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6:1-8) 매일 아침 신자가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 

돌아온 탕자 시리즈 (1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1-8)

 

너무 난해한 비유

 

본문은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그 장소에서 그와 같거나 유사한 주제에 관해 부연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4절에 가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본문 말씀을 바리새인들이 옆에서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에 대해 16:14-31절까지 바리새인들에게 변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17:1-10까지 바리새인에게 견책한 말씀을 보충해서 다시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결국 본문부터17:10까지는 돌아온 탕자 시리즈의 2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먼저 가르친 내용을 제자들에게 보충해서 다시 설명해주는 패턴을 두 번 반복했습니다. 율법의 외적 형식에 묶인 유대교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해주는 기독교의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시작하여 13절에서 끝나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아주 난해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청지기가 행한 일은 비난 받아 마땅한 죄인데도 예수님이 오히려 칭찬을 하는 것 같으니 혼돈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어서 기본적인 도덕성과 영성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은 후에 맨 처음 판단되는 의미가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당연히 부족하거나 잘못된 해석입니다. 어리석은 우리가 보기에도 분명히 잘못된 일을 예수님이 칭찬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혼란이 생기는 첫째 원인은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비유 자체는 비교적 정확히 해석하더라도 앞뒤 문맥의 흐름과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도 없이 강조하지만 성경의 장절구분은 훨씬 후대에 생긴 것이므로 성경은 반드시 죽 연결해서 의미를 따져야 합니다.

 

흔히들 16장은 재물의 사용과 관리에 관한 교훈을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1-13절)를 이어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을 경계할 것(14-18절)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9-31절)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앞선 15장의 세 비유와 무관하다고 봅니다. 재물 관리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 해석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앞에서 하신 말씀을 추가로 설명하고 있기에 이 비유의 주제도 사실은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부재지주와 청지기

 

앞선 세 비유와 마찬가지로 비유 자체와 그에 대한 교훈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했다는 8절 전반까지는 비유이고, 8절 후반에서 13절까지는 예수님이 비유를 풀어서 가르치신 교훈입니다. 먼저 비유의 의미부터 살펴봅시다.

 

당시에는 자기 재산을 믿을만한 청지기에게 관리를 맡겨 놓고 타지에서 살고 있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함께 살더라도 자기 재산의 일부 혹은 전부를 청지기가 임의로 투자하고 장사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청지기는 지금으로 치면 주인의 인감도장까지 받아있기에 자신이 주인의 명의로 증서나 수표를 발행하고 투자목적으로 돈과 재산을 처분할 수도 있었습니다.

 

재산을 잘 관리하고 증식시키는 정직하고 성실한 청지기는 주인의 신임을 더욱 얻어서 급여가 올라가거나 일부 상속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거나 주인에게 불만이 생기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놓는 꼴이 될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주인도 재테크에 밝아서 부자가 된 것입니다. 당시의 이자율이 얼마이며 사업별로 수익률이 얼마쯤이라는 것을 익히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돈을 착복하여 자기에게 돌아오는 수입이 줄기시작하면 주인은 곧바로 조사해보면 됩니다.

 

청지기가 흥청망청 돈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주인 돈을 함부로 낭비한다고 금방 수군댑니다. 거기다 인간은 참으로 복잡하고 치사하며 부패한 존재입니다. 그 돈으로 함께 즐겨놓고도 돈의 위력 때문에 앞에선 굽실거리지만 뒤에선 아주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다닙니다. 주인은 믿었던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한다는 나쁜 소문을 들었습니다.

 

청지기를 불러서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2절)고 통보했습니다. 단순히 왜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지 그 경위를 해명해보라는 뜻이 아니라 왜 그런 잘못을 했느냐고 강하게 질책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고 즉, 그동안 관리하던 모든 재산을 정확히 계산해서 빨리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청지기직에서 해고한다고 통보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자신의 부정을 모를 줄 알고 자기 돈인 양 신나게 사용하다가 갑자기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껏 숫자에 밝아서 재산관리만 해봤지 다른 기술은 없고 막노동은 더더욱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서 이전 차용증서는 없애버리고 금액을 훨씬 낮춰서 새 증서를 써주기로 했습니다. 주인의 도장을 맡아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차용증서는 두 부를 작성해서 채권자와 채무자가 각기 한부씩 보관하는 법입니다. 청지기에 완전히 일임했으므로 원본도 청지기가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원본을 주인이 갖고 있다 쳐도 자신의 인장이 찍혀있으니 법적으로 하자가 없습니다. 소송을 걸어도 청지기에게 인감을 맡긴 주인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승산이 적습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a)라고 말하는 것으로 비유는 끝이 납니다. 분명히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표현했으니 주인이나 예수님이 그의 사람 됨됨이를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지혜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혜 있다는 원어도 도덕적 판단이 개입되지 않고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세밀하게, 기술적으로 능숙하게 등의 의미입니다.

 

만약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다 챙겨서 도망갔다면 잡혀서 처형당하거나 평생을 아무 일도 못하고 숨어서 살아야 합니다. 청지기는 굶어죽을 수 없어서 시쳇말로 자기 앞가림을 잘한 것입니다. 채무자들에게 이익을 보게 해주었기에 그들과 이익금을 나눠먹으면 당장 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 않았다 해도 나중에 궁핍해지면 그들에게 신세를 질 수 있겠다고 계산한 것입니다.

 

요컨대 비유에서 주인이 그를 좋게 평가한 것이 아니고 영악하게 일신상의 안전을 잘 확보했다는 뜻이었을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도덕적 판단의 사례로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인간사회에 흔히 일어나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한 것뿐입니다.

 

예수님 칭찬의 의미는?

 

잘 살펴보아야 할 사항은 예수님이 비유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기 시작한 8절 후반부터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절b) 고 했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자기 시대에 지혜롭게 행하나 빛의 아들들은 자기 시대에 지혜롭게 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 제시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 땅에서의 현실적인 삶을 영리하게 처리하느냐 못하느냐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눴습니다.

 

이 세대는 어떤 세대입니까? 비유 자체에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습니다. 주인을 빼고는 청지기와 채무자들 모두가 부정행위에 공모 동참했습니다. 돈의 위세와 매력에 눌려서 도덕적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이 세대는 돈이 지배하는 세대이고 그 아들들은 그런 세대에서 출세 형통하려고 자기 인생을 돈으로만 꾸려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아들들은 당연히 그와 정반대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주면서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을 보십시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절) 세상은 돈이 다스리므로 돈을 주인으로 삼아 돈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 세상에서 살긴 하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을 대비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은 돈이 주관한다고 믿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돈을 능숙하게 잘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여서 열심히 모으려는, 더 실감나게 말해서 돈 독이 오른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서 비유의 의미와 예수님이 내린 결론에 대한 오해는 완전히 풀렸을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이고 빛의 아들들은 그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참된 신자라면 돈이 지배하는 이 세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밖에 없기에 필연적으로 불신자보다 현실적으로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한국의 한 공기업에서 많은 직원들이 담합하여 불법적으로 투기하여 일확천금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자라면 그런 일에 결코 참여할 수 없으니 금전적 손해뿐 아니라 회사에서 왕따를 당하는 등 이래저래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두 종류의 아들들

 

이렇게 비유의 의미를 따져가다 보니까 뭔가 앞의 세 비유, 특별히 마지막 두 아들의 비유와 유사하거나 연결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비유의 결론에 상호 대조되는 두 부류의 아들들을 우연히 등장시켰을 리는 만무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의 대표 격인 불의한 청지기의 상황이 뭔가 두 아들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청지기는 주인에게서 재산과 인장을 받아서 임의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아버지 재산을 미리 받았고 맏아들은 아버지의 것이 전부 자기의 것이었습니다. 정직한 청지기가 되어서 재산을 잘 보존 증식시키느냐 아니면 이 비유의 불의한 청지기처럼 되어서 재산을 횡령하여 날리느냐는 것은 두 아들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청지기는 해고를 당하자 자기가 살려고 궁여지책으로 부정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계획대로 자기는 살았으나 그 인장은 빼앗기고 청지기 직분에서 쫓겨났습니다. 둘째 아들도 자기가 맡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고 죽을 지경이 되자 목숨만 부지하겠다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쨌든 아버지만이 자기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고 여긴 아들이 건강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너무 기뻐서 자신의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을 온전히 체험한 아들도 진정한 회개를 했습니다. 청지기도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만 살려하지 않고 만약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남아 있는 재산에 더 이상 손대지 않고 그대로 돌려주었다면 주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진정으로 뉘우친 모습이 확실하다면 잠시 근신하게 한 후에 다시 청지기로 세워주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의 맏아들도 이 불의한 청지기에 해당됩니다. 아버지의 것은 전부 자기 것이고 아버지의 뜻대로만 순종하면 얼마든지 동생보다 두 배의 가치 있는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동생이 죽었다 살아왔는데도 혹시 자기 재산이 줄어들까 염려되어 송아지 한 마리도 아꼈고 환영잔치에 참석도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완악하게 회개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도 청지기와 똑같습니다.

 

맏아들은 이 세상의 제도나 법률로만 아버지의 아들일 뿐 진정한 부자 관계는 전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선 아버지가 죽으면 어차피 그 재산과 인장을 다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의 아버지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니까 맏아들은 절대로 반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형식적 외식적 종교규정에 묶여서 하나님의 뜻은 실현하지 않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을 절대 올릴 수 없습니다.

 

비유의 주인이 청지기에게 모든 재산을 맡겼던 것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모든 선한 것을 주셨고 특별히 거룩한 율법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성전제사와 복잡한 율법규정을 만들어서 무거운 짐만 지웠습니다. 종교권력을 맘껏 휘둘러서 자기들 배를 채웠고 백성들도 돈에 눈이 어두워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따라서 세리와 죄인과는 한 끼 식사도 나누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에 적극 앞장섰습니다. 청지기의 요구대로 증서를 고침으로써 돈을 빌려준 주인을 배반한 채무자들이 바로 유대 백성들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

 

예수님은 유대교의 잘못을 지적한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제자들더러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의도는 너무나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너희는 지금 두 아들 중에 어떤 아들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이나 청지기 비유에서 돈에 묶여서 사는 이 세대의 아들은 절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재물을 정직하게 관리하고 부정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결코 아닙니다. 입이 마르도록 강조해 왔듯이 누구나 알고 있는 윤리 도덕은 교회에서 구태여 다시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비유도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실체와 인생의 궁극적 목적 의미 가치에 관해서 정확히 깨닫게 만드는 하나님만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 청지기는 그런 짓을 행하면서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공모한 채무자들까지 모두가 양심의 가책은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돈의 노예가 되어서 아니 돈이 너무 좋아서 죄인 줄 알면서도 서슴없이 그 짓을 행했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이야 말로 영리하다고 자랑하면서 말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에겐 오직 절망과 죽음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 구원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 말고는 어떤 인간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이 인간에겐 최고의 기쁨이요 소망이 됩니다. 어떤 인간적 노력으로도 불가능했던 일을 하나님이 대신 해주셨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빛으로, 죄악에서 의의 나라로 완전히 옮겨졌습니다. 그분의 아들로 받아들여졌기에 인간으로서 이만큼 최고의 축복은 없습니다.

 

청지기 비유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하는 바도 지금부터 너희는 절대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되지 말라는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대신에 너희에게 새 생명을 주어서 반드시 빛의 아들들로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곧 그런 위치 신분 특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아버지로부터 새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아서 입을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신자들

 

이제 제자들에게 던지신 주님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심각하고도 솔직하게 적용해봐야 합니다. 정말로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신자이니까 당연한 일을 왜 새삼 묻느냐고 의아해 해선 안 됩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아직도 돈이 주인인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성실하고 경건하게 행하지만 그 인생의 목적이 세상의 형통과 출세에 두는 자들입니다. 신앙양심에 찔리거나 교인이라는 체면에 걸려서 노골적으로 돈을 엄청나게 벌게 해달라고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자신의 현실적 삶을 개선시키려는 것뿐입니다. 물론 현재 당면한 문제나 고난을 해결해달라고 당연히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지만 기도하는 내용이 그것이 전부이니까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기 위해서 잘못이나 죄를 주님께 낱낱이 실토하고 고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어려운 성도나 이웃을 찾아가 섬기지도 않고 최소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지도 않습니다.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해보지 않고 자기에게 맡길 소명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싶다는 소망이 없습니다.

 

물론 신자 인생에도 자녀, 직장, 결혼, 재정, 건강, 사업 등은 아주 중요한 과제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을 자신의 소망과 계획대로 이끌어 달라고만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개입될 소지는 전혀 없고 그분은 신자의 종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그런 현실 문제만 해결하려 들면 하나님더러 내 대신 세상에 나가 돈을 벌어오라고 보채는 꼴입니다. 조금 과장하면 하나님더러도 돈을 섬기는 종이 되라는 너무나 불경한 요구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뜻을 당장에는 모르니까 자신이 소망하는 대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도의 응답은 그분의 뜻에 온전히 맡길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소망대로 응답하지 않으실지라도, 심지어 거꾸로 더 큰 문제가 생기게 하실지라도 감수할 자세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극렬한 풀무 불에 던져질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보호해주리라 믿지만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순교까지는 몰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최소한 자신의 모든 현실적 문제는 그분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가장 스캔들이 심한 기독교

 

예수님을 비방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요즘으로 치면 교회에 최고로 충성하는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대중의 인기가 예수님께 쏠리는 것을 두려워했고 율법적인 의를 앞세워서 자기들의 자존심만 세우려 들었습니다. 그들의 인생 목적은 오직 자신들을 사람들 위에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아무리 교회에 충성하더라도 세상 현실 앞에 자기를 치장하려는 시도는, 최소한 남들만큼은 살아야겠다는 것은 이 세대의 아들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있어도 마음은 세상과 세상을 지배하는 돈에 가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부연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껏 율법적인 종교왕국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두 주인을 섬겼기에 이제 당신께서 그 나라를 폐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당신께서 그에 대체해서 세우실 새 나라는 주인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고 그 종들도 당연히 그 한 분 주인만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그 나라의 지도자는커녕 백성도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더러 비유와는 정반대의 새로운 청지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들은 새 청지기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어쨌든 유대교 지도자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듣지 않고 구제와 십일조와 기도와 금식 등을 잘 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부끄럽지만 엄연한 사실로서 지금은 모든 종교 중에 기독교 안에 불의한 청지기들이 가장 많다고 세상은 평가합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돈 때문에 부정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사역이나 모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양상들도 아주 많습니다. 자기를 높이려 들면 교회 밖은 물론 교회 안에서도 도덕과 종교에 빗대어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성도들을 이를 비방 정죄하게 됩니다.

 

엄격히 말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또 아버지에게 탕자인 아들이, 나아가 불의한 청지기가 따로 없습니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신자들 모두가 수시로 그럴 수 있습니다. 돈의 위력이 너무 세어서 혹은 고난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고 다시 마음이 세상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고난을 이겨보려고 하나님이 이전에 부어주었던 축복을 회상합니다. 고난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이라고 재확인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단순히 전능하신 하나님만 묵상하면 자칫 하나님더러 다시 돈 벌게 해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또 다시 그 기도가 그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이후로도 힘들 때마다 잠시 또 돈을 주인으로 삼는 잘못에 빠집니다.

 

두 주인이 아니라 한 주인만 섬기는 길은 말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주인이 한분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몰라 그분 뜻대로 살지 않았을 때가 처절한 실패요 사망이었음을 온몸으로 절감해야 합니다. 탕자비유의 둘째 아들처럼 돈은 아무 의미 없고 오히려 절망과 죽음으로 이끌더라는 확고한 인식이 생겨야 합니다.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의미와 권능을 가지는지 정말로 실감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도 간혹 아버지와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감사함으로 그 진정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돼지 취급도 못 받았던 이전의 그 나라로 돌아갈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고난 중에는 지난 축복을 헤아리기보다 그 반대로 돈으로 인해 처절하게 실패했던 일을 떠올려야 하나님만을 붙들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됩니다.

 

우리의 영적 실상은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수시로 불의한 청지기가 되기에 내가 내 자신을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무 소망 없던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인생을 온전한 가치와 의미 있게 이끌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신자가 가장 먼저 자신에게 물어볼 질문이 오늘 하루 어떻게 주님께 헌신할 것인가 혹은 얼마나 신자답게 살 것인지가 아닙니다. 진짜로 주인이 오직 한 분 하나님이고 그분으로 만족하는지 여부입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말하는 바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이 함께 하는 신자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상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감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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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눅16:10-13) 인생을 정말로 자유롭게 살려면? master 2021-04-24 831
70 (눅16:8,9) 친구들 덕분에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master 2021-04-05 74
» (눅16:1-8) 매일 아침 신자가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 master 2021-04-05 63
68 (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master 2021-04-05 43
67 (눅15:31,32) 인간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은? master 2021-04-05 87
66 (눅15:25-30) 최후의 도피성마저 무너뜨린 바리새인들 master 2021-03-02 44
65 (눅15:22-24)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할 세 가지 축복 master 2021-03-02 434
64 (눅15:20,21) 믿음의 본질은 뻔뻔함이다. master 2021-03-02 133
63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master 2021-03-02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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