ③다락방에서의 기도(1:12-14)=인원수 약 20여 명, ④맛디아 사도 선출(1:15-26)=인원수 120명】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진행된 총 기간은 주님 승천 이후 약 10일 정도였을 것입니다.


● 이제 심각한 2장으로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120명 해석에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일단 1-4절은 성령세례 사건을 기술하면서 특히 방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4절). 방언이란 (헬) 글로싸(glossa), (영) tongues(or languages)로서, ‘혀 또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4절의 방언(글로싸)을 천상언어가 아닌 인간언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참고로, 방언필수론자들의 목소리가 하도 크기에, ‘방언’을 의미하는 원어로는 명백히 ‘천상언어’를 의미하는지 확인해 봤습니다.

검색 프로그램을 이용한 결과, 구약 30회 및 신약 38회 등 총 68회가 검색되었습니다.

구약의 방언은 히브리어 라숀(lashon)으로서 “혀, 언어”를 의미하고 간혹 “방언, 불꽃” 등의 의미가 추가되기도 합니다. 창세기 등 12권에서 비교적 골고루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의 방언은, 마가복음과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와 요한계시록 등 4권에만 나타나고 있으며, 4가지의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 단어는 글로싸(glossa)로서 마가복음 등에서 30회 사용되었으며, “혀, 언어”를 의미합니다.

다음으로는 디알렉토스dialektos)라는 단어가 사도행전에서만 6회 사용되었으며, “언어, 방언, 지방사투리, 이야기, 담화” 등의 의미입니다.

특이하게 단 한번만 사용된 단어(신학용어로 hapax legomena라고 합니다)도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행14:11절의 루가오니스티(Lukaonisti)로서 “루가오니아 지방의 방언”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고전14:21절의 헤테로글로쏘스(heteroglossos)로서 “외국어를 말하는,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의 뜻입니다.

짧은 히브리어 헬라어 실력으로 어렵게 살펴본 이유는, 정말 원어로도 방언이 ‘천상의 언어임을 강력히 증거하는가?’하는 점을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직 문자적인 의미만 고집할 경우, 방언은 ‘천상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인간언어’를 표시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듯싶습니다. 구약 및 신약에 사용된 단어의 대부분은 지상의 인간언어를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다만, ‘천상언어’로 받기 위해서는, 고전14:2절 등을 확대해석해야만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문자적 해석에 덧붙여 일종의 영해(靈解) 작업까지 거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볼 때, 방언필수론자들의 주장(이해)이 오히려 취약점을 지닐 가능성이 높음을 제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성령체험(즉 방언체험)에 동참한 인원수입니다. 1-4절에는 “저희”라는 인칭대명사가 2회 나옵니다(they와 them은 총 6회 나옵니다). 복수는 분명한데, 이 복수의 구성원 해석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 “저희”라는 복수를 ①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약 20여 명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②유명한 120문도로 볼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둘 다 가능성이 있으나 장담하기는 힘듭니다. 아무튼 2장을 기록된 내용 순서대로 살피겠습니다.

● 맨 먼저, 1-4절은 몇 명인가의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방언을 말하는 사건이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몇 명인지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

● 이어 5-13절은, 오순절 기간에 바대를 비롯한 적어도 15개국으로부터 모여든 경건한 유대인들이 방언을 듣고 놀라는데, 그들이 들은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11절)입니다(어떤 분은 큰 일이 ‘구원’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반응은 두 가지로서, 긍정적 반응을 보인 무리(궁금해 함)와 부정적 반응을 보인 무리(새 술에 취했다며 조롱함)로 나뉩니다.

● 자, 이 문단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단어 하나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7절의 “다 갈릴리 사람”입니다. 왜 주목할 필요가 있는지, 6-8절을 상세히 뜯어보겠습니다.

● 6절에서 “이 소리”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아직 ‘방언’을 의미하지 않고, 2절의 “바람 같은 소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일단 어떤 청각적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하고 모여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방언”을 듣습니다(6절b=4절의 방언 의미). 그런데 그 방언은 “각각 자기의 방언”입니다. 생판 모르는 외국어도 아니요 괴상망측한(혀가 꼬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 천상언어도 아닙니다! 자기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자국어였습니다. 이들이 들었던 방언은 곧 자국어입니다!  

● 7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하는 사람”에서 ‘이 말’이 무엇일까요? ‘방언’으로 받아야 합니다. 즉 ‘이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 갈릴리 사람”이라는 단어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부(다=all these men) 갈릴리 사람들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재확인하면 7절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유대 전 지역에서 모인 120명 모두가 아니라 갈릴리에서 온 일부】라는 해석을 가능케 하는 부분입니다!

● 8절은 6절과 같이 자국어인 방언을 들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 아직까지, 몇 명의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아무튼 복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잘 알아듣는 자국어인 방언으로 구원(하나님의 큰 일=11절)을 선포했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은 정리되었습니다.

● 이어서 14-36절에서 보듯, 베드로가 일어나 일장 연설을 합니다. 주제와 관련해서 14-15절만 살피겠습니다.

● 14절에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큰 흐름으로 다시 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2:1-4절은 집안에서 일어난 현상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5-13절은 집밖에서의 일입니다. 그리고 14절 이후도 역시 집밖에서의 일입니다.

● 집안에는 과연 몇 명이 있었을까요? 앞서 살핀 대로, 약 20명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1:15절의 120명으로 봐야 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며칠이 더 지났으므로 한 200명으로 봐야 할까요? 아무튼 20여 명이든 120명이든 또는 200명이든, 이 사람들은 겁먹고 방에 남은 상태로 사도들만 집밖으로 나왔을까요? 아니면 사도들과 함께 모두 밖으로 나왔을까요?

● 2:2절에는 “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헬)오이코스(oikos)는 ‘집, 가정, 권속, 가족, 나라, 재단, 성전’ 등의 의미로서, 때로는 대형건물에도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황상 개인소유의 비교적 소형건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이 경우, 앞의 ‘다락’처럼 120여 명의 대규모 인원 수용여부가 불투명하다 할 것입니다.

● 아무튼 만약 집안의 인원이 사도들 외에 더 있었고 그들도 사도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고 가정한다면, 14절의 표현은 무척 애매합니다. 즉, ‘나머지 성도들은 앉고 사도들만 섰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고 여러 사람이었다면 굳이 “열한 사도”를 적시하여 기술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앞서 흔하게 표현했듯이 그냥 ‘저희와 같이 서서’ 정도로 기술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 아주 치밀한 누가(사도행전의 기록자)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열한 사도”를 적시한 데는 나름대로의 뜻이 있다고 보면 안 될까요? 즉, 집안에는 오직 사도들만 있었고(최대 20여 명), 또 그들만 성령체험과 방언체험을 했고, 당연히 그들만 밖으로 나왔다고 보면 안 될까요?

● 15절에 다시 “이 사람들”이라는 인칭대명사가 나옵니다. 이 대명사 역시 누구를 지칭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위에서 살핀 대로, 120명인지 아니면 열한 사도(발언자인 베드로 자신은 빼고)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 2:37절 이후는 베드로의 설교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삼천 명의 회심 사건과,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과 확장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천 명 회심’은 성령강림과 회심 사건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주제와 멀기에 생략하겠습니다.


●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체험(방언체험)을 한 성도의 수가, 전통적인 해석처럼 120명인지, 아니면 오늘 제기된 것처럼 소수(아마도 열두 사도를 포함한 약 20여 명)의 사람들인지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결론짓기 힘들어 보입니다(물론 이후로도 성령세례와 동시에 방언은사를 받는 사례가 여러번 기록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성령세례=방언체험」의 등식이 항상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본문에 기록된 “갈릴리 사람들(1:11), 제자들(1:12), 120명(1:15), 저희(2:1), 이 말하는 사람(2:7), 갈릴리 사람(2:7), 열한 사도(2:14), 이 사람들(2:15)” 등의 단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도, 지금까지 설명드린 것처럼, 모호성을 불식시키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전통적 해석을 틀렸다거나 반대하지는 않습니다만, 새로운 견해도 진지하게 다루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입니다.

● 1:11절의 “갈릴리 사람들”과 2:7절의 “갈릴리 사람”을 문제해결의 핵심단어(key word)로 삼아보자는 것입니다.

● 1:11절에서는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의 수를 의미하는데, 많은 수가 아니라, ‘갈릴리에서 온 소수 즉, 제자들’로 한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 2:7절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수를 의미하는데, 역시 많은 수가 아니라, ‘갈릴리에서 온 소수 즉, 제자들’로 한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 앞에서, 1장의 일련의 사건들을 인원수 중심으로 【①40일 동안의 사건 총괄(1:1-5)=인원수 미상, ②승천광경(1:6-11)=목격자 약 20여 명, ③다락방에서의 기도(1:12-14)=인원수 약 20여 명, ④맛디아 사도 선출(1:15-26)=인원수 120명】으로 정리했었습니다.

● 이제 여기에다 2장(1-13절)의 인원수 중심의 결론 【⑤오순절 성령체험 및 방언발언 인원은 약 20여 명】을 덧붙인다면 전혀 새로운(과히 천지개벽적인) 견해가 될 것입니다.

● 어찌 보면 매우 생뚱맞은 견해이겠습니다만, 사실 이런 주제는 성경연구에 상당한 제약을 안고 있는 평신도들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신학자/목회자들의 보다 깊이 있는 견해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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