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환자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질문]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지 주문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목적도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인생은 물론 세상만사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움직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말기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자에게 기도하는 것이 혹시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라도 암 판정을 받고 시한부인생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시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요사이 저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제 감정을 털어놓거나 감사기도를 많이 하고 뭔가를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경우 히스기야 왕이 기도해 15 년 수명이 연장 된 사례를 많이 강조하지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도 벗어났다는 식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지 않을까요?
[답변]
말기 암 같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에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해도 거의 대부분 돌아가십니다. 오래 동안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 것이 완전히 허사가 되므로 힘이 빠집니다. 이런 일들이 몇 번 겹치면 자연히 질문하신 것과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간절히 또 뜨겁게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완전한 제물로 바쳐지려고 이 땅에 오셔서 범사를 골고다 언덕을 지향하도록 주관하셨고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이 잔을 비켜가게 해달라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확정되어 있고 주님도 그것을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기도했던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우선 인간이 고안해낸 처형방식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눈앞에 두었기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주님도 크게 괴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보다 더 중요한 뜻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예고하고 가르쳤음, 기도에 함께 동참하라고 명했는데도 잠에 떨어진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너무 안타까워 이별하기가 못내 아쉬웠던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이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사탄이 광야에서 당신의 십자가 구원을 훼방하려던 시험을 이겨냈는데 이제 그 구원을 완성시키기 직전에도 사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완벽한 승리를 거두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기도를 해야 하는 목적과 의미는 물론 그 권능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크다는 뜻입니다. 응답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많음을 알면서 기도해도 단순히 응답되는 것 이상의 은혜까지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기와 같은 의문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기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첫째는 설명한 대로 기도의 권능에 관해서, 둘째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기도의 관계에 관해서 오해한 것입니다.
기도의 권능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자신의 문제나 고난을 하나님께 아뢰어 해결 받는 차원으로만 제한하고 있습니다. 일부 믿음이 좋은 신자는 교회에서 봉사를 더 잘하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 같이 의로운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문제에 해당됩니다.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는 아무래도 응답여부에만 관심을 쏟게 됩니다. 상기처럼 응답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한 문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실제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술이라는 일반은총을 이미 허락하셨고 신약성경이 완비되었기에 구태여 기적으로 응답할 필요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말기 암이 기도로 치유되는 일도 큰 기적이라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확률이 낮더라도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 있으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으므로 당연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질문자께선 “혹시라도 암 판정을 받고 시한부인생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시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인간적 욕심이 아닌지”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럼 그 반대로 “혹시라도 주변의 기도로 기적처럼 살아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기도하지 않은 죄가 더 크지 않습니까?
이 경우에 가장 합당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바로 저인데 유타 주에서 유학생교회를 담임하던 중 1998년에 설암(舌癌) 선고를 받았습니다. 치사율이 아주 높고 상당히 진척이 된 상태였습니다. 당시에 한국에서 교환교수로 오신 서울대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 두 분과 미국 심장 전문의사가 저희 교회에 출석했는데 세 분이 며칠을 머리를 맞대고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너무 위급해서 판정 받자 일주일 안에 수술하기로 결정했고 저는 담담하게 응했습니다.
전교회에 기도의 불똥이 떨어졌습니다. 특별히 수술 당일에 교인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저희 집 지하실로 와서 30분씩 수술이 끝날 때까지 담임목사를 제발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연쇄기도를 했습니다. 여섯 시간 정도 예상했던 수술이 열두 시간이나 걸렸고 혹시 수술이 잘못되었나 싶어 교인들은 더더욱 간절하게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오히려 방사선이나 항암치료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수술은 아주 잘 되었습니다. 지금껏 23년간 일부 부작용은 남았어도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교인들의 순전하고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어서 살아났다고, 최소한 완벽하게 고쳐주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만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젊은 청년들인데다 가뜩이나 학위 따기에도 바빠서 거의 기도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응답을 눈으로 목격함으로써 열심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던 주변 학생들에게도 간증하면서 전도에 불이 붙었고 교회의 모든 모임과 사역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에는 가난한 유학생 교회가 자체 예배당 건물까지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글로 쓰면서도 당시의 모든 은혜로운 일들이 떠올라서 다시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광대하시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은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으로선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분의 뜻을 절대로 미리 예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나 고난이 생기면 일단은 소원하는 대로 기도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합니다. 거기다 치료 과정에 현대 의술이 아직 밝혀내지 못해서 하나님만이 역사해줄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또 그분이 창조하신 신체의 신비한 능력으로 그 병을 이겨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겸손히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그렇게 진정으로 간절히 기도해 나가야만 성령이 역사해서 자기 뜻과 그분의 뜻이 어떻게 다른지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주변 상황을 통해서 조금씩 깨닫게 계시해주고 그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기도까지 하게끔 인도해주십니다. 지레 처음부터 기도하지 않으면 그 고난을 통해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는커녕 그 거룩한 뜻도 전혀 모르고 지나치게 됩니다.
중환자를 두고 기도해주어야 할 내용은 병의 치유 말고도 많습니다. 우선 고통부터 경감시켜주고, 본인에게 생에 대한 의지 소망 믿음이 강해지도록, 최소한 구원의 확신에 따라 마음의 평강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가족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있고 간호하는데 지치지 않도록, 의료진들도 실수하지 않고 최선의 치료법을 시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제 간증처럼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고 또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얻어서 겸손해지는 것만도 반드시 기도해주어야 할 충분한 이유이자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기도의 관계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그것도 전우주적으로 실현될 그분의 거룩한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너무나 엄청난 특권이자 은혜입니다. 단순히 자기와 자기 주변 가까운 사람들의 문제만 해결 받으려는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아주 비상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은 그 통치를 단독으로 행하지 않으며 반드시 헌신된 신자를 통해서 이뤄나가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당신의 택하신 백성의 순종과 헌신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행하여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신자가 그분의 뜻과 계획에 기꺼이 순종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행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를 통해서만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당신께서 오래 전에 세워두셨고 신자가 그 뜻을 미리 알 수 없는 계획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주만물과 세상만사의 주인 되시므로 그분의 주권적 섭리는 너무나 광대하고 완벽하여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절대로 모순 상충되지 않습니다. 그
한 미국 신학자가 신앙이 성숙해감에 따라서 기도도 세 단계로 성숙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나에게 달라’(give me)는 기도, 둘째는 ‘나를 바꿔 달라’(change me)는 기도, 셋째는 ‘나를 사용해 달라’(use me)’는 기도입니다.
교회에 출석해 예수를 갓 믿었을 때는 아무래도 자기 고난을 해결하려고 주로 나에게 이런 것 저런 것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뜻이 현실적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닮아 거룩해지라는 것임을 알고선 점점 자기 죄를 회개하면서 거룩하게 바꿔달라는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이 자기를 당신의 십자가 복음사역을 맡기려고 세상에서 불러내었음을 확신하고서 그 소명의 실현에 기도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소명이 확정되지 않았어도 자신을 하나님더러 당신의 뜻과 계획에 어떤 방식으로든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자기 삶과 인생 전부를 그분께 기꺼이 내맡기게 됩니다.
문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고 소명에 헌신되었어도 여전히 연약하고 자기를 높이려는 본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전에 잠시 자신의 욕심과 감정을 죽이는 기도 내지 묵상을 해야 합니다.
반면에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경우는, 특별히 질문처럼 비상상황에 빠진 불쌍한 이를 위한 기도에는 자신의 생각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정말로 순전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로 세상의 제사장 백성으로 세웠기에 다른 이의 구원과 고난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헌신 특별히 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질문자께서 이것저것 해달라는(give me) 기도를 하지 않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라나고 그분의 일에 동참하길 간절히 원한다면 하나님께 간구할 일은 필연적으로 많아집니다. 영적으로 온전히 성숙되어서 분명한 소명을 실천하고 있는 종일수록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일은 더 많아지는 법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라는 것은 신자 쪽에서 일방적 요청만 해선 안 되고 그분의 뜻을 깨달아서 자신의 생각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내용이 없고 자신의 내면만 고백하고 치우면 자칫 비성경적인 명상(기도)으로 변질될 소지가 많습니다. 정서적 평온함 안도감을 느낌으로써 종교적 만족과 위로로 그치고 심지어 스스로 남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게 되었다는 착각마저 생길 수 있습니다.
자기 내면에 대한 기도는 반드시 자기 모든 죄를 통렬하게 회개하고 그분의 종답게 자신을 고쳐나가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럼 자연히 감정도 함께 토로됩니다. 문제와 고난을 해결해달라는 일차적인 기도에도 자연스레 감정적 고백은 따라옵니다. 기도란 그래서 마치 어린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이든 요구 의논할 수 있고 때로 투정 부릴 수도 있듯이 해야 합니다. 고상하게 내 감정이 이러하니 부모가 알아서 처리해달라거나 자기감정을 고백하고서 스스로 다스리는 것은 대화가 아니기에 기도가 아닙니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 응답
죽을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의 기도가 응답되어서 수명이 십오 년 연장된 경우(왕하20장)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당시의 인간의 우매한 지혜와 영적수준에 맞추어서 이해하기 쉽도록 저작되었고 때로는 특별한 주제를 강조하려고 특정한 수사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이런 점을 반드시 감안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더러 “네가 죽고 살지 못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부터도 (왕하20:1) 네가 아무리 기도해도 반드시 죽이고야 만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자기 지은 죄를 철저히 회개하며 기도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네가 간절히 기도하면 수명을 연장시켜 주겠다고 미리 언급해버리면 기도에 진정성과 열의가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알다시피 남 왕국 유다에 종교개혁을 과감하게 일으켰으나(왕하18:1-12) 앗수르가 침공하자 여호와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관된 믿음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비굴하게 과도한 공물을 바쳤는데 그래도 앗수르 왕은 예루살렘을 둘러싸서 성안을 극도의 혼란에 빠트렸고 더 심한 치욕을 당했습니다.(왕하18:13-37) 히스기야는 이때에도 정말로 간절히 기도하였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간섭하여 앗수르 대군을 물리쳐주었습니다.(왕하19:14-37)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잘못에 대해 심판이 아닌 징계만 하려던 계획대로 중병이 들게 했습니다. 죽고 살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그만큼 치명적인 병이므로 기도 외에는 살아날 길이 없다는 뜻을 과장법을 사용해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유다 왕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히스기야 개인에게 내린 형벌이므로 기도도 혼자서 해야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에 비굴하게 행했던 이유는 예루살렘 성만은 함락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는 또 그래서 병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하러 온 바벨론왕의 사절에게도 자기 왕궁의 보물 창고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바벨론에게도 많은 보화를 바칠 용의가 있으니 예루살렘 성은 치지 말아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결국에는 후대 왕들의 죄로 인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가 멸망되는 벌을 받습니다.(왕하20:12-18)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해 수명을 늘려준 이유를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왕하20:6) 하나님 당신과 다윗을 위해서(다윗과 맺은 언약-삼하7:16) 예루살렘 성은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히스기야가 앗수르나 바벨론과 타협 굴종했으나 그 진심은 미리 아셨고 또 그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아직 없었으므로 수명을 연장시켜주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광대한 주권과 섭리 아래 계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앞뒤로 연결해서 잘 살펴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편의나 바치는 정성에 따라서 이미 세워놓으신 계획을 수시로 바꾸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신자가 당시 상황에 맞게 자기 이성과 의지로 자유롭게 판단 결정 시행하도록 놓아두시고도 당신의 광대하신 계획을 한 치의 차질 없이 이루십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마치 기도해서 그분의 계획이 수정된 것 같으나 당신의 완벽하신 사전 각본대로 인간 역사가 진행된 것입니다.
결론
결론을 내리자면 그분의 광대하신 계획을 알 수 없기에 신자는 쉬지 말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움을 바랄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고난이 끝까지 해결되지 않아도 그래야 합니다. 질문하신 경우 말기 암이 낫지 않고 죽더라도 주변에서 기도해주었던 영적열매는 반드시 고인의 유족에게는 물론 기도해준 모든 성도에게 오묘하고도 풍성하게 맺힐 것입니다.
비록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도 없으므로 반드시 사경을 헤매는 자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무도 모르니까 무엇이든 마음에 선하게 소원하는 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경말씀으로 깨달은 하나님의 진리가 자기 체험으로 확증되고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분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많이 하는 데에 하자가 있을 리는 없습니다. 설령 처음에는 잘못된 기도를 하더라도 차츰 성령의 인도로 올바른 기도를 하게 해주십니다. 반대로 미리 하나님의 뜻을 오해 내지 착각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만큼 큰 잘못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역사하는 배후에는 반드시 성도의 간절한 기도가 있으며, 역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그 놀라운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9/2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