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3:7-13) 제사장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성경 바로 알기 시리즈 (8) / 여리고성 함락에 숨겨진 비밀 (5)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수3:7-13)
큰 개울(?) 같은 요단강
기생 라합의 목숨을 건 기지와 도움으로 안전하게 귀환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여호수아에게 보고했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이 도리어 메뚜기 신드롬에 걸려 잔뜩 겁을 먹고 있다는 그녀의 결정적인 정보에 따라 이제 이스라엘은 담대하게 가나안으로 진군만 하면 됩니다.
본문은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걸음을 떼는 장면입니다. 요단강의 범람이 그들을 가로 막는 첫 번째 장애물이었는데 하나님이 홍해처럼 강물을 물러가게 해서 맨땅을 건너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자세히 살피면 홍해 때와 몇 가지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다르게 역사하신 뜻이 무엇인지, 특별히 여리고 전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성지 순례를 간 사람들은 요단강을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강폭도 아주 좁고 수심도 얕아서 그냥 걸어서 건너가도 될 것 같아서 본문에 기록된 기적을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홍수조절과 농업용수 개발을 위해 상류의 갈릴리 호수에 수문을 설치해서 흐르는 물의 양을 대폭 줄였기 때문인데 여호수아 때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 북쪽의 시리아에 있는 헬몬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해서 갈릴리 호수를 거쳐 사해 바다로 흐르는데 총 길이가 약 500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최상류의 강바닥이 해발 900미터이고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사해는 해저 400미터이니까 그 편차가 무려 1300미터나 될 정도로 가파른 땅을 흐릅니다. 지금보다 훨씬 강폭이 넓고 그 별칭이 “빨리 흘러내리는 물”이듯이 유속도 아주 빨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장소는 여리고 동편 길갈이고 시기는 정월 십일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수4:19) 길갈은 갈릴리 바다와 사해 사이의 하부 요단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사가 급하니까 당연히 하류로 내려갈수록 물살은 더 급하고 강해지며 수심도 깊어집니다. 유대력 정월 십일은 양력으로 삼사월 경으로 보리를 수확하는 계절입니다. 날씨가 따뜻해짐으로써 해발 2814미터인 헬몬에 쌓인 눈이 녹아내려서 수량이 더욱 급격히 늘어날 때입니다. 그래서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15절a)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요단의 기적이 홍해와 크게 달랐던 점은 추격하는 군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는 뒤에는 애굽의 최정예 전차군단이 맹렬히 추격해오고 앞은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의 늪에 빠졌습니다. 앞으로 나가나 뒤로 물러서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닷물을 갈라주었지만 여전히 양쪽으로 높은 벽을 쌓고 있어서 언제 다시 덮칠지 몰라 두려웠어도 다른 수가 없으니 이판사판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물이 먼 상류에 멈춰 섰고 백성들은 그냥 마른 땅의 계곡을 건너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무 방해가 없는데도...
전쟁은 지형지물을 이용하면 유리한데 강을 건너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고 행동에 제약을 받으니까 공격하기 아주 좋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여리고 군대는 미동도 않고 정탐꾼의 기미조차 없습니다. 마음 놓고 아무 때나 건너도 되었습니다. 도강하는데 아무 방해가 없다면 구태여 수량이 가장 많고 급하게 흐르는 시기에 건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꼭 그 시기에 건너라고 명했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이스라엘이 아무 의심 없이 주변 환경에 좌우되지 않으며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는지 시험해보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당신의 큰 능력을 과시하려는 뜻은 더더욱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것과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납니다. 물질계 안에 갇혀 사는 인간의 지혜는 항상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그 판단의 범위가 고착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떤 사안이라도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하면서 장기적으로 종합적으로 판단하십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당신만의 전략을 갖고 백성들을 이끄시는 반면에 인간은 부분적 일시적 제한적 전술에만 집중합니다. 그나마 하나님더러 당장 해결해 내라고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뾰족한 전술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거뜬하게 건넌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수5:1)
수량이 많고 유속도 빠르고 자칫 홍수로 범람하는 시기에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이 감히 요단을 건너리라고는 여리고를 비롯한 온 가나안이 예상은커녕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요단 서쪽이 아니라 그 서쪽의 끝인 해변의 왕들까지 정신을 잃었더라고 말했겠습니까? 요단을 건너기 전에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여리고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다고 실토했는데 이젠 죄송하지만 바지에 오줌을 쌀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강을 건너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강을 건널 때에 기습할 계획은 전혀 생각도 못했고 대신에 성안에서 양식과 물을 저장하고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은 견고한 성벽만 믿고 장기전으로 버티려는 너무나 초보적인 전술만 세운 것입니다.
한국전쟁 때에도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 쪽으로 연합군이 상륙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북한군은 방어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 틈새를 타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확보해 결정적 승기를 잡았습니다. 이처럼 허를 찌르는 기습이 누구나 아는 전쟁의 기본적인 전략이라고 해서 본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가 크게 띄어난 것이 아니라고 여겨선 안 됩니다.
우선 맥아더는 물이 들어와 수심이 깊어지는 시점을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한계 내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는 당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와 법칙마저 스스로 어기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사이의 간극을 매울 수 있는 존재나 힘은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의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인간을 향한 긍휼 말고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기적이란 하나님의 인간의 급박한 사정을 봐주어서 대폭 양보한 비상조친 셈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인간의 왜소함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은 당연히 깨달아야 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그분의 위대함에 비추어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도 온전히 인식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아주 일상적인 방식으로도 기적을 일으키시는데도 어리석은 신자들이 전혀 눈치도 못 채고 넘어갈 때가 대부분입니다.
당시로는 여리고에서 최고로 똑똑한 사람이 성안에서 오래 버티자는 의견을 내었고 모두가 수긍했습니다. 최선의 방안인지라 단 한 명도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그 시기에 침공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최고의 방안이 제대로 작동도 못해보고 일순간에 철저히 망가져버렸습니다. 사람들 생각에 아무리 합리적이고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아도 하나님을 거역한 상황에선 공중에 흩날려 사라질 한줌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그에 비해 성중에 유일하게 여호와가 하늘과 땅 둘 다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목숨까지 건 라합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리고의 성주, 신하들, 제사장, 선지자 모두 다 합쳐도 성령이 간섭한 비천한 기생이자 창녀의 영적인 분별력의 발등상에도 못 미쳤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믿음의 견고성을 알아보려는 단순한 목적으로 어려운 고난 시험 연단에 밀어 넣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을 오직 두 가지 목적에 따라 다스립니다. 첫째 당신의 백성의 현실적 풍요가 아니라 오직 영적 유익이 증진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공동체에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뜻 외에는 없습니다. 그분은 사탄처럼 신자를 자기 기분에 따라 독선적으로 미혹 조종 농간하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가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고 완전히 불가능하고 엄청난 불행 고난이 따를 것이 빤히 보이고 심지어 자신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도 있는 일을 강권적으로 맡기기도 합니다. 종합적 장기적으로 반드시 선으로 바꿀 종착지가 예비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방안이 당시의 여건에서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때의 홍해나 지금 요단강의 도하는 상식과 이성으로 볼 때에 말이 안 되는 명령이었으나 그보다 더 좋은 방안은 없었습니다.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방안은 아닙니다.
신자는 그래서 하나님이 분명히 당신만의 계획을 갖고 내 인생을 이끌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당장은 의심과 원망으로 곤혹스럽더라도 일단은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해야 합니다. 내 몸과 영혼을 온전히 내어드리오니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고백을 언제 어디서 어떤 처지에서도 담대하고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실력이 믿음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종합적 장기적으로 보시는 그분의 생각이 내 계획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좋다는 너무나 자명한 한 가지 진리만이라도 온전히 붙들 수 있다면 아주 좋은 믿음입니다.
제사장이 선봉을 섰다.
홍해 때는 모세가 언덕에 서서 지팡이를 바다를 향해 내뻗자 갈라졌습니다. 이번에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강물에 한 발자국을 들여 놓으니 물이 멈춘 것도 달랐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언약궤는 반드시 제사장들의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다윗이 궤를 옮기려다 잘못 취급하여서 하나님의 큰 벌을 받았지 않습니까?
지금 자기들이 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언약궤가 떠내려가면 더 큰일입니다. 본문도 여호와가 앞장섰고 그분이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을 보리라고 선언했습니다.(10,11절) 광야 방황 중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겨우 성소의 향로 불인데도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붙였습니다. 그러자 지성소로부터 하나님의 불이 나와서 즉사하는 심판을 받는 모습을 어려서 목격했을 수 있고 최소한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레10장)
크게 넘실대는 요단의 급류에 제사장들이 언약궤까지 매고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상징적이긴 하지만 여호와가 함께 떠내려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궤를 멘 제사장들이 발을 물에 담그자마자 몸이 흔들리지 않게 물이 곧바로 줄어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17절a)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한걸음이라도 물에 발을 담그는 행동으로 순종해주길 원하시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차후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리고성의 행진도 목숨을 거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는데 제사장더러 맨 앞장을 서라고 명령했습니다. 지금 미리 그 예행연습을 시킨 셈입니다.
죽음에서 목숨을 건짐 받는 하나님의 권능을 한 번이라도 온전히 체험하면 그 믿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신자는 힘들 때마다 지금껏 하나님이 어떻게 기도에 응답해주셨으며, 고난에서 어떻게 구원해주셨는지 회상해봐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생각과 길과는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인도하셨음에도 훨씬 더 선하고 완벽했다는 점을 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으로선 가나안 땅에 앞으로 세워질 당신의 나라는 제사장을 통해서 다스릴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종교적인 왕국을 세운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고 그 땅의 소출을 먹게 되었습니다(수5:12) 그 전까지는 일용할 양식도 내지 못하는 황량한 광야만 방황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오자 그런 비상한 상황이 일상적인 여건으로 바뀐 것입니다.
정상으로 들어서는 출입문
요단강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진영과 여리고성을 나뉘는 전술적 경계선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를 나누는,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의 빛이 넘치고 사탄의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지역으로 나누는 경계선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세상에 단 한 평도 없습니다. 가나안도 일시적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 놓였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허락 하에 그랬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완악한 가나안 족속들에게조차 여러 경로를 통해 당신을 알 수 있도록 충분히 계시해 주었습니다. 우선 죄악이 관영했음에도 안락하게 지내도록 사백 년이나 인내해주었습니다. 대신에 당신의 백성을 그 기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을 시켰다가 때가 차매 한 명도 죽지 않고 오히려 애굽의 금은보화를 다 취득하여 탈출하도록 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홍해 바다를 갈라서 맨 땅을 건널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들리게 해서 그들의 간담을 녹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라합처럼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에게 항복까지는 안 해도 최소한 여호와가 최강의 신임을 인정하고 화친이라도 청했어야 합니다.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때늦은 감이 있고 그마저 그들에겐 큰 은혜일 따름입니다.
가나안 땅은 현실적으로만 이스라엘의 소유가 아직 안 되었을 뿐 누차 강조한 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신의 백성의 거주지로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요단강 물에 한 발자국만 담그면 온전히 그들의 소유로 확정됩니다. 이스라엘 앞에 큰 위기로 다가온 요단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반드시 넘어서서 믿음으로 도약할 수 있는 디딤돌로 바꾸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세대에 부어주려고 마련해 놓은 축복의 첫 열매였습니다.
요단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일상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었습니다. 광야 같은 비정상적 위기상황에선 하나님으로서도,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다른 방안은 없이 비정상적인 기적으로 보호 인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적이란 하나님이 직접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하므로 그것을 선포하고 수행할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한두 명의 믿음의 영웅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반면에 정상적인 상황에선 그런 기적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단을 건너가서 거할 땅에서 지켜야 할 율법을 다 주셨습니다. 천부장 백부장도 세웠고 제사장 제도도 확립했고 무엇보다 성막과 언약궤도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제 제사장들이 율법을 잘 깨달아서 백성에게 가르쳐 지키도록 하고 성전에서 제사를 온전히 드리면 됩니다. 온전하지 못한 제사로 아론의 두 아들들이 즉사하는 벌을 주심으로 제사장들에 대한 교육까지 마쳤습니다.
요단 이전까지 광야는 목숨을 위협할만한 위험이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곳입니다. 이제 약속의 땅은 율법만 지키면 하나님이 지켜 보호해주십니다. 여리고 전투는 가나안에 평화의 시대를 열어주는 시작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평화 시대로 넘어가는 다른 말로 전쟁을 마치기 위한 이스라엘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이었습니다.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후로는 제사장들이 솔선수범하여 목숨을 걸고 순종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전쟁이 없도록 다른 민족들의 침공을 다 막아주실 것입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땅에 당신의 영광을 영원토록 견고하고도 거룩하게 드러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열심
본문에서 정작 주목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이스라엘 구세대들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에서 훈련시킨 것과 동일한 과정을 신세대들에게도 밟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모세가 죽기 전에 율법에 대해 신세대들에게 자세히 다시 강론하며 가르쳤습니다. 여호수아를 선봉으로 아말렉과 전투 했듯이 신세대들도 아모리 두 왕과 상대로 전투 훈련을 시켰습니다.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을 때와 가데스 바네야에서 거역했을 때에 그 주모자들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심판했듯이, 이방주술사 발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모압 여자와 행음한 자들을 엄격히 심판했습니다.
지금 요단에서 홍해와 같은 기적도 맛보게 합니다. 구세대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 받았을 때에 피의 서약식을 거행했듯이 요단을 건넌 후에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마찬가지로 할례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서원하게 합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신세대들은 자기들 부모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징벌로 너무나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기가 막상 겪지 않고는 하나님의 권능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세대와 같이 몸으로 체험하는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원죄 하에 태어나는 인간의 성정은 똑같고 그 인간사회가 만들어내는 인생사도 똑같습니다. 거기다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그것도 실제 체험으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성숙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요단강 도하는 신세대에겐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만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매일의 일상이 되어있었기에 기적은커녕 하나님의 역사라고 여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술사 발람의 저주를 막아준 것도 하나님 혼자서 백성들이 모르는 사이에 일으켰고 다 끝난 후에야 알게 된 것이라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요단강은 눈앞에서 그 엄청난 양의 급류가 일순간에 멈추고 물러가 마른 땅이 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많은 백성들이 마른 땅을 쉽게 건넜고 다 건널 동안에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음을 체험했습니다.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17절b) 아무리 엄청난 위력을 지닌 자연 재앙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보호하는데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거기다 자기들을 대적할 여리고 군대라곤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구세대와 똑같은 과정으로 신세대를 훈련시키면서도 전혀 지치지도 않고 귀찮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의 구세대들이 당신께 행한 것에 비하면 하나님의 이런 열심과 끈기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구세대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쳤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를 방황하다가 다 죽게 하더라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사탄의 노예가 되어 죽음으로 끌려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심판으로 끝이 날지라도 또 다시 더럽고 추악한 죄악에 빠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완악했던 구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어도 신세대들을 기어이 요단 앞에까지 이끌고 왔습니다. 당신으로선 얼마나 번거롭고 지겨운 일이었겠습니까?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밖에 없습니다. 당신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려는 것입니다. 당신과 가장 친밀하게 교제했던 모세를 광야 바위산 어딘가에 죽게 내버려두고서라도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모세는 평생토록 자기 개인을 위한 삶은 없었고 오직 이스라엘의 종으로 헌신했습니다. 신세대들로 그 위대했던 하나님의 종의 무덤을 밟고라도 가나안에 들어가 당신의 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여호수아를 백성들 앞에 모세 같은 지도자로 세우려고 요단강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7절) 여호수아가 그분의 영광스런 일에 쓰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될 평화의 시대
하나님은 가나안에 새로 시작될 평화의 시대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된 제사장들로 이끌어 가게 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나 여호수아처럼 홀로 앞장서는 영웅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근본 자세는 지녀야 합니다. 오직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들 인생을 바쳐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이끄는 시대라는 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을 당신의 말씀으로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이 크게 역사하는 기적의 시대가 아닙니다. 제사장들의 살고 죽음이 말씀을 가르치고 솔선수범하는 것에 달렸고, 백성들의 살고 죽음은 전해 받은 말씀에 순종함에 달리는 시대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살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죽음일 뿐입니다. 제사장이나 백성이나 어떤 주저함과 미심쩍음과 원망함 하나 없이 감사와 찬양으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만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법이라는 것 자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속죄이므로 제사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용서 회복 받는 절차이므로 더더욱 말씀의 순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기적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기적 자체를 일으키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었다면 전부 다 기록해야 합니다. 선별해서 기록했다는 것은 기적 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지 못하는 후대의 독자들로 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고 또 믿은 자들은 그분의 이름에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단에서 제사장들이 말씀대로 순종하자 기적이 일어난 것도 율법대로 살면 생명이 살아남을 생생하게 보이고 체험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 기적을 직접 목격한 신세대도 여호와가 하늘과 땅 둘 다를 주관하는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었고 그 후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홍해나 요단강의 마른 땅을 건너는 기적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들부터 그리스도를 인격적 체험적으로 먼저 만나야 하고 그 후로 목숨을 걸고 십자가 복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날로 타락해가는 세상의 영적 흐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히 분별하여서 모든 성도들에게 정확히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자신의 형통과 안락은 뒷전이었고 평생을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냈습니다. 목사들도 성도들 앞에 죄악과 사탄과 죽음의 세력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워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목사는 반드시 평생토록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설교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목사가 삶에서 맺은 복음의 거룩한 열매들을 보고 너무나 좋고 아름다워서 과감히 기꺼이 열정적으로 그 길을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당당하게 나를 본받으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세대들은 요단강의 넘실대는 급류에 언약궤까지 메고서 목숨을 걸고 한발을 딛자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리고에서도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목숨을 걸고 앞섰기에 안심하고 뒤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리고 군대는 이스라엘이 봄철 추수기에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려 옴짝달싹 못했습니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이 이미 다 무너뜨려 놓은 것을 제사장들이 그냥 앞장서서 발로 밟은 것뿐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가 한마디로 무슨 뜻입니까? 목사가 복음만 제대로 가르치고 솔선수범하면 성도들의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복을 받는 일이 얼마나 간단하고 쉽습니까? 목사 한 명이 말씀 앞에 온전히 헌신하면 온 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근래 강단에 말씀이 넘치는데도 왜 그렇게 안 되고 도리어 개독교라는 비난만 받고 있습니까? 한 가지 이유뿐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이 원색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설령 순전하게 전했어도 목사들이 설교한 대로 원색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 본인은 지키지 않으면서 신자들에게만 이렇게 저렇게 행하라는 설교를 하는데 신자들이 그대로 따를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여리고성을 제사장들이 요즘으로 치면 목사들이 앞장서서 무너뜨렸다면, 오늘날에는 저도 목사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죄송하지만 목사들 때문에 세상의 여리고성들이 더 튼튼해지고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뜨거운 기도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죽는 목사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거룩한 생명으로 살려서 당신의 영광까지 볼 수 있게 해주신다는 역사상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3/8/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