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25-30) 최후의 도피성마저 무너뜨린 바리새인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8)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25-30)

 

전혀 예상치 못한 맏아들의 반응

 

어떤 이야기이든 결론은 주로 마지막에 나오는 법인데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둘째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측면에만 주목하나 오히려 본문에 드러난 장남의 태도와 그에 대한 아버지 말씀에 그 해석과 적용의 주안점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큰 아들이 둘째 아들에 비해 큰 잘못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동생이 저지른 짓을 보면 아버지가 야단을 치고 근신을 시켜도 부족할 텐데 큰 잔치부터 열어주니 화가 날만도 합니다. 우리가 그의 입장이었다 해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잘 살펴보면 그 잘못이 너무 큽니다. 인간의 영적인 실상을 이 큰 아들만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드러내는 성경의 기록도 드뭅니다.

 

가장 먼저 살펴볼 사항은 아버지가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기쁜 소식을 형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절대적인 진리를 정미하고 예리하게 계시하시는 예수님이 실수할 리는 만무합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히려 여러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본문은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그럼 평소처럼 밖에서 일하다가 식사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고 아버지로선 그 시간을 아니까 따로 연락할 필요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비유에서 강조하려는 주제와 맏아들의 반응으로 판단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형이 동생을 아주 싫어했기에 아버지로선 잔치를 벌인다고 미리 알리면 큰 난리가 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맏아들은 한 종을 불러서 왜 이리 집안이 소란한지 이유를 물어 봤습니다. 종은 이민 갔던 당신의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왔기에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여주려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함께 기뻐해야 할 형이 대뜸 화부터 냈습니다. 일상적인 형제 관계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모습입니다.

 

동생이 이민 간 나라에 큰 기근이 닥쳐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식을 형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생사를 몰라 애를 태우던 둘째 아들이 돌아왔으니 종들도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유일하게 맏아들만 화를 내고 집안으로도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아무리 평소에 싫어했고 화가 났어도 동생이 어떤 몰골로 돌아왔는지 확인도 할 겸 잠시 형식적인 인사는 나눠야 합니다. 성대한 잔치를 벌려준 것은 아버지이지 동생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유산을 미리 받아서 탕진했지만 어엿이 동생에게 돌아갈 몫이지 자기 몫을 빼앗은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밥은 먹어야 할 판인데 그조차 마다하니 평소에 동생과 거의 원수 사이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동생이 그런 형과 매일 부딪히는 것이 싫어서 유산을 미리 챙겨서 외국으로 이민 갔을 것이고 또 형제간의 그런 불화를 아니까 아버지도 허락해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하는 장남

 

큰아들이 일터에서 돌아오고도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오라고 권했습니다. 권했다는 동사 원어의 정확한 의미는 바로 곁에 와서 친절하게 여러 번 타일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집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대신에 자기는 여러 해 아버지께 순종했음에도 이보다 훨씬 못한 잔치도 열어주지 않았다고 불평합니다. 자기 말에 자기 생각이 담겨 있게 마련이니 그런 불만을 여러 해 동안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이 잔치 때문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동생에게 살진 송아지 잔치를 해주는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합니다. 동생이 외국에서 혼자 쓸쓸히 살다 보니까 창녀와 관계 맺는 등 분명히 윤리적 죄들도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던 재산을 오직 주색잡기에만 탕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돈이 떨어진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질 수 없었고 흉년이 왔을 때에 돼지치기 일자리도 못 얻었을 것입니다.

 

동생이 허랑방탕했다(13절)고 반성한 것도 추악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낭비했다는 뜻이었지 않습니까? 동생이 사업을 도모하다가 돈을 잃은 것이 훨씬 많을 텐데도 형은 자기가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윤리적 잘못이 덧보이는 창녀를 들먹인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려다 보면 작은 잘못을 키우거나 없는 일도 지어내는 것이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만에 하나 기생과 놀아나는데 돈을 다 탕진했다 쳐도 동생을 송아지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살진 송아지라도 한 마리 송아지일 뿐입니다. 죽었다 살아난 동생인데 형이라면 당연히 반기거나 최소한 안부는 살펴봐야 합니다. 집안의 많은 종들과 잔치에 초대된 이웃들이 이 형제들의 관계는 물론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서 뒤에서 숙덕거릴 것입니다.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까지 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아버지가 어떤 마음일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겐 둘째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기쁨이 너무 크기에 창녀와 놀아난 잘못은 아예 무시할 정도로 문제가 안 됩니다. 아니 창녀에게 아들까지 낳아서 다 함께 왔어도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삼았고 그녀가 혼외정사로 낳은 아이들까지 자식으로 받아들여서 사랑해주었습니다. 고멜과 그 자녀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호세아는 깨달았기에 그분의 선지자로서 기꺼이 그 사랑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이 잔치는 그동안 육신만 아들이었던 둘째 아들이 온전한 아들로 다시 태어났기에 평생 한 번 있을 잔치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장남이 결혼해서 자기 아들이 이 동생처럼 되었다면 똑같이 잔치를 열어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아버지가 되어야만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어리석고 완악합니다.

 

둘째 아들은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고 아버지에게 자기를 품 군의 하나로 삼아달라고 요청할 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끝까지 아들로 사랑하는 그 심정을 전혀 헤이라지 못했는데 큰 아들도 그 과정만 달랐지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만큼 큰 죄도 없습니다. 아버지에겐 둘 다 똑같은 탕자일 뿐입니다.

 

동생을 살인한 형

 

큰 아들이 집에도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은 동생과 밥도 한 끼 먹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얼굴도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동생과는 아예 상종도 않겠다는 것으로 동생으로 취급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열등한 아들이라고 멸시 차별한 정도가 아닙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서 이런 잔치를 받을 자격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외국에서 굶어죽었어야지 왜 돌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말로 형제를 바보라고 욕하면 살인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순간 상대로부터 살인당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형은 이 탕자 동생과 형제로 엮이는 것이 너무 싫어서 인간 대 인간으로 인격적 관계조차 형성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에게 동생은 이민 갈 때부터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동생이 아니었고 지금도 같은 아버지의 같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생을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렸으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동생을 살인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가장 좋은 옷을 입혔고 반지와 새 신발을 주었다는 말까지 들었다면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동생을 진짜로 죽이려들지 모릅니다.

 

가인이 친동생 아벨이 자기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도 살인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아서 질투와 분노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둘째아들이 큰아들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잘못할까봐 멀리 외국으로 가벼렸습니다. 아버지가 여전히 동생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으니까 가인과 동일한 본성에서 나온 살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한국 속담대로 남이 잘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모든 것에 실패하고 죽음 직전까지 이르러서 하나님께 돌아와 인생이 뒤집어져야만 세상에서 형통하고 출세하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님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 시기도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이 그것도 겨우 생기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완악한 본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주님이 가르치게 된 계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과는 밥도 한 끼 같이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다고 칭찬과 존경받는 이들의 영적실상이 가인과 똑같다고 예수님은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비유의 아버지처럼 여러 번 간곡히 가르쳤고 그전에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에 대해 계시해주었는데도 유대인들은 비유의 맏아들처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리와 죄인이 부러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맏아들은 창기와 노느라 돈을 탕진했어도 살진 송아지를 먹고 있는 동생과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어도 염소새끼조차 즐기지 못했던 자신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는 뜻이 일차적이지만 이번에도 숨겨진 본심이 은연중에 튀어나왔습니다. 자기도 둘째 아들처럼 세상에서 신나게 자기 멋대로 놀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로마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세상에서 풍요롭게 온갖 쾌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이 내심 부러웠던 것입니다. 세리는 부자였고 이방인들은 도덕적 제약이 없다시피 하니까 맘껏 쾌락을 다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세리는 당시의 모든 사정상 어쩔 수 없이 그 직업을 갖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 누군가는 맡아야 할 일입니다. 생존이 최대과제였던 시대라 먹고 살기 위해서 택한 직업입니다. 풍요를 누리면서도 막상 민족을 배반했다는 얌심의 가책에서 하루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족들이 자기들과 식사교제도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죄인으로 취급되는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세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싶어도 아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심판을 선고 받아서 성전 근처에도 가보지 못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식사라도 나누고 싶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표식입니다. 그런데도 둘 다 완전히 정죄 받았으니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동생이 형과 평소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로 가버린 모습과 똑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과는 한 끼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제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을 넘어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로선 인간에게 따돌림을 당한 위에 하나님에게마저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세상에서 아무리 멸시 배척 받아도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은 절대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은 구체적인 인식은 못해도 삶의 모든 측면이 하나님을 지향하게 됩니다. 한 명의 죄인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배경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이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하늘은 알아줄 것이야! 내가 죽더라도 하늘이 대신 원수를 갚아줄 것이야!” 등의 말을 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인 하나님마저 너희를 저주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인간이 찾아갈 수 있는 최후의 도피처마저 완전히 무너뜨려버렸습니다. 하나님 그분을 사람이 한 번이라도 죄를 범하면 심판해버리는 가공할 폭군으로 비하시켜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크게 먹칠을 했습니다.

 

그들은 인생 만사를 그때그때 드러나는 겉모습만 보고 자기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선악 간을 판단했습니다. 그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사람은 무조건 배척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있는 거룩한 자기들과는 절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따지면 세리와 죄인이 행한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 그들의 신분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자들로 확정지어 버렸습니다. 날 때부터 붉은 뿔을 단 마귀의 자식이므로 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식인 자기들과는 다른 나라에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돼지가 먹는 열매도 주지 않았기에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한 사탄의 나라의 백성과 똑같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 나라 백성은 그나마 흉년이 닥쳐서 자기들도 먹고 살려고 그랬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어떤 어려움도 없고 세리와 죄인들이 자기들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 아예 법으로 사람 취급하지 말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비유에서 동생은 사람들에게서 아무 소망이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인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형은 그런 동생을 여전히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고 화만 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동생이 최후의 도피처로 가려는 길마저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야단치는 큰아들

 

놀랍게도 큰 아들의 잘못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그가 불평한 내용을 알기 쉽게 바꾸면 지금 아버지는 아주 큰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창녀와 돈을 탕진한 저 천하의 죄인을 아들은커녕 사람 취급도 해주지 말아야 한다고 아버지를 야단친 것입니다. 아버지도 내가 정하는 기준과 규율에 맞아야만 아버지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의 마음 상태와 동일합니다. 그 죄의 여파로 형 가인이 아무 잘못 없는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지금 그와 동일한 과정을 바리새인들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현실적으로 형통케 해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하나님도 자기들 요구대로 해주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에서 세리와 죄인을 살인하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가인과 달리 직접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그 죄를 경시해선 안 됩니다. 구원의 최후의 도피성의 정문을 자기들이 가로 막아서서 못 들어가게 했으니 그 생명을 영원히 죽여 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라도 끝까지 찾아서 구원을 주시려는 예수님과 성령을 훼방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오히려 사탄의 졸개 노릇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 유일하게 저주를 받았습니다. 인간이 감히 다른 인간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정죄하는 순간 자기부터 심판의 자리로 떨어질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해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고 통박했습니다. 이어서 율법을 맡아 가르쳐야 할 자가 오히려 소경의 길을 인도하며 스스로 자신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0-24)라고 덧붙였습니다. 지금 상황이 바로 그러하지 않습니까? 율법은 물론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인을 미리부터 죄인이라고 딱지 붙여서 상대도 않으려 합니다. 이방인들이 볼 때에 너무나 교만하다 못해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비방할 것입니다.

 

정작 유대인들이 정해 놓은 식사교제 금지 규정을 어긴 것은 예수님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온전한 인격을 갖춘 온전한 인간으로 대우해주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당신만의 기준은 처음부터 아예 하나도 없었습니다. 창녀 세리 가난한 이방인 과부 같이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인격 대 인격으로 순전한 관계를 먼저 맺은 다음에 교제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당신의 죽음으로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제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일입니까? 짐승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썼다면 누구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남들보다 잘 나면 얼마나 잘 났습니까? 똑같이 어리석고 죄에 찌든 다른 인간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그러지 못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자기 자신도 속이지 못합니다. 정말로 진지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면 궁극적인 구원이 필요 없다고 당당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불신세상도 “내 탓이오” 운동을 벌리고 있지 않습니까?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돌로 치라고 했을 때에 젊은이부터 시작해 모두가 물러갔지 않습니까?

 

작년에 흑인용의자를 미국의 백인경찰이 잔인하게 진압하다 수십 분 만에 죽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BLM -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캠페인이 전 미국은 물론 세계를 뒤덮었습니다. 이처럼 아직도 인종차별이 성행하니까 인간은 창조 때에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로 단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정도만 다르지 다 가인의 피를 갖고 태어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마찬가지이고 비유의 두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 천하에 드러난 이 진리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결코 부인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찾는 자도 없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롬3:10-18) 그럼 그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이 당면하는 이 딜레마를 해결할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앞에 진심으로 겸허하게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정말로 온전한 신자인가?

 

이제 이 맏아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 아니 진짜 속마음을 되돌아 볼 차례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식하고 온전하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우리를 대신 살리신 의미를 정확히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을 알게 모르게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라도 교회 안에서마저 함께 식사하기 싫은 사람은 없습니까? 세상에서 형통 출세한 사람을 내심 부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리 기도해도 그렇게 해주지 않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이 쌓여가지는 않습니까?

 

신자도 연약한 인간이며 예수님을 믿었어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있으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서 그 잘못을 토설하면 미쁘신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십니다. 비유에서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고멜을 호세아가, 또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당신 앞에 엎드리는 순간 예수님이 다 용서해주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절대로 행해선 안 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자부심과 교만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믿음이 연약한 교인이나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성경에 기록된 계명이나 심지어 자기가 정한 도덕적 종교적 기준을 갖고 함부로 정죄 심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언덕인 하나님마저 그에게서 빼앗아버리는 것이며 마지막 소망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너무나 잔인한 짓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쟁이들 때문에 교회가기 싫다는 말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심지어 그 사람을 위하고 싶은 생각이라도 그래선 안 됩니다. 비유에서 큰 아들을 긍정적으로 봐주어서 장남이라 집안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그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살펴본 대로 너무나 참담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근본은 윤리나 종교로는 절대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도 없습니다.

 

신자가 절대로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것은 역으로 따지면 신자라면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사회에서 소외되어 절망에 빠진 비참한 사람들에게 최후에 기댈 언덕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고난 중에 신음하거나 영적으로 갈급해 갈 바 모르는 이웃들이 마지막으로, 정확히 말해선 가장 먼저 찾아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라면 내 모든 사정을 다 털어놓고 의논하고 싶고 따뜻한 위로와 기도를 해줄 것 같다는 자가 평소부터 되어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냥 내 이야기를 어떤 편견, 선입관, 이해타산, 차별의식, 중요하게는 윤리적 정죄 없이 끝까지 들어줄 것 같은 사람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죽어 마땅한 철두철미 죄인인데 세상에선 어떤 소망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만 소망했던 자가 신자입니다. 자신이 최고로 비천한 자리에 떨어져 철저하게 죽어봤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까지는 몰라도 차별할 수는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차별은 자기보다 못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되는데 신자가 되어서도 차별한다면 최고 낮은 자리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사실상 믿음이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뿐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이를 예수님의 긍휼 없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는 불쌍한 자라는 관점으로 대하는지 여부입니다. 창기와 노느라 아버지 돈을 다 탕진한 천하의 탕자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 자신도 십자가 긍휼 안에 거한다는 증거요 주님께 받은 은혜입니다.

 

(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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