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1:5-13) 끈질기게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된다.

기도 시리즈 (13)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5-13)

 

한국교회에 만연한 기도만능주의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시일에 급속도로 교세가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새벽마다 교회에 모여서 뜨겁게 기도한 것도 큰 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아마도 평일의 새벽 예배가 교회 공적모임으로 행하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새벽에 함께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단순히 끈질기게 기도하면 어떤 큰일이라도 이뤄낼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버렸습니다. 일종의 기도만능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권능에 걸맞게 이왕이면 기도제목도 최대한 크게 작정하라고 가르칩니다.

 

불신자들을 전도할 때도 그런 기도만능주의가 큰 몫을 합니다. 큰 고난에 빠진 이웃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약속하셨으니까 함께 새벽예배에 나가서 기도하자고 권유합니다. 이웃은 너무나 힘든 차라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따라 나와 기도했더니 그대로 응답되어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런 체험이 귀해서 교회에 출석하기로 결심하니까 교인이 된 후에도 기도만능주의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거기다 본문 같은 말씀이 그런 인식이 더 확고해지는데 일조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끝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면 무엇이든 반드시 응답된다고 이해하고 치우기 때문입니다. 기도만능주의라고 표현한 까닭은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신념체계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딴죽을 걸면 오히려 기도에 대해서 모르고 믿음에 하자가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만능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의로운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위치나 권능을 대신하게 되면 우상입니다. 기도만 하면 무엇이든 이뤄지면 사실상 기도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신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기도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꼴입니다.

 

끈질기게만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하면 끈질김이라는 인간의 성격 내지 기질이 응답을 잘 받는 결정적 요소가 됩니다. 그럼 인내심이 약한 자의 기도는 아무래도 응답받기 힘들다는 이상한 결론에 빠지고 기독교신앙이 심리학 수준으로 격하되어 버립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영적으로 아직 미약하여서 때로는 자기 욕심이 기도에 개입되어도 진심으로 당신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 모든 기도를 반드시 당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응답해주십니다. 그 응답 중에는 놀랍게도 끝까지 신자가 기도한 대로 응답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됩니다. 잘못된 기도임을 어서 빨리 깨달으라는 신호 내지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비유의 뜻은?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13:34)라고 할 정도로 거의 매번 비유를 사용해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비유란 영적진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평소에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을 인용해 그림언어로 바꾸어서 전달하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자면 어떤 여자를 두고 ‘보름달 같이 예쁘다’라고 말하면 그녀의 미모를 보름달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예쁜 데도 수많은 모습이 있는데 보름달의 특성을 닮았다고 했으니까 둥그런 얼굴에 미소가 너무 밝아서 모든 이에게 호감을 준다는 뜻으로 해석해야합니다.

 

주님은 본문에서도 두 가지 비유를 들었는데 친절하게도 곧바로 이어서 비유를 통해 강조하려는 진리를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첫째는 5-7절이 비유이고 8-10절이 진리이며, 둘째는 11-12절이 비유이고 13절이 진리입니다. 주님이 결론으로 덧붙인 영적인 진리를 정확히 알려면 그 앞부분의 비유부터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본문이 “또 이르시되”라고 시작되므로 반드시 주님이 앞에서 이르신 말씀과 연결하여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앞에서도 제자들이 먼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고 요구하자(1절) 주님은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 내용은 마태가 산상수훈에서 기록한 것과 같은데 누가 판 주기도문인 셈입니다. 이런 문맥상의 흐름을 감안하면 본문을 신자들이 임의로 행하는 모든 기도에 확대 적용해선 안 되고 주님이 앞에서 가르친 대로 기도할 때에 간청하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비유는 여행 중에 벗이 찾아왔는데(6절) 먹을 것이 없어서 밤중에 다른 벗을 찾아가 떡 세 덩이만 빌려달라고 요청했다는(5절) 내용입니다. 주님은 우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친구사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여행 중에 찾아온 친구와 밤에 찾아온 친구끼리도 친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비유의 주인공과 떡을 빌려줄 친구와는 밤중에 찾아가서 그런 일을 부탁할 만큼 평소에 막역한 사이라는 것입니다.

 

떡 세 덩어리란 겨우 허기만 해소할 수 있을 정도의 적은 양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 한 소년이 먹을 한 끼 도시락의 양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 않습니까? 비유의 주인공에게 그런 정도 음식도 남아 있지 않다면 매일매일 끼니를 이어가기 바쁜 가난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앞에서 가르친 대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항상 기도해야할 처지입니다.

 

찾아간 그 친구가 보일 반응에 대한 주님의 설명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유대의 문화와 관습을 아셔야 합니다. 일반 서민의 가옥 구조는 거의 대부분 방이 하나만 있었습니다. 방 하나에서 전 식구가 함께 누워 자는 식이라 밤중에 일어나려면 아무래도 부산한 기척이 나고 또 떡을 찾으려면 불을 켜야 하니까 온 식구가 깰 수밖에 없습니다. 그 친구는 주인공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방이 하나뿐인 집에 사니까 크게 형편이 나은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서로 돕고 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비유의 끝에 반어법을 사용해서 강한 긍정의 뜻을 표현했습니다. 식구가 다 깨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도 친구 사이인지라 반드시 일어나서 빌려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고 앞선 내용과는 상충되는 듯한 의미로 비유를 풀어주었습니다. 마치 친구 사이 때문이 아니라 끈질기게 간청하므로 내키지 않는데도 귀찮아서라도 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당사자들을 벗이라고 표현했기에 언제든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라고 전제한 것입니다. 그래서 밤중에라도 찾아갈 수 있고 또 당연히 빌려준다는 사실을 미리 밝혔습니다. 그리고 떡 세 덩이는 너무나 절실한 최소한의 요구이므로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잘 모르는 사람의 집이라도 가서 간청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초점은 친구 사이인가 여부가 아니라 그 요구가 정말로 들어주지 않고는 안 될 만한 간절한 진정성을 가졌느냐에 모입니다. 간절함이란 항상 진실함을 수반합니다. 모든 인간이 비록 원죄로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기에 거짓을 말하면 반드시 표가 나게 됩니다. 간청한다는 원어의 의미는 체면 염치 차리지 않고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수치를 당하더라도 꼭 말해야 할 사항을 진심을 담아서 담대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행 중에 있는 친구가 밤중에 도착했다는 것은 그 날 중에 반드시 도착하려고 매우 서둘렀다는 뜻입니다. 저녁은 물론 점심까지 굶었을 수 있습니다. 떡 세 덩이는 도저히 도와주지 않고는 안 될 그런 딱한 처지를 말합니다. 첫째 비유에 대한 주님의 결론은 너무나 긴급한 상황에 처했으니까 간청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서 친구 사이가 아니라도 사람이라면 도와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간청하는 기도란?

 

그런 간청함을 기도에 적용하면 응답되지 않았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중도에 그만둔다는 것은 간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예수님 당시에는 굶어죽지 않는 것이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과제이므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끝까지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양식뿐 아니라 현실 삶에서 그런 절실한 문제는 범사를 거룩하게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원죄로 타락한 이후로 인간 사회는 시기 분쟁 갈등 죄악 고난 등이 끊일 새가 없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는 제대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 기도를 간청해야할 더 중요한 이유는 주님이 앞에서 가르치신 대로 모범적인 기도를 했다면 반드시 응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에 비추면 이 비유에서의 간청은 말씀드린 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 외에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차원에도 해당됩니다. 비유 자체로는 죄를 지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들 잘못을 용서하라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므로 지금 떡이 없을 정도의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돕는 것이므로 같은 맥락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간청하는 기도에 대한 주님의 결론(9,10절)도 비유는 물론 주기도문에 비추어서 정확히 해석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장 먼저 강조하신 것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이지 “받으라, 받을 수 있다, 주신다.” 등등이 아닙니다. 거기다 받는 것도 “구하는 것마다, 찾는 것마다, 두드리는 것마다”가 아닙니다. 본문에 대해서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듯이 기도하는 제목들이 다 응답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마다, 두드리는 이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반드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굳이 의미를 나눠서 따질 필요는 없고 세 번이나 반복할 만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없다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위급한 경우가 생겨야만 기도해선 안 되고 호흡처럼 범사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평소에 참여하지 않던 신자가 갑자기 나타나면 목사님들은 “저 집에 긴급한 일이 생겼구나!”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십중팔구 그런 짐작이 맞아떨어집니다.

 

바꿔 말해 구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찾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하고,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은혜를 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이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요구만 하면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정확히 분별하여 해결책을 세울 수 있게 하려고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하기 전까지는 모른 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도 신자가 “제 힘만으로는 구하지도 찾지도 열 수도 없습니다. 저에게 선한 것을 주시고 영적진리를 찾게 해주시고 하늘의 은혜를 받는 길을 열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당신뿐입니다. 지금 저를 제발 도와주시옵소서.”라는 순전한 믿음의 고백을 하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비유가 끈질기게 기도만 하면 다 응답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늘에서 이뤄진 뜻이 땅에 이뤄지길 열정적으로 소망하고,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진심으로 용서해주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고, 끼니를 잊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을 간절히 도와주고 싶고 또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이웃은 물론이고 그분이 지으신 모든 동료 인간들을 벗처럼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진심과 열정이 있다면 뻔뻔할 정도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간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대로 기도했다면 안 들어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남은 문제는 시간과 방식뿐이므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그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도하면 됩니다.

 

둘째 비유의 뜻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비유가 그러하듯이 본문도 참으로 정미합니다. 첫째 친구에게 떡을 빌리는 비유는 기도할 내용과 기도하는 자의 영적상태와 기도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할 내용은 우선적으로 이웃의 어려움 아픔 상처 죄악 등이고 기도하는 자세는 친구 사이가 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방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해야 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그런 신자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열매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는 친구 사이에 빗대었는데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빗대었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가장 먼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이 된 관계와 또 그런 믿음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친아버지라고 믿는다면 무엇이든 뻔뻔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엇이든 담대하게 말할 수 없다면 아직 온전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고 권합니다. ‘그러므로’라고 말한 것은 그 앞의 설명에 바탕을 두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험하며 모든 시험을 받았으나 죄가 없는 완전한 대속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순전히 받아들인 신자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데에 장애가 될 만한 모든 요소들이 완전히 다 제거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지심으로 성전에서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었습니다. 기자는 그래서 주님의 그 보혈의 공로에 힘입은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있는 모습 그대로 죄를 사해주고 나아가 은혜를 베푸시는 지성소 언약궤 앞으로 들어갈 담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히10:19,2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성부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를 위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어폐가 있지만 그래서 주님만이 신자더러 하나님께 뻔뻔하게 기도하라고 얼마든지 뻔뻔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비유에선 떡 세 개라고 했고 둘째 비유에선 아들이 물고기를 달라고 요구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떡과 물고기는 유대인들의 일상적 식사를 말하는데 뭔가 연상되는 것이 없습니까?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인데 그 전체 규모는 엄청났어도 사실은 종일 끼니를 굶어가며 당신의 설교를 들은 각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한 끼의 양식이었을 뿐입니다. 뱀이나 전갈도 황량한 유대 땅에선 예사로 접하는 동물입니다. 비유를 듣는 제자들은 너무나 쉽게 이해되고 실감나는 사물들입니다.

 

주님은 앞에서 주기도문으로 가르친 일용할 양식에 잇대어서 기도에 대해 추가로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이 직접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한 후에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신자들더러 그렇게 끼니를 잊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의 심정에서 자기 자식처럼 안타까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 아버지 되는 하나님께 마치 자기 아버지에게 요청하듯이 간절히 또 담대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아들은 사랑합니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면 절대로 뱀을 주지 않으며, 생선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은 주지는 않는다고 비유했습니다.(11,12절) 마찬가지로 주님은 반어법을 사용했기에 하물며 하나님은 더더욱 그러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실 만큼 신자를 사랑하십니다. 신자가 무엇을 기도하든 결코 부정적인 것은 주지 않고 반드시 필요하면서 유익한 것만 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신자가 기도한 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도 응답의 일종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대로 들어주면 신자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고 오히려 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 신자로선 그대로 안 되면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뜨겁게 기도하지만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장기적 관점에서 보시는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이 신자에게 나쁘다는 것을 아시고 정말 좋은 길을 미리 예비해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무리 사탕 달라고 계속 보채어도 부모는 건강식을 억지로라도 먹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선을 달라면 고래를 준다든지 알을 달라고 하면 알을 낳는 암컷 생선을 준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신자가 기도할 때에 기대하는 수십 배의 응답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일용할 양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면서 모든 가구에 가족 숫자에 맞춰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주셨으며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아도 되도록 평소의 두 배를 내려주었습니다. 만약 욕심을 내어서 더 많이 거두면 썩어서 냄새가 남게 했습니다.

 

가장 좋은 기도 응답은?

 

본문과 동일한 기도의 가르침을 기록한 마태는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신다고 했지만(마7:11,12) 구한 것보다 질적 양적으로 수십 배 좋은 것이라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우선 마태도 누가와 똑같이 구하는 것마다 주시지 않고 구하는 자마다 주신다고 기록했습니다. 만약 구하는 것마다 주신다고 했으면 마태가 말하는 좋은 것은 질적 양적으로 더 우월한 것이라고 간주해도 될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하는데 누가는 마태가 말한 좋은 것을 구체적으로 성령이라고 밝혔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친아버지처럼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가장 유익하므로 모든 기도의 가장 좋은 응답도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이므로 그 의미를 잘 새겨야 합니다.

 

우선 본문은 예수님이 앞에서 가르치신 주기도문과 연결되므로 그런 기도를 해야만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성령을 받기 위해선 하늘에서 이뤄진 뜻을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에서 이뤄진 뜻은 무엇입니까? 신자와 신자가 속한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반드시 임하고 신자의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주시므로 신자는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런 기도를 하면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뜻이므로 그 응답도 당연히 그대로 됩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주님은 기도한 대로 받은 줄 믿으라고 했습니다. 굳이 기도의 제목을 다른 것에 둘 필요가 없고 이것 외에 기도의 열매를 다른 것으로 구할 이유도 없습니다. 요컨대 기도 응답이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그대로 되므로 신자가 끈질기게 기도한다고 그 정성이 갸륵해 수십 배로 질과 양을 늘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성령은 신자에게 내주해서 평생토록 함께하십니다. 기도하면 또 다시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부 교파가 주장하듯이 제 2의 성령세례를 받아서 방언 같은 은사를 실현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마다 내주하신 성령님이 신자를 도와서 기도의 열매가 하늘에서 이뤄진 대로 되도록 당신의 역사를 충만하게 일어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내가 지금 하는 기도가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뜻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성령이 주시는 영적분별력으로 인해 기도하는 중에도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수정하든지 만약 잘못되었다면 포기하게 이끕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는데 장애가 되는 교만, 욕심, 고집, 허물, 죄악 등이 있으면 먼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 신자더러 진정한 회개로 이끕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의 죄도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게 해줍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면 응답된다는 확신이 들게 해주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할 수 있는 힘과 인내심을 부어주십니다. 기도한 대로 일용할 양식을 조달할 직장을 얻게 해주고 신자답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현실에서 아무리 궁핍하고 세상 사람들의 멸시 핍박을 당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바울처럼 십자가 복음을 자랑스럽게 증명할 수 있는 담력도 주십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소원과 기회와 자원을 부어주십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자기 자식처럼 안타까운 심정이 저절로 들고 도와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긍휼한 심정으로 채워줍니다. 최소한 그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게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본성은 그럴 수 없어도 성령이 다른 이의 형편을 이해 타산적으로 따지지 않고 거저 후히 주도록 이끕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자의 기도할 마음과 제목과 방식은 물론 그 실천까지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되게끔 주관해주십니다.

 

마태도 주님이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한 후에 이런 말씀을 덧붙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뜻하므로 성경이 말하는 바가 남을 대접하는 만큼 남에게 대접받는다는 것입니다. 남을 천대하면 자기도 천대 받고 남을 헤아리면 자기도 헤아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관계의 지혜를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에 대해 가르친 후에 그 말씀을 하셨으니까 기도할 내용을 남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웃을 대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그 이웃을 하나님이 주관하여서 말하거나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신자를 잘 대접하게끔 인도해준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에 다른 이를 축복해주어서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해주면 하나님이 아브라함보다 그를 축복해줄 것이라고 언약한 그대로입니다.

 

기도가 얼마나 엄청난 권능을 갖는지 정확히 깨달으셔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했고 하나님이 신자들의 모든 고난과 문제를 책임져 주신다고 하니까 힘들 때 기도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단순한 차원이 결코 아닙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뤄진 뜻을 이 땅에서도 당신께서 실현하는 거룩한 사역에 신자더러 영광스럽게 동참시키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정작 신경 써야 할 것은 기도를 얼마나 끈질기게 하느냐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그리고 그분의 뜻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한 인도에 따라 항상 기도하는 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기도하면 당신의 방식대로 이뤄질 때까지 인내 순종 실천할 수 있게 성령을 주시니까 성령에 사로잡힌 기도의 종이 되라는 것이 본문 말씀의 뜻입니다. 요컨대 기도 제목은 반드시 또 가장 먼저 불신 이웃의, 최소한 친구의 아픔을 눈물로 가슴에 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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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눅23:39-43) 십자가 강도의 구원은? master 2021-09-25 85
78 (눅15:1-2, 17:7-10) 예수 천당 불신 지옥. master 2021-06-28 37
77 (눅17:5-10) 마땅한 신자와 못마땅한 신자. master 2021-06-28 55
76 (눅17:3,4) 신자가 절대로 행해선 안 되는 한 가지 master 2021-06-28 35
75 (눅17:1,2) 지옥에 떨어질 사람의 조건은? master 2021-06-28 41
74 (눅16:26-31) 신자인지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 master 2021-06-28 101
73 (눅16:19-25) 죽기 전에 인생 역전을 이루라. master 2021-04-26 108
72 (눅16:14-18) 목사와 교인이 함께 망하는 지름길 master 2021-04-24 331
71 (눅16:10-13) 인생을 정말로 자유롭게 살려면? master 2021-04-24 810
70 (눅16:8,9) 친구들 덕분에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master 2021-04-05 71
69 (눅16:1-8) 매일 아침 신자가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 master 2021-04-05 62
68 (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master 2021-04-05 39
67 (눅15:31,32) 인간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은? master 2021-04-05 73
66 (눅15:25-30) 최후의 도피성마저 무너뜨린 바리새인들 master 2021-03-02 40
65 (눅15:22-24)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할 세 가지 축복 master 2021-03-02 414
64 (눅15:20,21) 믿음의 본질은 뻔뻔함이다. master 2021-03-02 127
63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master 2021-03-02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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