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2:7-12) 하나님이 나에게 진 빚을 청구할 수 있는가?
야곱 바로 알기 (1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32:7-12)
야곱의 양떼를 탈취하려고 추격해온 라반은 꿈에 야곱에게 어떤 해도 가하지 말라는 여호와의 엄중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질 구실로 삼으려 했던 라헬이 훔친 드라빔 신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라반으로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서 야곱과 화친 언약을 맺고 딸들과도 작별을 고했습니다.(창31:44-55)
이제 야곱에겐 고향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지만 더 큰 장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서의 자기를 향한 분노가 걱정되어 사자들을 먼저 보내어 자신의 귀향 소식을 알렸습니다.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다고(5절) 전한 것은 많은 재산을 모았는데 형과 함께 나눌 의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자가 전해온 소식은 에서가 야곱을 만나러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6절) 세일 땅에서 한 부족의 족장이 되어 있는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뜻이며 고대에서 사백 명은 상당한 병력입니다. 이는 동생과 화해하러 오는 모습이 아니라 아직도 야곱에 대한 불같은 증오가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목동들과 아이들과 아녀자들뿐인 야곱으로선 도무지 감당할 수 없고 무엇보다 형제끼리 싸울 수는 없습니다. 야곱이 백세 가량 되어서야 처음으로 독립하여 자기 가문을 세우려하는데 시작도 못해보고 무참히 실패할 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기도보다 실력
본문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해져서(7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내용입니다. 고난을 당한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보호해주셨다고 단순하게 해석하고 치워선 안 됩니다.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겨내야 한다는 진리는 구태여 성경을 읽지 않고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도 그렇게 믿고 실천합니다.
본문의 야곱의 기도는 신자들이 반드시 배워서 그대로 따라야 할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사항은 야곱이 에서가 군대를 몰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졌지만 기도부터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축 떼를 둘로 나누고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를 피하겠다는 작전부터 세웠습니다.(7-8절)
또다시 형을 속이려는 치사한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누차 강조한 대로 야곱은 생각이 많은 조용한 사람입니다. 라반이 열 번이나 삯을 변경했어도 묵묵히 참아줄 만큼 인내심이 강하고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둘로 나눈 반 떼마저 또 그 반 떼마저 여러 떼로 나누어 자기보다 앞서 보낼 정도로 매사에 아주 신중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려고 결심했을 때부터 에서와 만난 이후에 전개될 상황을 계산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가정해봤을 것이며 지금 같은 최악의 경우도 예상했을 것입니다. 두 떼로 나누겠다는 것도 그런 궁리 끝에 이미 세워놓은 대책이었습니다. 형에게 재물을 줄 수 있다는 뜻을 사자들을 통해서 전달한 것은 그 계획의 첫 단계를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랑곳 않고 에서가 군대를 끌고 온다니 두려울 수밖에 없고 또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니 가슴이 답답해진 것입니다.
형에게 큰 잘못을 범한 주제에서 어떻게 하든 용서를 구해야하지 치사하게 재산의 반을 남기려 든다고 비난할 계제는 아닙니다. 지금 야곱도 노비까지 두었으니 생계를 책임져주어야 할 식솔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자기만 보고 따라 나선 이들을 굶길 수는 없습니다.
두 떼를 나눈 것에도 몇 가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지금 가진 소유는 그 원인이 어찌 되었던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여호와께 얻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형에게도 지분이 있기에 동등하게 나눠가지겠다는 뜻입니다.
장자는 알다시피 다른 아들의 두 배의 유산을 받습니다. 지금 두 떼 중에 한 떼를 에서에게 주어서 소유를 똑같이 일대일로 나누려고 합니다. 비록 공식적으로 동생인 자기가 장자가 되었지만 장차 아버지 이삭에게서 받을 유산도 욕심 부리지 않고 똑같이 나눌 작정이라는 뜻입니다. 이전에 장자권을 차지한 것도 아버지의 유산을 노린 짓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주길 바라고 또 어쨌든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은 형에게 용서를 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쌍둥이 동생으로 77년간 함께 살았기에 형이 현실의 풍요와 쾌락만 추구하는데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많은 가축 떼를 보면 분노가 가라앉으리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야곱이 가축을 두 떼로 나눈 것이 결코 비열한 계책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굴곡을 오래 겪은 끝에 터득한 삶의 지혜이자 장자권을 떠나서 에서를 형으로 올바르게 대우하려는 예의였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고난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가족과 식솔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심사숙고 하여서 최선의 대책을 세워 실행부터 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신자들에게 가장 취약한 측면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현실적 실력에 의존하면 마치 믿음이 잘못되었거나 부족한 것처럼 여깁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 지혜와 실력을 쌓아서 신용과 정직과 성실로 행하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믿음으로 가장 먼저 행할 일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지혜와 실력으로 스스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마저 무조건 하나님께 자기 원하는 때와 방식대로 해결해달라고 기도부터 합니다. 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 모든 문제를 깨끗이 단번에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이뤄주면 신자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종이 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
물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입니다.(잠16:9) 신자가 자기 계획대로 자기 실력으로 쉽게 행할 수 있는 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는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그 계획의 달성여부는 하나님께 달렸으며 죄인들의 시기 경쟁으로 가득 찬 세상의 훼방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야곱은 자기가 지금 시행하려는 자기 계획이 잘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9절)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나에게 하신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절망 중에 하란으로 도망쳐 오는 도중에 베델에서 꿈에 받은 계시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여호와가 일구이언 하시는 분이 아니며 입에서 나온 말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델에서 약속한대로 하란에서 이뤄주셨으니 이번에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도 당연히 그 약속대로 해주리라고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여호와에게 간구한 기도 제목은 하나로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11절)였습니다. 반으로 나눈 양떼를 지켜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반을 포기한 가축인지라 야곱이 크게 미련을 가질 리도 없습니다. 대신에 나와 내 가족들의 생명만은 꼭 보호해달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간구를 하기 전에 하란으로 내 지팡이만 갖고 왔으나 주께서 두 떼나 이루어주었다는 감사부터 했습니다.(11절b) 자기 재산 전부가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이십 년간 자기 지혜와 실력으로 성실하게 일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에 따른 은혜였다는 고백입니다. 거저 받은 것이므로 다 없어져도 좋다는 즉, 나머지 한 떼만이라도 끝까지 지키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또 그런 감사를 하기 전에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11절a)라고 하나님 앞에 자신은 전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실토했습니다. 나에게는 그 두 떼를 받을 만한 자격과 공로가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는 절대로 재물에 있지 않으며 오직 여호와가 함께 해주시는 은혜만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다시 고향으로 지팡이만 갖고 돌아가도 좋으니 가족만은 지켜 보호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면서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12절)고 하면서 자기 후손에게 하신 약속을 다시 상기시켰습니다. 말하자면 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야곱은 자기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즉,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당신께서 전적으로 이끌고 있으니 당신의 일정과 방식대로 온전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기도를 시작해서 동일한 약속으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하나님더러 당신이 말씀한 것을 당신이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진 것이 있는데 지금 갚아달라는 식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 사실은 이런 원리를 잘 알기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기도할 때 주로 의지하는 말씀은 둘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그런데 솔직히 한번 따져 보십시오. 이 두 말씀대로 응답된 적이 많습니까? 이 말씀대로 왜 되지 않느냐고 의심 불평한 적이 많습니까? 분명히 후자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의 한절만 떼서 문자적으로 해석, 그마저도 잘못 해석하고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 두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도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절대 의심을 품지 말라고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기도하는 제목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한다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말씀마저 그 뜻을 정확히 모르는데 그대로 응답될 리는 없지 않습니까?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말씀하신 구체적인 약속과 계획을 붙들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고난에서 건져주신다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진리를 붙들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나 목회자만이 자기 인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알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모든 신자는 십자가복음을 전할 평생 소명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자 각자마다 그가 행하는 일을 통해 그 소명이 잘 이뤄지게끔 하는 인생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신자로선 자신의 현재 당면한 모든 일들을 십자가 복음이 잘 전파되는 방향과 방식으로 이끌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늘에서 이뤄진 뜻을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부터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현실 삶에 힘든 문제들이 자꾸 생겨서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에 신경을 쓸 수 없을 때가 종종 생깁니다. 그럼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기에 당연히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조차도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모습으로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고난 중에도 나는 어떻게 되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길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델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까지 함께 해주겠다고 약속했기에 야곱도 지금 가나안으로 돌아가니까 여호와더러 약속대로 행하시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갖고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신자와 함께 즉, 아무리 겹치는 고난 중에라도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오늘날의 신자도 자기는 땅 끝까지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까 주님도 당신의 모든 권능을 그 일에 발휘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야곱에 대한 계획은 그와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해주려는 것 하나뿐입니다. 그로 하란에서 거부가 되게 한 것은 그 계획을 이뤄가는 한 방편이었을 뿐입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그 계획을 잘 알고 있기에 그 계획이 이뤄지게 자기 아들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야곱으로선 아버지를 속여 가며 차지한 장자권이니까 그 실현이 자신의 필생의 소원이자 계획이었고 모든 기도도 그것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이런 맥락에서 야곱의 기도에서 신자가 정작 배워서 따라해야 할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10절a)라는 여호와 앞에서의 항복 선언입니다. 나에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자격과 신분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절실한 고백부터 언제 어디서나 가장 먼저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은혜로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고백은 앞으로 어떤 은혜를 주시든 즉, 나를 죽이든 살리든 그 모두가 주님의 은혜일뿐이므로 감사히 받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기도의 본질입니다. 물론 이는 한두 번의 결심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오래 동안 이런저런 고난들을 겪으면서 하나님과 끈질기게 씨름하여 그분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주권과 섭리를 깊이 체험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그런 완전하심을 야곱은 마지막으로 라반과 이별할 때도 또다시 깊이 체험했습니다. 라반이 드라빔 신상을 찾지 못하자 야곱은 라반의 일행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외삼촌이 열 번이나 내 삯을 변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가축 떼를 이루었으며 어제 밤 꿈에 여호와가 경고하지 않았다면 외삼촌이 딸들과 손자들과 가축 떼를 빼앗아 갔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창31:42,43)
지금 라반은 드라빔을 찾으면 그것을 구실로 야곱을 처형하거나 최소한 가축 떼를 빼앗을 수 있고 그 일의 증인으로 삼으려고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드라빔은 찾지도 못했고 거꾸로 그 동안에 야곱과 라반 둘만의 비밀이었던 열 번의 삯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그들 앞에 완전히 들통 났습니다. 장인이 사위에게 줄 삯을 열 번이나 변경했고 이제 그마저 다 빼앗으려드는 너무나 야비한 장인임을 이웃들이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라반은 당장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31:43)라고 변명했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물론 소유 모두가 사실은 자기의 것이라고 합니다. 내 것을 다시 찾으려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궁색한 변명입니다. 본인도 그런 줄을 아니까 어쩔 수 없이 화친의 언약을 맺자고 제안했고 더 이상 야곱을 괴롭히지 못하고 순순히 보내준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라반은 드라빔을 훔친 야곱의 죄를 확인해서 자신이 야곱의 재물을 탈취하는 것이 정당함을 변호해줄 증인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야곱의 무죄함과 그 동안에 억울하게 희생과 수고만 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라반이 너무나 야비한 장인임을 확인해줄 증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라반 같은 세상의 악인의 아무리 교묘하고 음흉하게 흉계를 꾸미고 악행을 실행해도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도 그대로 두고 당신의 종을 지켜 보호하시고 당신의 온전한 뜻을 한 치의 차질 없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마귀와 그에 미혹된 죄인들이 십자가에 매달 때까지 전혀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완전하신 방안을 영단번(永單番,once for all)에 완성시켰습니다. 그럼 당신의 모든 것과 맞바꿔서 구원해준 신자들의 인생계획도 골고다로 올라가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최고로 고귀한 방안으로 구원해주었으니 신자 인생에도 최고로 고귀한 소명을 주실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시는 것을 넘어서 당신께서 계획 내지 섭리하신 일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중에도 사실상 그 계획과 섭리대로 이뤄나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더러 당신의 계획대로 이루시라는 간구마저 넘어서야 합니다. 자신이 현재로선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뜻과도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도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기 전부를 주님께 의탁하면서 그분의 계획과 섭리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에스더처럼 하나님이 죽이면 죽으리라는 것이 기도의 전부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쓴 물이다.
룻기의 나오미가 바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기근을 피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이주했으나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두 며느리에게 고향에 남아서 각자 재혼해서 잘 살라고 당부했지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니까 어머니가 가는 곳에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따라나섰습니다. 두 여인이 유다 땅으로 돌아오자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왔다고 좋아했는데 나오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룻1:20,21) 이제부터 희락이라는 뜻의 나오미라는 이름 대신에 괴로움이라는 뜻의 마라로 부르라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아무 소유 없이 돌아왔기에 하나님께 불평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큰 고난 가운데도 여호와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신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 여자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따르겠다고 개종선언을 했고 또 나중에 율법대로 신실한 며느리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켜 그리스도의 선조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풍족하게 나가게 한것도 예루살렘으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한 것도 여호와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기근을 당해 목숨을 건지려고 피난했는데 자기 목숨을 건져 주셨기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간의 삶이 아주 고달프긴 했지만 여호와를 외면할 수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분만을 모시고 함께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후에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더니 물이 쓰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지시로 모세가 한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고 백성들이 그 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이 열 번이나 삯을 변경하는 바람에 아무 수고 없이 14년을 허송세월하게 되었습니다. 그도 꿈에 하나님이 계시를 받고 양들이 마시는 우물가에 나무 가지들을 세웠더니 얼룩진 양들이 크게 번창해졌습니다. 야곱에게도 마라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도피했지만 가진 것 다 잃어버리고 맨몸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자기 인생을 마라라고 칭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자기 인생이 마라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압이든 예루살렘이든 어디라도 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야곱도 작대기 하나 갖고 하란으로 왔는데 에서에게 내 소유를 다 빼앗겨 다시 맨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여호와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사실상 야곱도 자기 이름을 마라라고 칭한 셈입니다.
신자의 일생도 야곱이나 나오미처럼 마라입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말씀과 기도에 나태해서가 아닙니다. 죄로 찌든 인생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며 경쟁 대적하는 이 땅에선 고난과 재앙이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때로 풍부에, 때로 궁핍에 처하게 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모시는 마라 같은 인생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합니다. 이제 믿었으니 뭔가 현실적으로 풍요해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믿음의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난 20년간 야곱을 라반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역전 시켜준 것이나, 앞으로 형 에서의 손에서도 건져주시는 유일한 이유는 그로 당신의 장자로 세우는 것 하나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도 내가 사나 죽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공짜 선물로 내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래서 주님이 나를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장자로 세워달라는 기도만 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 66권을 다 읽어보십시오. 이것 외에 다른 뜻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결코 없습니다. 성경 전체의 스토리를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인류구속사라고 말합니다. 질병에서 치유해 주신 역사, 고난에서 건져준 역사, 기적을 베푼 역사, 등이 아닌 줄은 신학을 배우지 않은 여러분들도 다 인정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죄에서 건져주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럼 죄에서 건져진 신자가 세상 앞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그 뜻대로 기도해야만 응답받을 것 아닙니까?
혹시 지금 너무나 어려운 일들이 겹쳐서 마라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삶이 평생토록 매일매일 마라의 쓴 물을 마실 수밖에 없음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겹쳐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아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자 섭리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고난 가운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확장되는 모습으로 자기 인생을 이끌어달라고 예수 믿는 신자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럼 어느 샌가 모르게 그렇게도 썼던 물이 단물로 바뀌어져 있을 것입니다. 아니 여전히 쓴 물 가운데 있어도 전혀 쓰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달게 여겨질 것입니다.
(8/23/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