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6:26-31) 신자인지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

돌아온 탕자 시리즈 (1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6-31)

 

건너지 못하는 큰 구렁텅이

 

복음서를 보면 사후심판에 대해 예수님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게 될 것이라는 정도로 간단하게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경건을 꾸짖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선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했기에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멸시 천대 받던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에 낙원으로 갔고 이 땅에서 호사스럽게 살던 부자는 죽은 후에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부자는 음부의 불타는 극심한 괴로움 때문에 낙원의 물 한 방울이라도 얻어 마시려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유를 낙원의 주인인 아브라함이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25절)고 밝혔습니다. 죽은 후에 부자가 거지와 운명이 뒤바뀐 것이 살펴본 대로 단순히 이 땅에서 호사스럽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돈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서 자기가 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을 평생 천대했던 것입니다.

 

부자인 바리새인들은 살아 있을 때에 거지 세리와는 한 끼 밥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물 한 방울은 그들이 매일 연회를 벌리며 먹고 마신 음식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너희가 살았을 때 범한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안다면 지금 물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원망할 수 없다는 즉, 지금 당하는 고통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부자의 요청을 거절한 또 다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부와 낙원 사이에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있기 때문에 물을 건네줄 수 없다고 합니다. 비유의 특성은 상징과 은유를 많이 사용하되 누구나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낙원과 음부 사이에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의 의미도 간단하게 추정이 가능한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모든 인간의 죽은 후의 상태는 정반대의 극과 극으로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낙원은 생수가 넘치고 음부는 불꽃만 넘치는 곳입니다. 사람이 물을 못 마시면 며칠 만에 죽지만 육신이 물질계에서 제한될 때만 그렇습니다. 영계에선 그런 법칙이 적용되지 않으니까 그런 식의 엄청난 고통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둑이 터져서 물을 가두지 못하는 웅덩이를 스스로 판 것 두 가지 악을 범했다고 선언했습니다.(렘2:13) 부자는 자기 소유로 자기만족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사실은 이 땅에서부터 탐욕을 전혀 채우지 못하고 항상 목말랐던 가장 실패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후세계의 구체적인 물리적 상황은 아무도 모릅니다. 낙원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함으로서 기쁨이 끊이지 않는 반면에 음부는 그런 교제가 불가능하므로 기쁨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는 제2의 기회는 없다.

 

낙원과 음부 사이에 구렁텅이가 가로막고 있다는 둘째 의미는 죽은 후에는 제 2의 기회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고 절대로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일부 교파에선 예수님이 확정적으로 말씀하신 이 진리를 거부하고 죽은 후에도 제2의 기회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컨대 몰몬교에선 죽은 자를 위해 이 땅에 남은 가족이나 친지가 기도해주면 이 비유와 달리 음부에서 낙원으로 옮겨진다고 가르칩니다. 죽은 후에 제 2의 기회가 있다고 가르치는 의도는 너무나 뻔합니다. 정통 크리스천도 그러하듯이 그들도 몰몬교를 믿지 않고 먼저 죽은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고 미처 전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괴롭습니다. 그런 걱정을 단 번에 해소해주니까 교인들로선 안도할 수 있고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 의롭다고 여기며 더욱 충성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톨릭에도 유사한 교리가 있습니다. 죄의 종류를 일곱 가지 대죄와 그 외의 소죄로 나누는데 대죄를 짓고도 고해성사를 않은 자는 곧바로 심판받습니다. 소죄에서 자유로울 자는 한명도 없으니 나머지 모두는 죽으면 연옥으로 들어가 구원을 기다리며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심판 받는 죄의 성격을 하나님을 대적한 원죄가 아니라 인간사회의 윤리차원으로 구별했습니다. 거기다 죽은 후에도 본인이 쌓은 공적에 의해 낙원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종교마다 각기 다른 구원관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므로 그들의 구원관에 대해 시비 걸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죽은 후에도 제 2의 구원 기회가 있다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모르면 어떤 선행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천국 간다고 하면 아무래도 불합리하다고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거기다 죽은 후에도 제2의 기회가 있다고 하면 솔깃해질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성경진리는 외면한 채 인간의 보편적 생각에 맞춰주는 구원관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 외에 구원의 길이 있다거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니까 추가로 더 보충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분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믿을 것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에 따라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님만이 인간이 평생을 마셔야 할 생수의 근원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간혹 개신교인들 중에도 예수님이 이 땅에 반드시 오셔야만 했던 근본 이유를 잘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사랑이 많아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만 이해합니다.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것이 십자가 복음의 절대적 전제입니다.

 

만물 가운데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정말로 솔직하게 자신을 되돌아볼 때에, 심지어 크리스천이 된 후에도, 우리 속에서 더럽고 추한 죄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나 육신은 따라오지 않는다는 실토를 안 해도 될 만한 사람도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 자체를 새롭게 거듭나게 해주는 길 말고는 인간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죽은 후에 낙원으로 가고 거듭나지 않는 자는 음부로 갑니다. 그럼 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음부에 있기에 여전히 자기 노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구원의 두 번째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완악한 인간의 심령

 

목이 타들어 가는데도 물도 마시지 못하는 고통이 너무 힘들어진 부자는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신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부 교파에선 살아있는 가족들이 믿지 않고 죽은 형제들을 걱정한다고 가르치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죽은 자가 살아있는 가족을 염려한다고 말합니다. 물질계에선 영계의 사정을 전혀 알 수 없으나 욥기 서론에서 말하듯이 영계에선 물질계의 사정을 익히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자는 이 극심한 고통을 형제들에게 가르쳐주어서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28절) 나사로보다 본인이 가서 설명해야 형제들이 잘 들을 것인데 나사로를 보내달라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부자 바리새인이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 버릇을 못 버리고 거지 나사로를 천대하며 부려 먹으려는 뜻은 아닙니다.

 

음부에 완전히 떨어진 자는 더 이상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반면에 낙원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심판이 없으니 아브라함이 허락하면 어디라도 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나중에 모세와 엘리야를 변화산으로 불려 내려 교제를 나눴지 않습니까?

 

부자는 자기가 심판을 받은 원인을 나사로가 대신 잘 전해주어서 자기 같은 실패를 겪지 않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사람들을 자기 기준으로 차별하지 말고 세리와 죄인들과도 식사 교제를 하라고 당부해 달라는 뜻입니다.

 

부자도 형제들의 인생관과 신앙관과 평소 삶의 모습이 자기와 똑같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바리새인 동료들과 자기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자기처럼 음부에 떨어질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임을 안 것입니다. 자기는 어차피 이렇게 되었지만 그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흥청망청 지내다가 심판 받을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럴 필요 없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면 된다고 거절했습니다.(29절) 굳이 나사로를 다시 보내지 않아도 구약시대 이래로 지금껏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가르쳐 주려고 너희 형제에게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절대적 기준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도덕적인 선행을 하느냐 종교적으로 율법규정에 순종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만 주인으로 삼아서 일생이 그분의 거룩한 뜻 안에 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한 첫째 아니 거의 유일한 이유는 우상 숭배를 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속으로는 우상을 더 중하게 섬기는 혼합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의 기본인 십계명은 잘 알다시피 첫째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 계명에 “하나님 외에”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다른 신도 함께 섬기리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씩 지켜선 안 되며 첫째 계명을 어기면 나머지 전부를 아무리 다 잘 지켜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짓는 모든 죄는 하나님을 외면했거나 하나님을 섬기면서 돈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는 첫째 계명을 지키는 척하면서 둘째 계명도 어김으로써 사실상 둘 다를 어기는 것입니다. 아직 당신을 몰라서 섬기지 못하는 자는 회개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알면서도 다른 주인을 함께 섬기면 진짜 주인인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보다는 체험이 우선인가?

 

그래도 부자는 미련이 남아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절)라고 다시 간청했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단지 말로 전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죽었다 다시 돌아온 사람이 자기 체험을 간증하면 쉽게 믿고 회개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리가 있으면서도 자신의 실패한 경험을 반영한 진심어린 고백입니다. 자기도 모세와 선지자들이 경고한 내용을 다 배웠지만 제대로 깨닫거나 실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낙원과 음부가 있고 그 사이에 구렁텅이가 끼워있어서 음부에선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는 극심한 고통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이방인은 물론 원수도 사랑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요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이 조금 충격적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0절) 선지자들의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실제 부활한 사람이 낙원과 음부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거지의 이름을 나사로라고 붙인 첫째 이유는 그도 엘리에셀처럼 아브라함의 충성된 종이자 유대인 후손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어두운 데서 이를 갈며 울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어서 운명이 역전되었으니까 정작 그렇게 가르친 바리새인들이 어두운 데서 울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더 중요한 뜻은 죽은지 나흘 만에 예수님이 말씀 한마디로 무덤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해준 나사로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다”(요11:4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는데 어찌 예수님의 권능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의 그 믿음이 그대로 지속되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이 전부 다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요11:46-48)

 

주목할 사항은 바리새인들은 나사로가 소생한 사건에 대해선 전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이 있고 그래서 메시아일 가능성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자기들의 기득권이 빼앗기거나 줄어드는 것만 크게 염려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13절) 하나님과 돈 두 주인을 섬기면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나사로를 소생시키기 전입니다. 당신께서 나사로를 살릴 것이고 바리새인들이 그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을 이미 다 아시고 비유로 미리 경고해준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이 비유를 떠올리고 제발 당신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하게 이 비유에서만 등장인물인 거지의 이름을 나사로라고 붙이신 이유가 얼마나 심오합니까?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로(요11:53), 심지어 나사로마저 죽이려고(44절) 본격적으로 음모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노련하고 음흉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로마 사람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니까 온 백성을 위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옳다는 교묘한 핑계를 고안해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정책은 민족 고유의 종교를 자유롭게 믿게 허락해주는 것이었고 나중에 빌라도도 그 정책에 따라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을 비롯해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직 자기들 돈을 지키려고 거짓을 진실인양 만들어내어 우매한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자기들이 로마 당국의 비호 아래에 온갖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특권을 누리고 치부하면서 오히려 백성들을 염려하는 것처럼 가장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그분을 죽여서 자기들 돈을 살려내려 한 것입니다. 엄연히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도 완전히 묵살해버렸습니다. 만약에 율법과 선지자들의 계시대로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었다면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아니 상상도 못하는 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될 줄을 다 아셨기에 나사로를 음부의 증인으로 보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렸다는 사실은 신자가 아니라도 거의 인정합니다. 간혹 임사체험 했다가 소생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사로도 그랬을 것이라고 그냥 지레짐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은 거의 다 믿지 않고 일부 교인들마저 반신반의 합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이 지났고 전문 장의사가 와서 사망으로 판단하고 이미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임사체험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이틀을 지체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전혀 무시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서 성경의 진리를 제 멋대로 곡해합니다. 성경을 온전히 읽고 구체적으로 따지지 못합니다. 정말로 세밀하게 읽으면 진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도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사람이 바뀐다는 것을 알고 또 그런 사례를 목격했기에 성경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청개구리 같은 존재가 사람입니다. 비유에서 나사로가 살아서 땅으로 돌아가도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했고 그대로 실현했습니다. 다른 이의 육신의 상태를 온전히 알 수 없는데도 죽음에서 살려내었다면 자기 육신의 상태를 잘 아는 본인이 자신을 살려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성경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당시의 모든 상황을 정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부인하려야 할 수 없도록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사항 하나 없이 증언하는 데도 아예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천국에 다녀온 체험을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고 증언했습니다. 구체적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는데 인간의 말로는 설명도 할 수 없고 사람이 가히 이해하지도 못할 엄청난 계시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간증해야 사람들이 믿기는커녕 거꾸로 믿음에 장애가 될까 염려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진리의 말씀을 순전하게 믿는 것이 그런 천국체험 간증보다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같은 영적체험이 없어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의 역사로 성경 진리가 온전히 믿어질 뿐 아니라 영원한 부활생명도 이미 받았고 그 완성만 남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통의 올바른 의미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성경이 절대적 진리임을 믿기에 주님의 부활은 물론 본인의 부활이 믿어집니까? 지금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 부활은 물론 나사로를 살리기 훨씬 전에 비유로 그가 소생할 것을 예표했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나아가 바리새인들과 그 추종자들은 부활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만큼 성경이 절대적 진리임을 증명하는 예도 없지 않습니까?

 

결국 이 비유는 교인들 중에 부활을 온전히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자 둘로만 나뉘고 그 결과도 그 믿음대로 낙원과 음부 둘로만 나뉜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신자 아니 목회자도 음부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일련의 비유의 주제대로 돈과 하나님 둘을 동시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이왕이면 하나님도 잘 믿고 현실에서 복도 많이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교회에서 경건하고 믿음이 좋다고 칭찬받으면서 하나님 은혜로 사업도 아주 크게 번창하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돈을 많이 벌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싸우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 속에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실현하라고 신자를 부르셨고 그렇게 인도해주십니다. 신자의 삶은 세상 흐름과는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신앙은 기독교에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작금 한국교회에는 그런 신앙이 큰 세력을 얻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본성적인 성향에 성경의 진리를 갖다 맞춰주는 꼴입니다. 신자들이 신앙을 가지는 첫째 목적도 잘 믿어서 현실에서도 형통하자는 것입니다. 도덕적 선한 행위와 종교적 경건한 의식은 그 형통을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정도는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근 사천년 전에 요셉의 삶을 통해 형통이 무엇인지 정확히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처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 여호와가 함께 함으로 그를 형통하게 했다고 증언합니다.(창39:23) 그 전에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에도 형통했다고 합니다.(창39:3) 둘 다 현실적 안락과 풍요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며 그분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거룩하게 살고 있는 것을 두고 성경은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그가 애굽 총리가 되는 것만 믿음으로 형통했다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 뜻대로 살았기에, 그 뜻에서 어긋난 적이 없기에,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형통 안에 있었기에 총리까지 된 것입니다. 그것도 야곱 가문을 기근에서 살려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축복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거나, 이웃의 생명이 살아나거나, 최소한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거룩해지는 차원이 조금이라도 있어야만 형통입니다. 매일 새벽 기도에서 믿음으로 쉬지 말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제목들입니다.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그 유명한 신명기 28장도 율법에 순종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무엇보다 “들어가도 나가도”라는 표현 안에 일상의 삶이 항상 그래야만 한다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다면 자연히 그분의 권능과 은혜는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선악과에서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 증언하는 내용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돈이 하나님 대신에 혹은 더 우월하게 자기 장래의 안전 기쁨 만족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생각만큼 틀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가 말하는 바도 교회에 칭찬받는 신자라도 하나님과 돈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면 음부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참신자인지 구별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세상에 실현하며 살아감에 있어서 돈이 중요하긴 해도 그 위세에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5/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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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눅15:25-30) 최후의 도피성마저 무너뜨린 바리새인들 master 2021-03-02 40
65 (눅15:22-24)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할 세 가지 축복 master 2021-03-02 414
64 (눅15:20,21) 믿음의 본질은 뻔뻔함이다. master 2021-03-02 127
63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master 2021-03-02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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