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22-24)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할 세 가지 축복
돌아온 탕자 시리즈 (7)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자기 몫으로 미리 챙긴 유산으로 타국에서 스스로 출세 형통하려던 둘째 아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큰 흉년까지 닥쳐서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굶어 죽을 처지가 되자 어쩔 수 없이 양식이 풍부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아들 취급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품 군의 하나가 되어서 목숨이라도 연명할 작정이었습니다. 탕자는 돈을 주인으로 삼고 돈에 지배 받는 인생을 살았기에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도 경제적 여건에 따라서 변경 취소될 수 있다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아들의 모든 사정을 벌써 짐작하고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거리가 먼데도 먼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의 지난 잘못을 전혀 묻지 않고 기꺼이 사랑하는 아들로서 다시 받아들인다는 표식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참 사랑을 확인하자 비로소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다고 진정한 회개를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회개를 먼저 해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만은 하나님이 사랑을 먼저 베풀어주시고 그 사랑을 체험해야만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한지 보여주시고 또 직접 부어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본문은 그렇게 진정으로 뉘우친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가 최고로 성대한 잔치를 벌려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우선 살진 송아지를 잡았는데 요즘으로 치면 필레 미뇽이라고 불리는 가장 연한 고기로 바비큐 파티를 열어준 것입니다. 원어에는 그 송아지라고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의미의 흐름을 감안하면 둘째 아들이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 놓은 그 송아지를 갖고 오라는 뜻입니다. 최고로 비천한 돼지가 먹는 열매조차 얻어먹지 못했던 아들이 최고급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옷과 가락지와 신발 세 가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에게 이 세 선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신자라면 이 세 선물이 상징하는 의미가 자신의 삶과 인생에 실제로 반영되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일 좋은 옷
옷은 정치적 지위, 사회적 신분, 경제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아들은 완전히 거지 중의 상거지 행세였을 테니 품 군들보다도 더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가장 좋은 옷을 입음으로써 그 집안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좋은 옷은 결혼식이나 왕을 알현할 때 같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날에 입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되살아 온 것과 같으므로(24절) 아버지 생애에서 최고로 기쁜 날입니다. 최고 좋은 음식과 의복이라고 해서 아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선 언제든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을 때도 허락해준 것입니다.
최고 좋은 옷을 입었다고 해서 큰 아들보다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큰 아들이 더 높다는 뜻도 아닙니다. 둘 다 똑 같은 재질과 모양과 솜씨로 만들은 동일한 옷을 입되 장남과 차남의 표시만 다를 것입니다. 어쨌든 그 아버지의 아들이어야만 입을 수 입는 옷입니다. 다른 사람이 입어볼 수 있기는커녕 아예 보여주지도 않는 옷입니다. 지금 아무리 허물이 많았고 허랑방탕하게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도 아버지로선 당당하게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자랑하겠다는 뜻입니다.
아들도 이전의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그 새 옷을 입는 순간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최고로 낮은 자리에서 완전히 절망에 빠져서 죽음만 앞두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자마자 최고로 높은 자리로 세워졌기에 충만한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저 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낼 궁리만 했던 망나니 아들이었다가 이제는 아버지에게 열심히 효도하며 시키는 대로 성실히 순종할 것입니다. 아들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전에는 호적에 올린 법적 관계에서 몸뚱이만 아들이었으나 이제는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정신과 영혼까지 포함한 전인격체로서 아들이 된 것입니다.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는 세상 어느 누구도, 형이라도 간섭 개입 훼방하지 못할 일대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음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형은 형대로 따로 그렇게 하겠지만 마치 아들이 한 명만 있는 것처럼 당신의 모든 선한 것을 자기를 위해 다 주시는 분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합니다. 정말로 우리는 세상의 타락한 흐름을 열심히 쫓아가며 추하게 살았던 흔적과 온갖 죄악으로 누더기가 된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주인으로 모셨던 돈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을 교만하고 완악하게 거역 대적했습니다. 그분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사망의 악취가 온몸에 진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형편이 어떻게 되었던 스스로 인식했던 못했던 영적으로는 갈급하고 허망함의 절정에 이르러 완전히 파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은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알게 모르게 당신만의 은혜의 손길을 계속 베풀어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심령의 문을 계속 두드리시다 결국은 우리 속의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이끌고 오셔서 완전히 무릎 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지금껏 남들 앞에 한껏 자랑하던 자신의 의가 부끄럽기 짝이 없고 썩어 없어질 한갓 쓰레기에 불과했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절감시켜 주십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서 속속들이 알고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을 통해 절감하게 해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서해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기에 영원한 심판을 받을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기질 성격 습관 등이 크게 거룩해진 것은 아니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동안의 주인이었던 돈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았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그 동안 세상에서 형통 출세하려 스스로 모든 노력을 경주했던 삶이 아무 의미 없이 헛된 낭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앞으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인생의 목표로 정하며 실행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의 이 약속이 진심으로 회심하는 죄인에게 실현됩니다. 골고다 십자가 앞에 겸허히 엎드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에겐 예수님의 의의 옷이 덧입혀집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있는 그대로 보시지 않고 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먼저 보십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신자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처지에 있던 당신의 아들로 바라봐 주십니다. 아들은 설령 잘못을 해도 아버지에겐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자식이 먼저 절연하지 않는 한 부자관계는 지속되며 심지어 그렇게 해도 아버지의 마음에는 그 아들이 아픈 멍에로 끝까지 남아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우리를 아들이 아니라 단순히 한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모든 세대에서 영원토록 단 한 명도 그분의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씻겨서 언제든 하나님의 성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담력을 얻는 것뿐입니다.
가락지를 손에 끼워주는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힌 후에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고대의 반지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서 요즘으로 치면 인감도장 대신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반지를 끼고 있으면 가문의 자식이라는 표식일 뿐 아니라 가문의 모든 권세도 언제든 행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옷과 마찬가지로 아들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반지입니다. 아버지의 가락지는 아버지가 당신의 모든 것을 갖고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고 계신다는 증표입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보호 인도하고 있으므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경고도 됩니다.
둘째 아들은 돈이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줄 것이라고 믿었기에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서 아버지의 간섭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외국으로 이민 갔습니다. 돈 외에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더 많고 더 좋은지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그 사회에 끼치는 권세는 물론 가문대대로 쌓은 신용, 가풍, 명예, 규범 등이 갖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은 대단합니다.
돈이란 있다가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지만 이 무형의 재산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발휘하는 힘은 오히려 돈보다 더 큽니다. 사람들은 돈만 많은 부자에겐 돈이 갖는 효용성 때문에 겉으로만 굽실거리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 가문의 반지 앞에는 진심으로 존경하며 순복합니다.
둘째 아들은 타국에서 돈이 다 떨어지고 흉년까지 겹치자 돼지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몫의 재산이 하나 없어도 아버지 집에 남아있었다면 어떤 흉년이 닥쳐도 그런 취급을 전혀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절대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당신이 먼저 죽더라도 아들은 살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가문의 아들이라는 자존감은 털끝만큼도 훼손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신자도 하나님의 반지를 받아 끼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여서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는데 본인이 진정으로 회심하여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주님의 모든 권능도 함께 임재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한 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의 평생 동안 가는 곳마다 빠짐없이 동행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나 메시아로서 공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완전한 제물로 달려 죽기 위해서 당신을 인간 죄인의 모습으로까지 낮추신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했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3:17)라는 선포가 들렸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즉위식이었는데 성부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을 쳐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예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하나님이 하늘에서 당신께서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인을 쳐주십니다. 신자는 그래서 더 이상 세상 죄악은 물론 사탄의 노리개 감이 절대로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물리칠 대적인 죽음도 부활의 영광으로 이겨내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이마에는 이미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인이 쳐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세세토록 찬양할 십사만 사천 명 안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666의 표시가 없는 자를 핍박할 때에도 십자가 진리의 말씀으로 얼마든지 인내하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예수님이 불어넣어 주십니다.
최근에 코로나 사태로 종말이 다가온 것처럼 여겨지고 백신이 적그리스도의 음모라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도 신자는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신자와 함께 하는 복음의 권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됩니다. 당당하게 백신도 맞고 두려움에 떠는 세상 사람들을 도리어 위로하고 기도해주면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신발을 신은 아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굶어죽기 직전까지 이르렀기에 틀림없이 신발도 팔아버리고 맨발이었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신발이 귀해서 노예나 종들은 주로 맨발로 다녔습니다. 신을 신고 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유복할 뿐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신분을 대변했습니다.
이제 최고로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 셋을 다 갖춰 입음으로써 아들로서 구색에 하나도 빠지지 않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그를 받아들일 때부터 이미 아들의 신분을 회복된 것이므로 그런 것들을 입지 않아도 아들로 행세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조하는 바는 당신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최고의 신적 권능이 함께 하므로 언제 어디서나 평강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발을 신고서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으므로 흑암의 세력에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책감 자책감에 묶여 있던 과거를 훌훌 청산하여서 더 이상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가문의 아들답게 세상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 없이 당당하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이 미리 유산을 챙겨서 외국으로 이민 간데다 완전히 쫄딱 망했고 그래서 아버지는 매일 노심초사 먼 길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소문이 인근에 다 퍼져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피골이 상접한 상거지가 되어서 목숨만 겨우 부지하고 돌아왔기에 소문이 사실로 판명 났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무 말 않고 받아들이고 최고 좋은 옷과 반지와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아들보다 아버지가 더 모자란 사람이라고 뒤에서 숙덕거렸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당신께서 당하실 수모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아니 크게 기뻐하며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세리와 죄인과 식사 교제를 나누시는 예수님도 당신께 돌아올 모든 수모와 핍박을 전혀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사회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구원 밖에 있었던 자로 취급되었던 그들을 죽었던 아들이 살아온 것처럼 크게 기뻐하며 식사교제를 나눴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그런 교제와 본문의 상황을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3-5)
아들로서 자유롭게 행하라는 것은 영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소명을 실천하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까 신발을 벗으라고 명했습니다.(출3:5)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의 노예가 되어 있는 동족을 구원해 내라는 소명을 주고는 떠났습니다. 그 후에 모세는 다시 신발을 신고 하나님께 받은 소명의 실천을 위해 애굽으로 담대히 내려갔습니다.
맨발이었던 탕자가 신발을 신음으로써 아들로 회복되었기에 아버지를 위해 아들로서 행할 바를 다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모든 것을 베풀며 보호 인도해줄 울타리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못하도록 막을 제약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진리는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요 예수님 본인이 진리입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신자도 아버지 일을 행함에 게으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셋을 다 갖추고 있는가?
이제 우리에게 솔직히 물어볼 차례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받은 새 옷과 반지와 신발을 다 지니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라도 빠지면 아들로서의 신분 자격 권위 등에 하자가 생기므로 완전한 아들로 행세할 수 없습니다. 누가 봐도 전혀 어울리지 않고 그 모양새가 어색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가장 먼저 신자가 되었기에 예수님의 의로 덧입고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만 잠시 흰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나를 언제 어디서나 풀메이커업하고 하얀 웨딩드레스 입은 어여쁜 신부로 봐주시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간이 평생에 결혼식만큼 최고의 미남미녀가 되는 날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자꾸만 이전의 거지 때의 낡아빠진 옷을 잊지 못하거나 버리지 않는 신자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새 옷을 갈아입었다는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자기 옷을 스스로 빨아서 깨끗케 하려고 합니다. 또 뭔가 선한 일을 해야만 새 옷을 받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 반대로 조금만 잘못하면 나는 아무리 해도 이 더러운 옷을 벗어버릴 수 없다고 실망에 빠집니다.
저는 스스로 돈을 벌어서 유행에 앞선 최고 멋진 옷을 사 입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소위 예수쟁이들이 입고 있는 유행에 뒤처지고 검소한 천으로 만든 옷들이 너무 싫어서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로는 세상의 화려한 옷들이 오히려 너무 천해서 보기 싫어지고 주님께 새로 받은 옷이 남들이 뭐라고 하든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입혀주신 흰옷은 영원토록 죄로 더렵혀지지 않으므로 신자는 하나님에게 다시 새것을 받아서 갈아입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직접 입혀준 가죽옷처럼 인간의 힘으로 벗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옷으로 갈아입고 구원받았다는 믿음은 있으나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꽤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선포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조금만 잘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거나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지레 겁부터 먹습니다.
자식이 조금 잘못했다고 무조건 벌주는 부모라면 자식의 잘잘못을 떠나서 부모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혹시 자식이 그 일로 상처받고 좌절할까 더 격려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끝까지 자식의 편이 되어서 깨끗하게 뒷수습까지 해줍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로 그렇게 하신다고 바울도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리라고는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문제나 고난이 닥쳐도 또 사람들의 훼방 멸시가 심해도 나아가 사탄의 음흉한 시험과 유혹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 세상 모두가 나를 비방 대적해도 끝까지 내편이지 않습니까? 믿음이 가장 성숙된 증거는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해도 평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는”(마10:28)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옷으로 이미 갈아입었기에 그분의 권능이 항상 함께 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신발을 신고 마음껏 그분의 소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반지는 이미 신자의 손에 끼워져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 우리는 주님의 전권대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세상에 비춰내어야 하고 소금으로서 세상이 썩어가는 일을 막아서 깨끗하게 바꿔나가야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최소한 이전의 헛된 삶으로는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허랑방탕했던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야 합니다.
이 탕자가 아버지에게서 세 가지를 다 받은 후에 어떻게 살았을 것인가에 대해선 주님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난 세리장 삭개오의 기사가 바로 이 비유가 실현되는 모습을 실제로 모든 유대인들 앞에 보여주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멸시하고 배척했으나 주님을 만나 새 옷으로 갈아입자 만약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확약하면서 전 재산의 절반을 주님의 일에 내어놓았습니다.
지금 맨 앞에서 주님의 비유를 열심히 듣고 있는 세리와 죄인들의 그 후의 삶도 당연히 삭개오의 길을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아버지의 가장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이 바로 자기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늘에 예비해 놓으신 선물임을 모를 리 없습니다. 이런 권세 있는 가르침도 처음 받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성령이 그들의 심령에 역사하여서 여태껏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이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대면한 체험이 있는 자는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 본인은 자기가 이전과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전환되었고 삶을 꾸려가는 힘도 쉬지 말고 기도하여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도록 성령이 역사해줍니다. 이전의 삶이 너무 헛되었음을 절감하므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대신에 아직도 이전의 자기와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을 보면 저절로 너무 불쌍해져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라고 권하고 싶어집니다.
이 탕자는 자기에게 돼지사료도 나눠주지 않았던 자들을 비롯해, 돈이 많을 때는 그렇게 아부하며 따라다니던 그 나라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크게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참 사랑을 받은 후로는 그들도 나와 똑같이 돈만 주인으로 삼아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것이므로 조금씩 불쌍해졌을 것입니다.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이 탕자도 그 나라로 돌아가 선교사로 평생을 지냈을 것입니다.
신자더러 선교사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 탕자가 새 옷, 반지, 신발을 신었기에 그 집의 아들이라고 못 알아볼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신자가 구태여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경건을 행치 않아도 평소 사는 모습만 보고도 예수 믿는 자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이웃들 사이에 여러분의 현재 평판은 솔직히 어떠한지요?
(2/2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