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31-32 신자의 재혼에 관하여

조회 수 4913 추천 수 0 2017.11.11 09:55:11

신자의 재혼에 관하여

 

[질문]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1-32)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임의로 나눌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임의로 나눴다고 해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끊어진 게 아니며 계속 하나님 언약아래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는 것은 간음죄에 해당한다고 이해했습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요? 만약에 맞다면 재혼한 기독교 친구에게 어떻게 재혼에 관한 말씀을 전해야 할까요? 이 말씀에 넘어질까 심히 염려스럽고, 또한 죄인 것을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답변]

 

예수님은 과연 재혼을 금지하는가?

 

이 질문은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는 주제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정확한 의미도 난해한데다 어떻게 해석했든 신자들의 실제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지 따져 들면 더 곤혹스러워집니다.

 

우선 질문자님께서 그 말씀에 대해 이해하신 내용은 옳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재혼을 죄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당시 사회상과, 성경의 앞뒤 문맥에서의 의미와, 산상수훈 전체, 나아가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진리와, 비교 대조해 봐야 합니다. 또 오늘날의 상황까지 감안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저로 간음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음행한 연고가 있다면 버려도 되고 또 그런 여자와 결혼해도 간음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우자의 혼외정사로 인한 이혼과 재혼은 주님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남자들은, 오늘날에도 사실은 마찬가지이지만, 여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알게 모르게 음행을 자행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이미 음행한 상황에선 음행이 합법적 이혼 재혼 사유이기에 버려진 여자들이 재혼하는 것은 하자가 없습니다. 주님이 명시적으로 말씀하지 않았지만 그 원론적 맥락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재혼을 금하는 데에 초점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은 본문만 자세히 읽으면 그보다는 남편더러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이 하나님 안에서 행한 언약이기에 온전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재혼 금지가 아니라 남자더러 성적 순결을 지키라는 의미가 더 강조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마5:3-7:27) 전체를 자세히 살피면 특정 주제를 가르칠 때마다 “너희가 ~~ 들었거나 배웠으나, 나는 ~~ 말한다.”는 패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분문도 “일렀으되 ...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간음함이니라.”라고 합니다.

 

구약의 율법이나, 그것을 해석해 가르치는 서기관과 랍비나, 율법의 세부행동지침으로 후대에 제정한 장로들의 유전이 가르치는 것에 오류 내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다시 풀어서 가르치겠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예수님 이전의 랍비들의 율법 해석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럼 모세의 이혼증서에 관한 율법의 원래 뜻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모세 이혼증서법의 정확한 뜻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신24:1,2)

 

이 계명의 해석은 아내의 “수치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달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랍비들 중, 힐렐 학파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3)라고 물었듯이, 남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허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반면에 샴마이 학파는 ‘간음’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간음은 율법에 아예 사형에 해당되는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20:10, 요8:1-11) 따라서 이 두 해석은 양 극단에 치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남편이 이혼증서를 써주어도 될 만큼 아내에게 합당하고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경우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완전한 해석이 아닙니다.

 

신명기 본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라고 합니다. “데려온 후에 발견한다.”고 합니다. 한참을 살아본 후가 아닙니다. 즉, 오래 살아본 후에야 알게 되는 아내의 성격 기질 습관 태도 등의 결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데려온 직후에 알 수 있는 수치인데 그렇다면 아내의 순결성의 하자 즉, 아내가 처녀가 아닌 것을 발견하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혼전 순결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현대와 달리 당시에 처녀가 아닌 것을 발견하고는 어느 누구도 기뻐할 리 없습니다. 또 성경은 상식적으로 뻔한 그런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자연적인 감정 반응이 아니라, “그래서 아내로 계속 데리고 살기 싫거든”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약혼(約婚)을 아예 정혼(定婚)으로 간주했습니다. 정식 부부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므로 약혼 중에 다른 이와 관계를 맺으면 간음으로 취급했습니다. 당연히 사형의 형벌을 가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수치는 아내가 자기와 약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순결을 잃은 것입니다.

 

숫처녀의 풋풋한 사랑 혹은 단순히 불장난으로 순결을 잃은 후에 어떤 사정이든 그 남자와 헤어진 경우가 됩니다. 이 규정은 그래서 그 정도라면 남자가 받아들여주는 것이 좋다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으로부터 최하 3,500년(모세오경 기록시점) 전에 하나님은 여성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했습니다.

 

참고로 마리아와 정혼(약혼)한 요셉은 동정녀 임신을 알고도 계속 데리고 살기를 기뻐했습니다.(마1:18-25) 당시 관습대로 간음으로 간주하고 사형을 가해도 되는데 천사의 계시를 받고는 정식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여기서말하는 수치가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이가 인정할만한 객관적이고 타당하며 결정적인 다른 하자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결정적 흠결을 미리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경우말입니다. 수치가 정확히 어느 것을 말하는지 어느 누구도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명기 20:13-21에서 혼전 순결에 관해서 자세히 말하고 있고 또 데리고 온 후에 수치는 혼전에 순결 상실을 뜻할 확률이 높습니다.. 

 

수치를 가지고도 결혼한 여자는 남편을 속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어떤 사정이 되었든 장차 결혼할 남편을 위해서 지켜야 할 순결을 스스로 버린 것이므로 예수님 말씀대로 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남편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버려도 됩니다. 오늘날의 가족법 규정이 이혼사유로 인정하는지는 몰라도 지금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의 결정적 하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모세의 이혼증서 율법에 숨겨진 하나님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남편에게 순결이나 하자 없음을 가장하고 결혼한 여자의 잘못이 크긴 해도, 어쨌든 철없었을 때 혹은 젊은 열정으로 저지른 한 번의 실수이기에 같이 데리고 사는 것이 좋으나, 그럴 마음이 없다면 재혼을 보장해주라는 것입니다. 원래 규정인 이 모세 율법이 재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혼을 장려(?)하는 규정인 셈이므로, 그 규정을 풀어 설명하는 예수님 말씀도 재혼 금지에 방점이 찍히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무엇보다 결정적 사유가 아니면 이혼증서를 함부로 발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후부(後夫)가 다시 버리면?

 

“그 후부(後夫)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보낸 전부(前夫)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신24:3,4)

 

율법의 그 다음 규정이 조금 애매합니다. 그 후부도 미워해서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수치 있는 여자와 결혼 했을 때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했을 텐데 그럼 싫어지는 또 다른 일반적 허물을 발견한 것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누구도 확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 수치를 용납하고 결혼하려 했으나 자꾸 처녀 때에 순결을 잃은 일이 거슬리면 버려도 된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아내로서의 결정적 결격사유일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그녀와 결혼 했었던 “전부들은 그녀와 다시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 이 후반부 규정의 초점입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수치가 있었던 여자이지만 데리고 살았다 버렸다가, 다시 또 데리고 사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자의 인격을 존중 해주어야 할 뿐 아니라, 여자를 단순히 성적 노리개나 집안의 종 취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의미는 남자나 여자나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성한 언약이니까 서로 성적으로 순결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또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은 인간으로서 첫째가는 소명의 실현이므로 이혼에 이르게 되는 경솔한 언행을 결코 섣불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아내의 인격이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말과 행동, 부부 싸움을 하면서 이혼하자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 본문의 뜻과 그에 담긴 하나님의 율법을 제정하신 기본 정신은 무시하고 예수님 당시에는 남편이 아내가 조금만 마음에 안 차면 형식적인 증서 하나 달랑 써주고서 이혼하거나 아예 그냥 말로서 내쫓았습니다. 또 그 아내가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와 동거하거나, 남의 집의 종으로 일하고 있는데도 다시 빼앗아 오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남자의 일방적 독선적 횡포가 너무 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율법을 잘못해석한 당시의 힐렐파 랍비 가르침대로 따르지 말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또 모세의 이혼 증서의 근본 목적은 부부사이에 성적 순결을 절대로 지키라는 뜻이라고 율법의 정신을, 특별히 간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정확히 풀어서 가르친 것입니다.

 

간음의 새로운 정의(定意)

 

다시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신명기 모세 율법은 결혼 전 음행한 아내는 이혼증서를 써주고 버려도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음행 외에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아내가 간음했으면 사형입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다시 할 리는 없습니다. 간음이 아니고 단순히 성격 태도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배우자가 음행이 없을 때만 결혼의 언약관계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2b) 예수님 가르침의 마지막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당연히 버린 여자는 전부와 결혼관계가 유효하므로 새롭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한 것입니다. 그 후부는 레위기 규정을 따르면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 상황은 어떠합니까? 음행하지 않았는데도 순전히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조금만 잘못하면 모세 증서만 주고 버렸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이 성립 안 되니 당연히 증서도 줄 수 없고, 원래 신명기의 뜻도 그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그 신명기 규정에서 “그를 미워하여”라는 말만을, 원래는 버려진 아내와 결혼한 후부(後夫)에게 해당되는 수식어인데도, 완전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의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이런 당시의 현실적 상황을 예수님 말씀에 정확히 대입하면 어떻게 됩니까? 알게 모르게 음행하고서도 아내를 버린 남편, 재혼한 버려진 아내, 그 버려진 아내와 결혼하는 후부 모두가 간음입니다. 그럼 모두가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유대에 성한 가정이라곤 아예 없어질 판입니다. 이런 현실적 사정을 주님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살펴봐도 이 말씀은 단순히 재혼이 죄가 되기에 금하는 뜻이 아닙니다.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한마디 말로 대변되듯이 예수님 뜻은 부부 관계를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간주하여 부부가 공히 그 신성함, 순결함, 신실함을 끝까지 유지하라는 뜻이 됩니다.

 

나아가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앞에서 간음에 관해 새로운 정의(定意)를 내렸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산상수훈 고유의 패턴으로 간음에 대해 새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으로는 간음치 말라는 규정만 있기에 지금껏 너희들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혼외정사만 간음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단순히 예쁜 여자를 보고 잠시 마음이 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보려는 욕심까지 품는 것은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간음의 범위를 아주 넓히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버려진 아내가 재혼하거나, 다른 남자가 그 아내와 결혼하는 것까지 간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본문 말씀은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아내를 아무 것이나 꼬투리 잡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차적이 뜻입니다. 나아가 간음이라는 죄에 대해서 다시 심각하게 생각해보라는 이차적인 뜻이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 남자들은 모세 증서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아내들을 함부로 버리고 또 그 여자와 재혼함으로써 주님 말씀대로 모든 당사자들이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그 전에 남자들은 알게 모르게 행동으로는 물론 마음으로 간음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럼 어떤 결과에 이릅니까?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죄에서 자유로울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

 

동일한 맥락에서 주님은 말로 형제를 바보라고 욕하는 자도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마5:22) 주님은 죄의 범위를 말로 짓는 죄, 생각으로 짓는 죄에까지 확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옥불의 진노 아래에 있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결국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하라고 배웠으나 나는 ~~하라고 말한다.”는 패턴의 산상수훈 모든 가르침은 “율법을 은혜로 대체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율법 규정대로 문자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배웠으나, 나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에 합격할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당신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처음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마5:2)라고 선언한 후에 가르침을 이어간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단순히 도덕적 관점에서만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죄의 본질이 얼마나 심각하고 광범위하며 그 죄로 타락해있는 인간의 상태 또한 얼마나 비참한지 정확히 알라는 것입니다.

 

결혼했으면 함부로 이혼하면 안 되는 것은 신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율법과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결혼의 의미를 다시 정확히 파악하고 부부관계를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주님이 교회에 하듯이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교회가 주께 하듯이 순복해야 합니다.

 

답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질문자님은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임의로 나눠도 계속 하나님 언약아래 있고 그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는 것은 간음죄에 해당한다.”고 이해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1,32 본문의 뜻으로는 정확합니다.

 

그러나 상기에 설명한 대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당시 상황은 물론 그 배경에 숨겨진 더 깊고도 일관된 뜻에 따라서 적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기독교 친구라고 해도 재혼을 죄라고 정죄해선 안 됩니다. 가장 먼저 재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친구만의 특유한 사정부터 이해해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사실상 간음과 살인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의 입장에서 서로를 위로 격려 권면해야 합니다. 이미 재혼한 새 가정과 그 구성원들로 정말로 더 깊고도 풍성한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에 맞게 아름답고도 거룩한 가정과 부부관계로 형성 유지할 수 있을지 최선을 다해 섬기고 함께 도와주어야 합니다.

 

만약에 문자적으로만 이 가르침을 적용하여 재혼이 죄라고 정죄한다고 해도 그 결혼을 종식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혼만 하고 재혼을 하지 않거나 하기 직전이라면 주님의 이 깊은 가르침을 서로 나눌 수는, 강요는 못한다는 뜻임, 있겠지만 말입니다. 만약 이왕의 재혼을 또 다시 파기하면 간음죄를 이중적으로 범하게 되는 결과가 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질문자님께서 이 말씀에 넘어질까 심히 염려스러워 할 필요도 없고 또한 죄인 것을 죄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그런 성격의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매일 간음과 살인죄를 범하고 있는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아니 그 은혜가 없으면 한 시도 바로 설 수 없음부터 절감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주님 말씀을 다른 이에게 적용하기에 앞서 자기부터 그 말씀으로 매일 스스로 깨끗케 하고 오직 주님 가시는 길을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11/5/2017

 


요셉_

2022.04.25 03:58:09
*.36.149.1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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