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6:14-18) 목사와 교인이 함께 망하는 지름길

돌아온 탕자 시리즈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눅16:14-18)

 

번영신학을 가르치는 바리새인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교제를 나누자 바리새인들이 유대인으로서 지켜야 할 율법규정을 어긴다고 비난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잃어버린 양과 동전과 아들들을 되찾는 비유를 말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의미를 풀어서 가르쳤습니다. 곁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해설을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또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다시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청지지 비유의 결론을 보충해서 설명해주면서 그들의 잘못을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끝에 가선 뜬금없이 앞의 설명과는 관계없는 간음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거기다 몇 절 안 되지만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중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성경공부 하듯이 한절씩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바리새인들이 당신을 비웃은 이유를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4절)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결론으로 주님은 사람은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 땅의 일시적 형통과 안락만 추구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영주하는 처소로 영접되는 사람 둘로만 나뉜다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지만 율법에도 충성했기에 하나님의 영주할 처소에 영접될 자신이 있었던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돈 두 주인을 섬겨도 얼마든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주님은 결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시골 출신의 비주류 랍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오히려 정통파인 자기들을 나무라고 있다고 여기고 비웃은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일상사에서 율법에 따른 판결도 내려주는 수고를 했기에 당연히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고 있는 자기들에게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당시 사람들 사이에 돈을 좋아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주님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꾸짖었습니다.(막12:40)

 

요즘으로 치면 그들은 번영신학을 가르친 셈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면 반드시 현실적으로도 넘치는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과 핍박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당신께서 모든 대적을 막아주시고 고난에서 건져서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가르침을 실제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자기들은 부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지금 미국에도 동일한 신앙노선을 가르치며 신자들의 헌금으로 큰 부자가 된 두 목사가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믿고 열심히 살면 부자가 된다고 가르치는 미국 최대교회의 담임목사와 주로 집회나 TV에서 성령은사주의를 강조하면서 기도하면 질병이나 고난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목사입니다. 두 분 다 목사답지 않게 호화 주택 여러 채와 요트 등을 소유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속담대로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따르면 자기들도 그렇게 되리라고 착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뜨겁게 추종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원래부터 부자였거나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교인들이 기꺼이 응분의 대우를 해주어서 조금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목적이 신자의 믿음과, 사실은 인간적인 정성과 열성임에도, 비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적 축복에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의롭게 살았던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으니까 어쨌든 겉으로는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율법은 물론 유대사회의 전통 관습 법규를 준수했으며 기도와 십일조와 구제도 잘 했기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고 존경했습니다.

 

바리새인들로선 자기들의 의로움을 더 드러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장어귀에서서 큰소리로 기도했으며, 채소와 양념까지 십일조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쉐마’(신6:5) 경문을 담은 작은 상자를 이마에 매는 끈을 더 넓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표시로 겉옷의 깃에 다는 청색 술(민15:38)을 더 길게 늘어뜨렸습니다.(마23:5) 주님은 그래서 지금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15절)

 

히브리어로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라는 뜻인데 기원전 2세기부터 헬라 세속문화의 악한 영향으로부터 유대교가 오염되지 않게 지키려는 종교분파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수호자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민족반역자 세리와 할례 없는 이방인들과 예수님이 식사교제를 하는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신자들이 이왕이면 하나님도 잘 믿고 복도 받으면 좋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은 영적인 거룩인 반면에 신자들이 하나님에게 바라는 것이 현실의 형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반대가 되면 그 둘이 중간에서 만나는 접점은 없습니다. 신자인데도 성경은 뒷전이고 성공비결, 세상처세술, 자기개발서 등을 더 열심히 찾아 읽는 까닭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돈을 미워하게 되고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미워하게 된다고 선언했습니다.(13절) 끼리끼리 모인다고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자기들과 똑같은 바리새인들이 높임을 받지만, 하나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갔기에 그분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15절) 바리새인들이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다 아십니다.(15절b)

 

솔직히 말해 작금 일부 한국교회에서 공공연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장로 같은 중직자를 세울 때에 기도 십일조 봉사 잘하는 자들 중에서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자를 우선적으로 세웁니다. 교인들도 자기들의 수고가 줄어들 테니까 그런 자들에게 표를 몰아줍니다. 심지어 장로로 선임 되면 얼마 이상 헌금하라는 조건을 걸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러는 교회가 소수라 해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천을 더럽힐 수 있듯이 기독교 아니 하나님 얼굴에 완전히 먹칠을 하는 꼴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로부터 돈을 주고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시도하다 사도들로부터 크게 혼이 났습니다.(행8:9-24) 그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하자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또 그 대제사장에 뇌물을 바치는 자들이 성전을 관리하는 이권을 차지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던 어둠의 그림자가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드리워져 있으니 참으로 갑갑할 따름입니다.

 

잘 믿으면 형통하는가?

 

사실은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신자 중에 사업에 실패하거나 자녀들이 말썽을 일으키거나 중병이 걸리면 교회활동에 등한히 하더니 하나님에게 벌 받았다고 뒤에서 수군댑니다. 잘 믿으면 그것도 교회와 담임목사에 충성하면 반드시 현실에서도 형통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그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의 행태와 똑같은데도 오히려 자기들이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면까지 닮았습니다.

 

만약 잘 믿으면 현실적으로도 형통해야 한다는 것이 옳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갈 리가 없고 가서도 안 됩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를 동원해서라도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다윗과 솔로몬 때처럼 번창 영화롭게 바꿔주어야 합니다. 욥기 1-2장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믿음이 좋고 신실한 욥도 이유 없는 고난이 닥쳐서 세상에서 최고로 궁핍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도 당신이 지으신 인간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당신의 뜻에 순종할 때에 영혼과 육신이 거룩해지는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만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심어졌습니다. 서로 자기가 최고 좋은 것으로 최고 많이 최고 빨리 최고 편하게 차지하려 들어서 세상에 고난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본인의 판단미스나 시행착오는 물론 게으름 등이 실패와 고난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과는 상관없이 신자를 포함해서 인간들 스스로의 죄와 잘못 때문에 평생토록 고난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이 땅에서 행하는 도덕적 행동과 종교적 경건에 대해 단지 점수만 매기는 판정관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자녀인 신자가 죄를 범해도 다시 거룩하게 고쳐서 당신의 거룩한 일에 헌신하게끔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신자의 믿음 또한 고난을 없애기 위해서 갖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여서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복신앙관을 고쳐주려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했습니다.(16절) 율법은 모세오경이며 선지자는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가르치는 관용어인데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면 구약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구약성경은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한 셈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고 헤롯 안티파스의 불법을 꾸짖다가 참수형을 당한 바로 그 세례 요한입니다.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말씀의 구속력이 요한의 때로 종료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17절에서 율법의 한 획도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한 것은 일종의 언어 플레이로 요한이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는 시대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침범한다고 즉, 영주할 처소로 영접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6절)

 

요한은 인간 중에서 최초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 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바쳐질 메시야라고 유대대중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나 예수님은 성령과 불 세례로 구원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십자가 죽음으로 그 구원이 이 땅에 완벽하게 실현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문맥상의 흐름에 따라 바꾸면 바리새인들의 기복적인 가르침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그들의 진짜 마음을 다 아시기에 더 이상 그런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게 버려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들과 백성들의 마음은 거룩하게 바꾸려 하지 않고 도덕과 종교의 형식으로 추종자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자기들의 육신만 살찌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해서 함께 지옥으로 멸망하는 참상을 하늘에서 도저히 더 두고 볼 수 없어서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양떼들을 등치는 삯군 목자 시대를 끝내려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참 목자로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의 목에 씌운 도덕과 종교의 굴레를 십자가로 벗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리가 도덕적 죄인이고 이방인이 혈통적 죄인이라고 해서 결코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님이 몸소 본을 보인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살아있다.

 

그런데 주님은 율법의 정신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하신(17절) 후에 간음과 율법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부연설명이 없이 곧바로 간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18절) 조금 황당해 보이지만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이 당시 상황에서 당시 청중에게 전하려고 했던 의미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 청중은 바리새인인데 백성들로 율법을 잘 준행케 하여 유대교를 수호하려는 열성이 지나쳤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수여한 거룩한 율법에는 없는 새로운 규정들을 많이 추가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리와 죄인과는 식사 교제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들을 학대하지 말고 동족과 똑같이 사랑하라(레19:33.34)고 선언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세리들이 마음으로 로마를 사랑한 것은 결코 아니며 다른 유대인들과 똑같이 미워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누군가 행해야만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로마의 일을 맡은 것뿐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마음을 아시니까 거리낌 없이 교제했던 것입니다.

 

로마 당국에 협조 잘한 것으로 따지면 대제사장이야말로 으뜸입니다. 거기다 세리처럼 로마 돈으로 부자가 된 것이 동족의 돈으로 부자가 된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운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로마를 지혜롭게 다루어 너무 쉽게 부자가 되니까 그들을 극도로 싫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신 계기는 당신이 그들과 교제한 이유를 밝힘으로써 세리들을 두둔해주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청지기 비유에는 예수님의 또 다른 절묘한 언어 플레이가 숨겨져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처럼 로마에 바칠 돈을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적게 내고 자기가 착복하는 세리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로마에 적당히 둘러대긴 마찬가지이지만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주는 세리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가 세리에게 관리하도록 한 돈은 이스라엘이 볼 때는 불의한 재물입니다. 또 로마제국의 풍요한 부요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지극히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설교를 들으러 맨 앞으로 나온 세리는 양심적이거나 최소한 자기 잘못을 진성으로 회개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큰 것 즉, 영주할 처소 하나님 나라에도 충성한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돈을 좋아해서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고 지극히 적은 과부의 재산까지 삼키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큰 것을 결코 맡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그런 부정을 저지를 때마다 율법의 정신은 물론 명문 규정마저 어기고 도리어 자기들이 만든 거짓 규칙으로 백성들을 속였습니다. 그런 또 다른 예로서 예수님은 간음 문제를 거론한 것입니다.(18절) 율법에는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24:1)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내의 수치 되는 일은 혼전에 순결을 지키지 못했거나 아내로서 역할을 감당 못할 결정적인 하자를 뜻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도 이혼조건을 부정과 율법파기에 한정했습니다. 반면에 진보적인 힐렐학파는 남편이 이혼의사를 밝히면 가능하다고 해석했고 일반 백성들도 이 해석을 쫓아서 요리만 못해도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고 유권적인 해석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 이유로 쫓겨난 아내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정신에 따르면 여전히 그 남편의 아내이고, 남편도 그 여자의 남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남편은 어엿이 아내가 있는데 그랬으니 새로 시집 온 여자와 함께 간음한 것입니다. 그렇게 버림당한 여자도 아직 남편이 있기에 그런 여자에게 장가 드는 남자도 그녀와 함께 간음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인장을 가졌다는 권세를 악용해서 채무자의 차용금액을 대폭 줄여주었습니다. 채무자들의 인기를 사서 그들로 친구 삼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율법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악용하여 유대 남성들에게 마음대로 이혼해도 된다고 허락해주었습니다. 자연히 자기들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 높아지고 그 대가도 받게 된 것입니다. 청지기나 바리새인이나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자기 거처를 화려하게 꾸미려고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돈이 아니라 주인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말입니다.

 

그들이 사람들 사이에 높임을 받고 있는 동안에 유대인과 식사교제 금지를 당한 세리와 죄인들의 가슴에는 정상 인간 축에도 들 수 없다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심어주었습니다. 거기다 자유롭게 이혼증서를 발급해줌으로써 자기들 추종자들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간음은 그 현장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만큼 엄청난 죄였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서 함께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 꼴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깨우쳐주려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지금 도리어 비웃고 있습니다.

 

당시로 따지면 인간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웠던 바리새인들의 영적 수준이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모습이 많은 교회들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으니 인간의 영적 실상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모두의 죄 값을 지고 죽으시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이천년 전 골고다의 예수님의 처형 현장으로 돌아간다면 일반종교처럼 인간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거나 인간이 자기 의지로 십자가 구원을 선택할 수 있다고 과연 주장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하는가?

 

제가 인터넷 사역을 한지 근 이십여 년이 되어갑니다. 그 동안 성경과 신앙에 대한 상담을 수도 없이 받았지만 본문과 맥락이 같은 질문이 가장 많았습니다.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 적용하거나 원래 의미하는 바와 달리 확대해석해서 신앙생활을 도덕적으로 완전한 성자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래서 조금만 윤리적 종교적으로 잘못하면 큰 죄가 되고 하나님께 벌을 받지는 않는지 두려워했습니다.

 

신자들은 목사에게서 배운 대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많은 목사님들이 죄송하지만 성경해석과 적용을 지금 바리새인들과 비슷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의도는 바리새인들처럼 선합니다. 신자들로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거룩하게 자라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 말씀의 도덕적 종교적인 뜻보다 그 배후에 있는 그분의 심정을 정확히 헤아려서 신자들의 마음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살아 역사하는 십자가 복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도덕과 종교 규정으로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며 그럴 수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이고 이제 곧 십자가 복음의 때로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은 한 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확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정한 정신은 그대로 살아있으니 그대로 실천하되 문자적으로는 해석 적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의 정신은 당신의 십자가 복음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골고다 십자가에 그대로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 뜻은 누차 강조하는 대로 죄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미워하되 죄인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이 당신께서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듯이 우리를 여전히 심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우리 모두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스스로 옳다하는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이 율법규정대로 사람들을 정죄 심판하려면 이 땅에 살아남을 자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도무지 자기 죄를 씻을 길이 없음을 깨달아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는 용서하여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여줍니다. 그리고 성령을 내주시켜서 진리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기도로 회개 각성하게 해서 날로 거룩해지도록 당신께서 보호 인도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베풀어지기 전에는 모든 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위치에 서있었습니다. 모든 이가 사형수이고 신자는 그 형을 사면 받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끼리 특별히 신자가 불신자들이나 동료 성도들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는 꼴입니다. 자기는 더 나은 사형수이니까 더 나쁜 사형수는 비방 멸시해도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자기가 우월하니까, 그것도 자기가 정한 잣대에 따라 판단해놓고 예수님과는 정반대로 죽기까지 다른 사람의 죄보다는 그 사람을 더 미워하겠다고 덤빕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심정을 더 쉽게 이해하려면 부모님의 심정으로 대체하면 됩니다. 자식이 잘못을 범했다고 해서 미워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심지어 살인죄를 지어도 그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고 더 애처롭게 여깁니다. 회개하여 새 사람으로 바뀌도록 끝까지 간절히 기도해줍니다. 예수님이 탕자인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말씀을 맡아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가르칠 제자들더러 바로 그런 아비의 심정으로 백성들을 아들 대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모든 인간관계에서 성육신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진심으로 낫게 여기고 그대로 대하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남의 눈의 티끌보다 자기 눈의 들보부터 먼저 보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 영적으로 조금이라도 우월하다고 여겨지고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우습게 보이면 예수님이 유일하게 저주한 바리새인의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가 본문에서 배울 바는 간단합니다. 교인들이 특별히 목사가 돈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필연적으로 차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의 비방에 전혀 개의치 않고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컨대 가장 말썽 많은 동성애자도 사랑할 수, 최소한 다가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겐 하나님이 주인으로 거하고 계시는데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닙니까?

 

(4/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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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눅16:8,9) 친구들 덕분에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master 2021-04-05 71
69 (눅16:1-8) 매일 아침 신자가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 master 2021-04-05 62
68 (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master 2021-04-05 39
67 (눅15:31,32) 인간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은? master 2021-04-05 73
66 (눅15:25-30) 최후의 도피성마저 무너뜨린 바리새인들 master 2021-03-02 40
65 (눅15:22-24)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할 세 가지 축복 master 2021-03-02 414
64 (눅15:20,21) 믿음의 본질은 뻔뻔함이다. master 2021-03-02 127
63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master 2021-03-02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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