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십자가 처형의 극심한 고통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재간이 없을 것입니다. 고래로 인간이 고안한 사형 방법 중에 가장 잔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다 발가벗기어 치부를 완전히 드러내고 죽으니 수치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도 그 고통과 수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주님이 신적 권능을 사용하여 그 고통과 수치를 피한다면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주님은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죄의 삯이 처참한 사망임을 온 천하가 보고 확실히 알 수 있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부끄러움의 극치도 함께 겪어야만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자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휩싸였습니다. 그 원죄의 멍에를 벗기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죄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방도는 없습니다. 아니 골고다 언덕이 창세전부터 예비 되어 있었기에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을 묵인한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의 한 이단종파처럼 십자가에 고통과 수치가 제거된 채 달려 죽는 시늉만 해선 거짓 복음이 됩니다. 거짓으로는 어떤 선한 일도 행할 수 없으며 죄인의 구원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당신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다른 인간 사형수와 완전히 동일한 모습과 세기로 받으셨고 또 실제로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오죽 십자가의 고통을 실감했으면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기도했겠습니까?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그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다는 기록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주님은 기도가 최고조에 도달할 수 있는 모습도 부차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물었을 때에 구체적으로 기도할 내용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오히려 제자들은 물론 후대의 신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기도의 모본일 수 있습니다. 절정에 도달한 기도라면 마땅히 신자가 본받아야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신자더러 주님처럼 십자가에서 순교해야 하고 또 그 일을 두고 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기도를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고통과 수치를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베드로마저, 동일하게 겪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그 간절한 기도가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단순히 고통만 덜어달라는 간구로 그친 것이 아닐 것입니다. 틀림없이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 이 땅과 두고 가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애끓는 중보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우리 기도는 많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주님의 이 기도를 온전히 따를 자가 아무도 없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기도의 모본이 됩니다. 아니 반드시 이대로 따라야 합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의 모든 내용의 기도를 한 마디로 줄이면 어떻게 되어야만 합니까?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소서.”가 아닙니까? 주기도문의 시작도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땅에 임하시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마6:10)해달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이 두 번째에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첫째와 둘째가 동일한 내용 같지만 자세히 보면 기도를 마치는 말이 다릅니다. 본문(첫째)은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지만, 둘째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소원이 바로 자신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순종하겠다는 뜻과는 사뭇 다릅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자신의 소명에 다른 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분의 계획과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일치가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을 잊었거나 무시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너무나 극심한 고통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잠시 주춤하게 된 것이지만 그것마저 완전히 극복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기도한 내용에 대해선 저자 마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한 후에”(44절)라고 하니 그 내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마태가 세 번이나 같은 내용을 기록하기 싫어서 그랬을까요? 그보다는 주님이 십자가로 나아감에 있어서 온전한 평강과 자유를 얻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 마치는 말이 이렇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가 주시는 잔을 마시러 가겠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기도하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내 소원과 뜻을 아뢰는 데는 정말 최고입니다.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바른 기도가 되는지 전혀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능숙하고도 열정적으로 기도합니다. 정말 이 부분에서만은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새벽마다 울부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작 모든 기도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말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는 전혀 생각도 못하거나, 알아도 까먹기 일쑤입니다. 주님이 땀에 피가 섞일 정도로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 고백을 하기 위한 것이었지 않습니까? 우리는 전혀 엉뚱한 곳에 기도의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정작 꼭 기도해야 할 바는 하지 못한 셈입니다.
거기다 이는 주님의 기도로 치면 첫 번째 마침 말에 해당될 뿐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의 기도 마침 말이 있고 그 의미까지 다르다는 것은 아예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되길 제가 더 간절히 소원합니다.”와 “이제 하나님 뜻대로 행하시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일어섭니다.”는 우리의 모든 기도에서 아예 실종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겪는 고난과 문제와 상처도 아주 큽니다. 주님의 십자가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도, 나름대로 각자의 십자가는 다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에서 헤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눈물로 소원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겪는 어떤 고통 가운데도 그가 미처 모르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와 권능은 반드시 숨겨져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순종의 고백이 기도 가운데, 최소한 마치는 말로는 있어야 함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하신 둘째와 셋째 기도의 마침 말까지는 안 해도, 그럴 수만 있다면 더욱 좋지만, 됩니다. 우리 중의 대부분은 우리의 고통과 문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미리부터 알고 또 그 뜻에 기꺼이 쓰임 받으려고 기도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십자가가 당신의 소명임을 미리 알고 공사역 내내 그에 목숨을 걸고 순종해온 것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또 그래서 모든 기도를 최소한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마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땀에 피가 섞일 정도로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이 고백으로 기도를 마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기도를 마치지 않았다면 사실상 기도다운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는, 엄밀히 말해서 주님의 기도의 모본을 1/3도 못 따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7/4/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