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중보기도란?

조회 수 121 추천 수 0 2021.03.02 17:09:20

성경적인 중보기도란?

 

[질문]

 

근래에 주위에 기도가 필요하신 분들이 많아 그분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한국교회에서 여럿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마치 더 잘 들어주신다는 것처럼 가르친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니 이것이 비성경적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십여 년 전에 학위를 마치고 직장을 구할 때 주위 여러분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드렸는데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면 더 잘 들어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솔직히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된 신앙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에는 선지자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이 (예를 들어 모세나 아브라함)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였지만 신약에서 딱히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중보기도의 모습은 못 본 것 같습니다. 물론 두세 사람이 함께 한 곳에 하나님께서도 계시겠다든지, 신앙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이것은 형제사랑의 의미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이지 기도하는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더 능력이 생긴다던가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의 어려움을 하나님이 더 잘 해결주셔서가 아니라 (왜냐면 그분의 어려움은 하나님이 그분 뜻대로 이뤄주실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웃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말이 좀 이상할 수는 있지만 중보기도는 결국 (기도의 대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사랑실천과 영적성장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데요. 물론 서로 기도해주는 것을 앎으로 인해 교제가 생기고 기도대상도 위로를 받는 유익이 있긴 합니다.

 

요즘 신사도 운동 등에서 중보기도가 다른 의미로 오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특정 중보기도자나 중보기도팀이 간구하면 하나님이 더 역사하시는 것처럼. 카톨릭에서 마리아가 중보해 준다고 믿는 것과 같이) 성경적인 의미의 바른 중보기도에 관해 정리해 주시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중보기도는 상대를 위한 것인가요? 나를 위한 것인가요?

 

[답변]

 

중보기도는 불가능하다.

 

작금 많은 신자들이 중보기도라는 용어의 의미를 모르거나 오용(誤用)하고 있습니다. 답변을 정확하게하기 위해선 그 정의(定意)부터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중보(仲保)는 한자에서 온 단어로 중간에서 보증을 선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의미는 적대 내지 원수 사이인 양쪽을 다 같이 공정하게 대변하고 중재하여 화해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중보라고 번역된 것은 구약성경에선 한번 뿐입니다.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38:14) 중보는 히브리어로 “담보서다, 보증하다, 서약하다” 등의 뜻을 지닌 ‘아라브’입니다. 여호와가 압제와 나 사이에 서서 압제를 떠맡아달라는(영어번역 undertake for me) 것입니다. 여호와더러 중보가 되어달라고 하니 조금 불합리해 보이나 하나님만이 압제를 막는 일을 보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중보라고 한 것입니다.

 

신약에선 중재자, 대리사절 등의 뜻을 지닌 헬라어 ‘메시테스’를 ‘중보자’(仲保者, mediator)라고 여섯 차례 번역했습니다.(갈3:19,20, 딤전2:5, 히8:6, 9:15, 12:24,) 개역본 등 일부 성경은 ‘중보’라고만 번역했지만 그 뜻은 중보자입니다. 이 중에 갈3:19만 율법을 전수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고 가르친 모세를 뜻하고 나머지 경우는 전부 예수님을 말합니다.

 

결국 어떤 일이든, 특별히 죄 사함을 인간에게 확고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존재라야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살펴본 대로 총 일곱 번의 성경용례(用例)도 하나님이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보장했다는 의미였습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단순히 남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한다고 해서 중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일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렸기에 어느 누구도 그 응답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조차 겟세마네 동산에서 핏방울이 흐르도록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응답은 하나님의 뜻에 맡겼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중보기도에 가장 가깝지만 중보기도가 아닌 예로 셋을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전 백성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을 예표하는 어린 양의 피로 인해 용서해주신다는 데에 초점이 모이고 그것도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면 대제사장은 죽었어야만 했습니다. 모세 율법에 규정되었어도 하나님이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있기에 완전한 중보는 아닙니다.

 

둘째로 모세가 금송아지 배역 사건 때에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출32;32) 그러나 모세로 새로운 민족을 세우는 것은 중지했으나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출32:35)고 기록했듯이 그의 기도는 온전히 응답되지 못했습니다. 모세도 백성과 하나님의 중간에서 죄 사함을 보장하지 못했고 인간 선지자인지라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도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해달라고 간구(정확히는 항상 근심하고 마음으로 간절히 소원)했습니다.(롬9:3)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자기들 민족만을 현실적으로 높여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 또한 간구의 내용은 중보였으나 그 응답은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지자, 제사장, 사도들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성경이 완성되고 무엇보다 성령이 각 신자에게 내주하고 있습니다. 중재자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무리 간단한 기도라도 그 응답을 인간 신자가 보증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죄 사함이나 구원을 위한 제사장적인 기도는 할 수 있고 또 그런 기도에 집중해야 하지만 중보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성경이 증언한 그대로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이며 중보기도를 하는 분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예수님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사역 중에 이 땅에서 행하신 기도 전부도 중보기도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7,8)

 

하나님이 못하는 일도 있다.

 

언어란 다수의 사람이 오래 사용하면 그대로의 의미로 굳어지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 축복(祝福)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신자가 하나님더러 복을 빌어라고 명하는 뜻이 되므로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뜻은 모르고 “하나님 복을 내려주십시오”라는 의미로 오래 사용했기에 이제는 완전히 그런 뜻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지금 다들 틀린 의미인지도 모르고 남을 위해서 기도만 하면 중보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또 성령님이 신자를 대신하여 간구하는 중보기도를 다르게 표현할 적당한 한글 단어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단순히 ‘합심기도’ 혹은 ‘이타(利他)기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행하는 어떤 기도도 중보가 안 되므로 아예 그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보증을 못하므로 합심기도나 특정한 기도자나 팀이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응답이 된다고 미리 확정 짓거나 응답 잘 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이는 성경에 없는 내용으로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렸습니다. 그분이 아무리 신자를 사랑하고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뻐하신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는 법은 없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예수님은 구하는 것마다 받는 것이 아니고 구하는 이가 받는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전능성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이 하지 않는 것, 심지어 하지 못하는 것도 그분의 전능성에 포함됩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는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지구를 멸망시키는 일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신자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느 것에도 영향 받거나, 좌우되거나, 강요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만 행하시는 유일한 존재이므로 전능하신 것입니다.

 

만약 합심기도나 특정 기도자나 팀에 따라서 응답이 더 잘된다면 그런 형식과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이 영향을 받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이라 그런 법은 절대 없습니다. 그것은 또 아리바바가 “열려라 참깨” 하면 보물을 숨긴 동굴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처럼 일종의 주문(呪文)과 같아집니다. 기도의 형식이나 기도자의 열성과 성실성 등은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응답하는 데에 단지 참고사항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오직 당신의 뜻에 따라 기도를 응답한다면 기도자가 가장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기도의 내용이 그분의 뜻에 합당한지 여부를 살펴봐야 합니다. 아무리 수많은 신자가 광장 같은데 모여서 하늘이 떠나갈 듯 기도하든, 믿음이 좋고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하는 신자들이 소규모로 조용히 기도하든 그 원리는 동일합니다. 반드시 기도제목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데에 도움이 되는 내용인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개별적 구체적인 기도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지 일일이 정확하게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분별력이 그렇게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기도하시면 됩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기도한 대로 응답 안 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은 미리부터 각오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자신의 뜻을 수정하는 것도 기도이며 무응답도 응답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도 기도입니다.

 

이타적(利他的)인 기도는 많이 할수록 좋다.

 

합심(이타) 기도가 자신을 위한 것인지, 남을 위한 것인지 물었습니다. 일단 남의 문제나 교회 사역 등을 위해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히 자주 또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성경에서 분명히 명하신 일입니다. 그런 기도의 영적 유익들도 아주 많습니다.

 

우선 질문자님이 “신앙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형제사랑의 의미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고 또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앙공동체로 모여서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권능은 물론 성도 개인과 그 공동체를 향한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함께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사랑실천과 영적성장을 위한 것이자 서로 기도해주는 것을 앎으로 인해 교제가 생기고 기도대상도 위로를 받는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옳습니다.

 

남을 위해서 기도하기에 자신의 감정과 욕심과 이해타산 등이 개입되지 않고 상대를 순수하게 섬기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기도제목을 꺼내 놓을 때에 약간의 과장, 가장, 위선의 소지가 내포될 수 있겠지만 그런 기도는 응답이 안 될 것이므로 미리부터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도들 앞에 자신의 기도 제목을 꺼내놓아야 하므로 개인적 욕심이나 불의하거나 비성경적인 기도 제목은 삼가게 될 것이며 그럼 기도에 대해 점점 더 깊이 배우는 계기와 훈련도 됩니다.

 

기도한 대로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에는 기도를 통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지혜나 믿음과 결단력을 얻어서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응답이 함께 기도하는 다른 성도에게 임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단순히 교제하는 가운데도 해결책이나 도와주는 손길들이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문제를 알아서 서로 도울 수 있기에 그 공동체는 더욱 하나가 되고 자기들이 체험한 사랑을 그 모임 밖으로까지 베풀 수 있습니다. 합심기도를 통한 이런저런 영적 열매를 누리다 보면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분별력이 더욱 깊어집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아주 게으른 존재이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이 너무 힘들며 또 기도할 때에 온갖 잡생각이 많이 든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면 그런 장애요소들이 제거됩니다. 단순히 함께 모여서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와 은혜가 됩니다.

 

말을 맺자면 합심기도의 사람 숫자나 형식이 기도 응답을 더 잘 받는 방안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의 유익은 상기에 간단히 설명 드린 것 외에도 또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그분이 함께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서 당신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고 확장해 나가길 원하십니다. 합심해서 다른 이와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분명히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시고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십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도한 대로의 응답이 아니라 당신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뜻과 계획에 따라 당신의 일이 진행되고 기도한 성도들은 그 열매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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