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예수님을 왜 버리셨는가? 

2017 종려주일 설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27:45-50)

 

 

이 땅에 미련을 못 버린(?) 예수

 

네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 일곱 번의 말씀을 하셨다. 본문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46절)는 네 번째로 하신 말씀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말씀을 하신 직후에 영혼이 떠나가셨다고 하니(50절)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공용어인 아람어로 하신 말씀인데 그 뜻은 본문의 설명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이 말씀을 접하는 신자들은 조금 실망되고 혼란스럽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주님은 어차피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다. 당신의 권능으로 스스로 무덤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인간 사형수로 예수를 믿어 개종한 자 중에도 이 땅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곧 대면할 것을 기대하며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는 신자가 있다. 그런데 주님은 마치 이 땅에 미련을 못내 버리지 못한 것 같지 않는가?

 

그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처형을 피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감내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순순히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오셨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는 것인가? 아무리 십자가 처형의 육신적 고통이 극심해도 인류 구원의 사역을 마지막 순간에 거부 내지 주저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지닌다.

 

예수님은 대체 왜 이런 탄식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정말로 당신의 독생자를 버리셨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단순히 예수님도 인간인지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해석하면 너무 부족하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어도 찬양하며 천국으로 올라갔다. 돌에 맞아 죽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죽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두려워한 것으로만 그치면 그들과 비교해 주님이 더 겁이 많았고 믿음이 약했다는 뜻이 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낮춰버리는 결과가 된다.

 

더 이상한 사건

 

성경에 대한 의문은 성경 안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기사가 반드시 있다. 비슷한 성격과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나 가르침과 비교 대조해 봐야 한다. 본문의 사건과 비슷한 것이 언뜻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같지만 그보다는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베푼 기적이다. 당신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으로 죽은 지 나흘 되는 친구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냈다. 그 때는 정말로 주님의 주님다우심이 확연히 드러났다. 시쳇말로 본문과 달리 폼이 났었다.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고 급히 연락했다. 주님은 그 때에 이미 그가 죽은 것을 알았고 일부러 이틀을 더 지체했다. 쉽게 되살릴 능력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도 그 사실을 미리 알리며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은 것이기에 깨우러 가자고 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반신반의했다.

 

나사로의 집에 도착해보니 이미 장례 절차는 끝났고 모두가 큰 슬픔에 잠겨 있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 떡하니 혼자서 마주서서 사람들에게 무덤의 돌을 굴러 내리라고 명했다.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 한마디만 하셨고 나사로는 그 말씀 그대로 무덤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나사로를 소생시킬 자신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이때도 우셨고(요11:35)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다(38절)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이 이상하다면 나사로의 경우는 더 이상해야 하지 않는가?

 

본문에선 인류가 고안한 처형 방안 중에 최고로 고통이 심한 십자가 죽음을 곧 당신께서 직접 당해야 한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주님인지라 이런 탄식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사로는 곧바로 살려낼 것이고 그럼 유족과 친지의 슬픔은 희락으로 바뀔 것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것 이상으로 기쁜 일은 있을 수도 없어 큰 잔치를 벌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었다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울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나사로가 살고 난 후에는 “See, I told you!”하며 거들먹거리며 자랑했을 것이다. 너무 경망스럽다면 의연하고 담담히 말씀만 하면 되었다. 본인이 슬플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속으로 깊이 흐느껴 울었고 크게 분노했다. 이야말로 이상한 일 아닌가?

 

죽음의 멍에를 벗을 자 없다.

 

이 또한 성경 안에 답이 있다. 요한은 가족과 문상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주님이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고 민망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33절) 다른 사람이 우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 슬픈 감정에 이입 동화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죄의 삯인 죽음의 형벌을 피해갈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름대로 의미와 보람 있게 이 땅의 삶을 영위했어도 모든 인생은 결국 죽음의 멍에를 벗어날 수 없기에 너무 불쌍하게 여긴 것이다.

 

또 인간을 그런 상황에 빠트린 장본인인 거짓의 아비 마귀가 여전히 공중권세를 잡고 있고 사람을 조종 농간하는데도 사람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장례식을 하며 우는 사람들의 슬픔을 탓한 것은 결코 아니다. 평소의 인간의 비참한 영적 상태에 대한 분노였다.

 

유대인들이 온갖 이적을 일으켰으면서 친구 하나 못 살렸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주님이 보고 다시 분노하셨다.(36,37절) 예수님은 정말로 많은 이적을 베풀었고 천국복음을 가르쳤다. 유대사회의 기존종교 체계와 권력자로부터 추방당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구원 밖에 있다고 정죄된 자들과 교제 위로 치유하고 특별히 죄 사함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당신의 메시아 됨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안타까이 여긴 것이다. 여전히 현실의 정치 경제적 구세주만 바라는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다.

 

친구를 죽음에서 살려내는 것은 예수님 본인에게도 분명 기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하늘로서 오신 인류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은 거꾸로 통분하며 흐느끼고 있었다.

 

주님이 왜 그랬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도, 아니 본인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도 사람들이 끝까지 완악하게 당신을 거역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전하는 말씀을 못 믿어도 그 하는 일을 보면 메시아인 줄 알 것이라는 주님의 지적이 전혀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종려주일과 십자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유대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말로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믿음을 확산시켰다.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바로 오늘 주일에, 성중의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서 길에 펴고 열렬히 환영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둘 다 메시아에 대한 별칭임, 찬양했다. 두 번이나 불렀다는 것은 아주 확신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기득권을 가진 종교권력자들은 자기들 입지가 위태해질 것을, 한마디로 버는 돈이 줄어들까 염려해서 예수를 죽이려 작정했다. 그전부터 죽일 것은 정해졌지만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대중의 기대와 열망은 엄청났는데 반해 평소에 서로 경쟁 시기해왔던 로마당국, 헤롯가문, 대제사장 계급들이 공통의 적을 없애기 위해서 서로 결탁했다. 아무 죄 없는 예수님에 억울한 누명을 덮어씌웠다.

 

주님은 그에 대해 저항은커녕 항변 한마디 않으시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어리석은 대중들은 이 사람도 아무래도 메시아가 아닌가보다 의심하고 실망하기 시작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그러다 결국 대제사장의 꾐에 넘어갔다.

 

대제사장은 예수가 장로의 유전은 물론 율법을 위반했다고 정죄했다. 유대인이라면 상종도 말아야 할 사마리아인, 이방인, 매국노 세리, 부정한 죄인들과 교제했다고 매도했다. 율법을 잘 지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거꾸로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했다. 성전을 무너뜨리고 삼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큰 소리쳤다. 결정적으로는 인간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함으로 하나님을 모욕한 참람 죄를 범했다고 선동했다. 모두가 유대인으로선 용서 못할 죄였고 대제사장의 지적은 아주 타당해보였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한 적이 없었다. 인간의 잘못된 관습을 고치려 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교만한 자는 버려두고 죄인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풀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가식적 동기를 야단쳤다. 예수님은 정말 본인의 선포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행하신 것은 전부 하나님의 진리였다. C. S. 루이스가 말한 대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면 완전히 미쳤거나 정말로 그 말한 대로 진실이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는가? 그런데 유대인들의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은 전부 거짓으로 둔갑시켰다. 그 많은 유대인들이 그 거짓에 속아 넘어가 집단적 광기로 주님을 십자가에 달았는데 그 배경에 사탄이 있다는 말 외에 설명이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예수님을 죽였다. 천하의 이단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므로 율법대로 나무에 매달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정당한 일을 하고 있으며 괘씸하게 여기다 못해 통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르는지 몰랐다. 살아계신 독생자 하나님을 죽였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마저도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며 죽었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인간의 자리에까지 내려와서 인간의 모든 죄를 감당하고 죽으심으로 인간을 용서하셨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이 나사로라는 인간 개인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죽음의 형벌 아래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로서 죄의 삯을 어깨에 메고 있는 그 영적 실상과 인간의 상황에 민망해 하고 통분해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는 물론 모든 인간과 자신을 동격화한 입장에서 분노하고 우신 것이다.

 

인간이 겪는 최고의 고통

 

지금 본문의 골고다 언덕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마귀의 거짓에 넘어갔다. 그 와중에도 그렇지 않은 일부 사람들은 처형 현장에까지 따라왔다. 예수님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이 열리고 그분이 메시아임을 믿는 극소수의 사람들이었다. 형장에까지 따라오지 못해도 숨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들도 소수이지만 있었다.

 

하나님이 남겨준 사람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니 말이다. 그럼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그들의 마음이 바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나이까?”이지 않겠는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인간적 윤리적으로 따져 너무나 비겁하고 치사한 잘못이다. 그러나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제일 먼저 고백한 자다. 그런데 자기를 버려두고 혼자 먼저 죽으니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내심으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했지 않겠는가? 너무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겉으로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부인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이 절규는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벗고자 하는 소원이 아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도 아니다.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매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대한 원망도 아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너무 괴롭다는 뜻일 뿐이다.

 

죽기 직전에 즉, 인간의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겪는 고통이었다. 인간과 동질화된 입장에서 내뱉는 외침이었다. 일부러 고통을 가장 혹은 과장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백 퍼센트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주님은 그 인성에 따라 자신도 주체 못할 정도로 솟구치는 격렬한 감정적 정신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터트린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에 우리 인간의 감정과 이성 수준으로 이해가 안 되는 석연찮은 행적이 딱 두 번 있었다. 첫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처형을 피하고자 하는 기도였다. 이는 100% 인성이 발현된 것이다. 십자가 처형의 그 육체적 고통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면 그보다는 사랑하는 제자들과의 육신적 이별이 너무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곧 한 제자는 배반하여 고발할 것이다. 또 수제자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가 흩어질 것이다. 주님은 마치 젖도 떼지 않은 갓난아이를 혼자 두고 먼저 죽는 부모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본문의 절규다. 주님의 마지막 고통이지만 십자가 처형은 이미 당하고 있는 터다.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그분과 관계가 완전히 끊긴 영적인 고통이 너무 괴로웠다. 육체적 고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각오하며 정리했었다. 지금 단계에선 채찍도 맞고 온갖 학대를 당해 사실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전히 탈진되었다.

 

예수님은 이 절규를 하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하나님의 대답을 듣지 못하고 죽었다.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 된 채 죽은 것이다. 예수님의 내면에 함께 공존하는 100% 안전한 신성이 이 땅에 다가오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적 진리를 계시한 것이다.

 

인간이 먹고 마시는 것의 부족함에서거나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정신적 특별히 영적 고통이라는 것이다. 또 인간으로부터 그것도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버림 받는 그 큰 고통보다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고통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 시도 의미와 가치와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완전한 단절의 의미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한 인격체 전체가 완전히 죽었다. 그 영혼마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인류에게 지어진 죄의 삯이자 그분의 진노의 형벌을 당신의 몸뿐 아니라 영혼까지 포함된 완전한 인격체 전부로 다 감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구원이 가능해졌다.

 

예수님의 이 절규는 단순히 메아리처럼 허공에 그대로 흩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십자가 위에선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완전한 죽음으로 완전한 단절이 이루진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죄를 씻어야만 당신의 자녀로 받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부활로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흉계를 완전히 깨트리셨다. 마귀의 농간에 놀아나 현실의 기득권만 지키려 했던 종교지도자들의 그 흉악한 죄를 온 천하에 명백하게 드러내셨다.

 

반면에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할 때 내심 부르짖었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에 대해선 주님은 부활로 응답해주셨다. 한 시도 너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당신을 보여주고 직접 만져보게 하셨다.

 

몇 번 말씀드렸지만 체스터톤이라는 신학자는 사람이 기생집에서 쾌락을 추구할 때도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몸부림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이 탄식은 신자는 물론이고 불신자들도, 인간이라면 알게 모르게 본성적으로 속으로 아우성치는 것을 대변한 것이다.

 

예수 믿은 후의 신자들도 현실의 여러 힘든 일들 가운데 때로는 하나님이 왜 나를 버리셨는지 의심과 불안과 염려가 들 때가 종종 있다. 지금 예수님은 그것까지도 십자가에서 대신 절규하시며 감당하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당신과 당신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 절규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행한 이 절규는 엄청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약 이 절규를 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완전한 구원이 성립되지 못할 수 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영적으로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방도가 없다. 육체적으로 죽은 것만으로는 나사로가 소생한 것과 동일한 성격이 된다. 전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할 구세주의 죽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100% 완전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완전한 죽음의 형벌을 감당해 와전한 대속의 제물로 바쳐졌다. 또 그와 동시에 100% 완전한 하나님으로써 구원의 길을 보였고 사람들에게 구원을 직접 베풀었다. 완전한 죽음이었기에 완전한 새 생명을 줄 수 있었다. 예수님은 다시 죽어야 하는 소생을 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부활을 하셨다.

 

특별히 ‘나의 하나님’이라고 두 번 불렀다. 하나님과 일대일 인격적 대면을 하여 교제를 하고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과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이 절규를 속으로 알게 모르게 하고 있는 자가 그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분리 배척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 밖에 있다. 하나님과 분리 단절 되는 것이 그보다 더 두려운 자는 구원 안으로 인도하신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와 교회들이 주님을 조금 잘못 기념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육신적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안타깝다. 알기 쉽게 말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얼마나 아팠을까 그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심각한 얼굴로 동정하는 식이다.

 

오늘의 본문이 뜻이 무엇인가?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은 그 극심한 십자가 처형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하나님과의 단절이라고 외쳤지 않는가? 이 고통에 대해서 신자들이 외면 아니 무지하다. 감히 인간이 주님의 고통을 염려 동정해주다니 말이 안 된다. 주님이 우리를 염려 동정해주신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이 없이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는 존재이지 않는가?

 

이미 예수를 믿은 신자는 하나님과 단절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보혈로 중간에 막혔던 담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을 이미 소지했고 영생이 확보되었다. 고난 주간에 오히려 이 놀라운 은혜와 신분과 특권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신자는 항상 주님의 새 생명으로 활기차게 살고 있어야 한다. 새 생명을 소지한 자답게 살고 있는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단절될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멀어지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한다. 신자들이 주일마다 주님께 새 생명으로 승리한 것을 보고할 수 있어야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바로 살리는 것이다.

 

고난 주간에는 최소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유인 현실적 형통만을 위해서 주님을 찾지는 말아야 한다. 신자들이 “주님 내 모습이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입니까?”라고 수시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한다. 마치 아주 믿음이 좋은 양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마귀에 속은 유대인들도 주님이 자기들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여긴 것과 같은 생각 아닌가?

 

물론 우리는 너무나 연약해서 수시로 넘어지고 현실에서도 많은 고난을 겪어서 힘들다. 그런 의심과 불평이 수시로 든다. 저부터 솔직히 그렇다. 그러니까 더더욱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런 고통마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다 짊어지고 감당해주신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이 우리 삶에 활기가 넘치게 작동되도록 소원하고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고난주간을 제대로 보내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4/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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