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돌아온 탕자 시리즈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7,10,32)

 

세 비유의 동일한 결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어기고 세리와 죄인과 식사교제를 한다고 비난하자 잃어버린 양과 동전과 두 아들에 관한 세 비유로 변증했습니다. 동일한 주제로 세 번이나 비유했다는 것은 주님이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강조하신 이유와 의미를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해보려 합니다.

 

거의 모든 비유에서 그러하듯이 예수님은 세 비유를 먼저 말한 후에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각각의 마지막 결론이므로 신자라면 반드시 깨달아서 자신의 삶에 반영해야 할 말씀입니다. 세 결론이 동일하게 강조하는 사항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잔치를 벌일 정도로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우리도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하늘에서 내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교리를 잘 깨달아서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을 가상하다고 여겨주신 것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은 조금 부족한 번역입니다. 원어의 의미는 이전의 잘못과 죄들을 스스로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마음이 완전히 정반대로 새롭게 바뀌는 회심입니다.

 

그리고 마음 전체가 다 바뀌는 것이니까 스스로는 결코 행할 수 없고 성령이 간섭해주어야만 가능합니다. 비유에서도 길 잃은 양이 스스로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집안 구석에 떨어진 동전에 눈과 발이 달린 것이 아닙니다. 셋째 비유의 두 아들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방 족속에게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굶어죽게 되자 아버지의 집에서 종이라도 되어서 목숨만 건지자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자 돌아온 것이지 스스로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철저히 반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큰 흉년이 들고 사람대우도 받지 못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었고 그전에 유산을 미리 챙겨서 외국으로 이민가게 된 것도 그분의 궁극적이고 선한 뜻에 따른 섭리였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아버지를 잘 섬기고 있던 맏아들의 영적 실상은 더 비참했습니다. 자기는 동생과 전혀 다른 의인이기에 창기와 놀아난 악인과는 상종조차하기 싫다고 버텼습니다. 큰 흉년에서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만으로 기뻐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송아지 한 마리라도 잡아줘선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둘째 아들에게 돼지 사료도 주지 않은 이유는 너무 큰 흉년이라 자기들부터 먹고 살아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무 고난도 없고 넉넉한 아버지 소유가 전부 자기 것임에도 그랬으니 이방인보다 더 나빴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을 터트리는 것으로 비유가 끝났기에 이 큰 아들만 유일하게 근본 마음이 바뀌는 회심은커녕 스스로 자기 의지로 행하는 도덕적 회개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의 전적인 희생과 수고가 먼저 있었기에 회심이 가능했습니다. 목자는 자신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맹수의 습격으로 생명을 잃을 수 있음에도 밤늦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었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도 여인이 집안의 모든 가구를 들어내고 먼지까지 다 쓸어내어서야 찾아내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도 유산을 미리 나눠줄 때부터 아버지는 그의 성격 기질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이민 생활에 실패하고 큰 고생을 하리라 예상했습니다. 부모가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에게 제일 먼저 물어보는 말이 무엇입니까?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아닙니까? 부모에겐 자식이 밥도 제 때에 못 먹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타국에서 가족 없이 쓸쓸이 혼자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멸시와 차별을 당하므로 정서적으로 큰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결국 큰 흉년이 들자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집에까지 못 오고 길거리에서 객사라도 하면 다시는 얼굴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로선 이 아들이 타국으로 떠날 때부터 단 하루라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회심은 아버지의 참 사랑을 알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도 항상 함께 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큰 아들이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모를 리 없는데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마땅한 일이 그에게만 가장 못마땅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평소에 아버지가 삶으로나 말씀으로나 인성과 신앙 교육을 철저히 시켰을 텐데도 오히려 그 마음은 돌같이 굳어지고 끝까지 진정한 회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겐 맏아들이 둘째보다 오히려 더 큰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이제 나타난 새로운 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의 유전을 어기고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세리와 이방인인 죄인과 식사교제를 한다고 비방한 것보다 더 심합니다. 같은 민족이라도 자기들이 정한 규칙을 아무리 사소해도 하나라도 어기면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7-20)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니까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그 본성 자체가 썩을 대로 썩은 탕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두 아들을 차별하지 않았던 본문의 아버지처럼 똑같이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리시어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속에서 죄가 나온다면 성령이 간섭하여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주지 않으면 그 죄는 없어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풀어서 설명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헬라 원어로는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 ‘데’가 있습니다. 영어성경에 But now로 번역되었듯이 이전과는 정반대로 달라진 일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전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과 무엇을 반대로 대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므로 그전까지 있던 인간의 의와 비교한 것입니다.

 

바로 앞 20절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도 진노의 심판 아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합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율법을 준행하여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결코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문맥에선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수여하신 율법을 말하지만 확대 해석하면 인간 사회에서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관습, 제도, 법률, 철학, 사상, 도덕, 윤리, 종교 등을 아무리 충실히 이행해도 결코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고 죄에 찌들어 있기에 인간이 고안한 모든 규율들이 불완전하며 상대적인데다 그마저도 온전히 지키지 못합니다. 가장 간단한 예로 아직도 여성을 차별대우하고 있는 사회가 많은데 그것을 오히려 아주 의롭다고 믿습니다. 한마디로 인간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 인간다운 의로움에 전혀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겪고 있고 탈출하고 싶은 모든 죄악과 고통과 문제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인간들은 전혀 모릅니다. 예수님 말씀을 빌리면 모두가 자기는 깨끗한데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다고 생각하기에 그것들만 막으면 얼마든지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추악해서 그 속에서 죄가 나온다는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생각지도 못합니다.

 

새로운 의의 역할

 

새로운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전의 인간의 모든 의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실현된 하나님의 의만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의이므로 당연히 더 이상 실패하지 않고 단 한 번에 완성되는 의가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 목적 중의 하나도 지금껏 스스로 열심히 시행했던 모든 인간적 구원 노력이 실패였음을 알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이 새로 나타난 의는 인간이 노력해서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당신께서 선물로 주시는 그분의 의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대적 거역하자 곧바로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죄책감이 엄습해서 스스로 이겨보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아서 자꾸만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하나님이 다 아시고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의 죄를 용서해주고 또 평생을 당신의 품 안에서 다시 보호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증으로 하나님이 손수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분의 십자가 긍휼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순전하고 완전한 의의 옷으로 갈아입혀주십니다. 인간의 실상은 그 마음부터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대신 감당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로 덧입은 당신의 택한 신자를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님처럼 바라봐주십니다. 비유에서 아버지가 둘째 아들의 잘못이 아무리 컸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아들로 대우해주었듯이 말입니다. 인간이 만든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사상 철학 윤리 법률 종교 등으로 사람의 점수를 매기는 법은 하나님에겐 아예 없습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은 착해서 하나님의 의에 합격했지만 세리와 죄인은 악해서 절대로 그 의에 합격하지 못한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의로 세리와 죄인들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회적 행동의 표면적 모습만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취급을 받았던 세리와 죄인들은 인간 사회에선 잃어버린 양이었으나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교제를 나눔으로써 다시 찾은 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비로소 이 땅에 실현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사회의 의인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며 당신의 의로 계속 초대했으나 아직도 인간의 의만 붙들고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착한 자가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인간이 봐도 옳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스스로 노력하여 의로워질 수만 있다면 그렇습니다. 그럼 또 그들이 세리와 죄인과 교제를 하지 않는 것도 당연히 옳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워질 수 없다면 세리와 이방인과의 식사교제를 금지하는 것만큼 불의한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구원의 진리를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는 숨기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의 계시를 받는 자(세리와 죄인)만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많이 받은 민족이 없는데도 인간적인 의에만 묶여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일차적으로는 너무나 복잡하고 많은 유대교의 세부 규정들이 백성들에게 어렵고 무거운 멍에라는 뜻입니다. 다시 확대해서 적용하면 인간 세상의 모든 도덕률과 종교적 계명으로는 아무래도 구원을 얻지 못하니까 인간에게 오히려 수고와 짐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비로소 마음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유

 

비유의 마지막 결론처럼 예수님은 공사역 내내 세리와 죄인과의 교제를 크게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행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인간 세상에선 누리지 못하는, 아니 아예 누릴 수도 없는 그런 기쁨으로 주님과 교제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아담이 하나님의 가죽 옷을 평생 입고 있었듯이 하나님의 기쁨 안에 거하고 있기에 그분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서 저의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영적인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그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의롭게 대하며 비난 받을만한 죄라고는 짓지 않았으므로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교회를 출석하고 예수님에 관한 설교말씀을 듣기 시작하자 저라는 존재의 진짜 실체도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모든 이에게 잘 대해준 이유는 나는 너희들과는 차원이 다르고 고상하기에 내 이름에 먹칠당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의도였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세리와 죄인들과 밥도 한 끼 나누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갈 수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저의 의로움은 오직 남들 앞에서 나를 높이려는 치사하고 교묘한 가면이요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교만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고 도리어 스스로 잘했다고 여겼던 부분에도 사실은 예수님 말씀대로 너무나 부패한 탐욕과 음란과 거짓이 섞여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것들이 제 모든 사고와 행동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당장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철두철미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 자신이 사실이 아주 부끄럽긴 했지만 괴롭거나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구원 은혜를 깨달은 것 자체가 훨씬 더 기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저의 영적인 실체를 끝까지 몰랐다면 어떠했을까 가정해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실패요 죽음이라는 것이 실감났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봉사였다가 개안수술로 곧바로 모든 주변 사물과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오직 내 중심이었던 이전과는 정반대로 주님의 관점으로 범사를 분별 판단하여 전과 다르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 제 인생의 방향과 목적이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나를 높여서 자랑하려고 소유, 권력, 지성, 명예 만 추구하는 삶에서 나는 어떻게 되든 정말로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기꺼이 결단하였고 지금껏 미약한 모습이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제가 천하의 죄인임을 알게 된 것도 기뻤고 그래서 주님만 의지해야 했고 또 그럼으로써 넘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기에 더욱 기뻤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는 지난 세월이 분명히 허랑방탕했었지만 하나님이나 저에겐 하나도 실패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더니 그간의 모든 실패, 절망, 잘못, 허울, 고난, 심지어 죄악까지도 지금 행하고 있는 주님을 위하는 사역에 빠짐없이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어서 너무 오묘했고 더더욱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엎질러진 물 같은 인생을 불순물만 거르고 다시 병에 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엎질러진 물조차 인간적 의만 추구하던 동안에는 몰랐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기뻐하여서 미리 다 부어주신 거룩하고 능력 있는 생명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의와 다른 완전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의가 변경 포기 된다면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자신이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분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를 믿고도 자기를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여전히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또 그렇기 때문에 때로 잘못을 범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반드시 선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어낼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확신이 구원으로 하나님께 받는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한 마리의 양을 되찾았다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양에게 당신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함께 해서 영육 간에 당신의 선하신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이고 신자도 그 복을 누리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기뻐할 것을 미리 아시고, 정확히 말해 반드시 당신께서 기쁜 인생으로 바꿔주실 것이므로 죄인 한 사람이라도 당신께 돌아오면 크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기 전부를 다 내주어도 너무나 신나고 기쁘듯이 말입니다.

 

예수 믿고도 전혀 기쁘지 않는 신자들

 

문제는 그런데도 자신에게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의가 실현되었음을 아직도 모르는 신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하고 노력하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해질 수 있다고 오해합니다. 죄인이라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구원을 자신이 믿기로 결단하여서 취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최근에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신자 본인에겐 구원이 전혀 확정적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삶과 인생에 기쁨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하나 잘못하면 구원이 취소될까 전전긍긍합니다. 잘못된 행동들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그 잘못들을 회개하여 신자가 되었으니 다시 한두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또 다시 구원 받지 못하는 죄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몽땅 실패했었고 인간에게 무거운 멍에만 되었던 율법적 종교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꼴입니다.

 

심지어 교리적 가르침 안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사상 철학 도덕 종교들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끈질긴 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기독교적 진리인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실체가 아니고 영적인 실체가 따로 있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찬양 예배 기도 말씀 봉사 전도하는 것만이 인생에 유일한 가치가 있고 영적인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세상은 썩어 없어질 너무나 악한 것이기에 전혀 관심도 가지지 말아야 하고 오직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께서 택하여서 구원할 자를 바로 천국으로 데리고 가든지 죽기 직전에 구원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구태여 번거롭지도 않고 신자도 곧바로 궁극적인 기쁨에 들어가니까 시쳇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 아닙니까?

 

하나님이 창조 때에 모든 인간에게 최초로 주신 그 명령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타락 이후에는 신자만이 맡을 수 있는 소명이 되었습니다. 현실적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실히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가장 신령하고 경건하며 영적인 인생입니다. 또 그러면 정말로 인간 사회가 절대로 줄 수 없는 하늘로부터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신앙생활은 간단히 말해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고 아담이 이브를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부부 둘 뿐이었으나 그 후로는 모든 이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주면서 서로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이 행하셨듯이 세상 누구와도 그래야 하고 특별히 인간 세상에서 인간적인 의로 배척 격리 소외된 자들을 먼저 찾아가서 주님의 기쁨으로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모든 신자에게 당신이 이 땅에서 감당했던 목자의 역할을 이어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자가 그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면 세 비유에서 목자, 여인, 아버지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벌이며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주체가 됩니다. 실제로 신자가 오랜 기간 수고 희생하며 전도하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어서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 찬송 말씀 공부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목사니까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도 얼마든지 이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세 비유를 특별히 탕자의 비유를 지난 잘못들을 회개해야한다는 정도로 알고 그쳐선 예수님의 계시를 수박의 겉도 핥지 않는 꼴입니다. 두 아들 다 탕자였으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서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여부로 각기 전혀 다른 인생이 되었다는 것이 최종 결론입니다.

 

결국 신자는 두 부류로만 나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도 아직도 조금만 잘못하면 수치심과 두려움과 죄책감에 묶이는 초보적인 신자와, 예수님이 나를 택하시어 구원을 선물로 주셨기에 이제는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큰 기쁨에 동참하는 성숙한 신자입니다. 아직도 고난만 닥치면 겉으로 믿음이 강한 척 평온을 가장하느냐, 이제는 환난 중에도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3/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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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눅15:22-24)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할 세 가지 축복 master 2021-03-02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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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master 2021-03-02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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