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5:17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질문]

목사님, 딤전5: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 자주 접하는 말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목사를 의미하며 따라서 평신도들은 목사를 존경함은 물론 나아가 목사님들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고 부연 설명하곤 합니다.

큰 틀에서 잘못된 설명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되겠으나 저는 본질적 의미에서 위의 설명은 다소의 미비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은 대부분 교회 전체를 향한 공적인(공동수신)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서신서들, 즉 디모데서와 디도서와 빌레몬서 등은 개인수신 형식의 서간문입니다.

이 개인 신형 서간문(성경)의 내용 또한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서신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성도들 모두에게 성경적 권위를 지닙니다(당연한 일이지요). 이런 의미에서라면 위의 목사님들의 설명은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개인 수신형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본다면, 일반적인 설명과는 다른 뜻이 발견된다고 봅니다. 즉, 본문(디모데 전서 전체도 포함)은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 사역중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임을 인식한다면 이 편지의 주수신인이 누구냐의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주수신인은 디모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이행 주체 또한 디모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목사인 디모데가 자기와 함께 사역하고 있는 장로들(단수가 아닌 복수)을 배나 존경할 자들(역시 복수)로 알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즉, 일반적인 설명과는 달리 목사가 장로들을 존경하라는 것인데 이는 존경을 표하는 주체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내의 각 지체 간에 누가 누구를 존경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만 교회를 이루는 지체 간의 성경적 행위지침은 '상호 존경'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장로를 포함한 평신도들)를 존경하고 성도들은 목사를 존경하라는 것이 성경의 본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제 생각이 타당하다면 목사님들의 설명은 당연히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글 및 영어 여러 역본의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위의 제 견해가 타당한지를 검토하기 곤란합니다. 따라서 헬라어를 잘 아시는 목사님께서 본문을 깊이 살펴보시고 성경 원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지닌 평신도의 어려움을 헤아리시어 좋은 가르침을 좀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샬롬.

[답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 할 것이니라.”(딤전5:17)

항상 예리한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셨던 방식 그대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전체적으로 원론적인 면에서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몇 가지 보충해서 설명해 드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하신 논지에 따라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헬라 원어의 뜻

본문에선 헬라 원어를 정밀하게 따져 볼만한 부분이 특별히 없습니다. 그 말은 영어나 한국어 번역에 하자가 없으며 번역된 그대로가 헬라어 원문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 되는 단어 네 개의 뜻을 아래와 같이 간단하게 살펴 보아도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뜻과 용법대로  해석을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즉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를 다른 사람에 비해서 배나 존경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장로: (presbuteros) 더 늙고, 손위 사람의 뜻을 가진 명사, 문자 그대로 長老(elder)이며 산헤드린의 회원을 지칭할 때도 있음,
-다스리는: (proistemi) 앞에서 서서 인도하고 실행하고 지배한다는 뜻
-말씀:  (logos) 논의 또는 동기, 특히 ‘신의 현현’(그리스도), 계산, 이유, 교통, 말씀,  교리, 명예, 의도, 문제 등 여러 용례가 있음, 여기선 당연히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가르침: (didaskalia) 교훈(기능이나 지식), 교리, 학문, 가르침

결국 문제는 본문에서 지칭하는 장로가 어떤 사람인가 인데 바울은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Rulling Elder)“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Teaching Elder)입니다. 그리고 이 둘 중에도 특별히 가르치는 장로를 더 많은 존경으로 대하라고 했으니 둘은 분명 다른 직분이었습니다.

그럼 이 장로가 지금 현재로 치면 어떤 직분인가가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에는 특별히 현재의 목사와 같은 직분이 엄격하게 구별되거나 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설명한 대로 교회의 행정과 성도의 치리 문제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회중 가운데 존경 받고 신실한 년장자가 맡아서 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교회가 대형화 조직화되면서 전자의 치리 장로가 현재의 장로로, 후자의 가르치는 장로가 현재의 목사로 전문화, 특성화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직분상의 특성 때문에 자연스런 결과로 목사직에 권력(power)이 아닌 우선적 권위(authority)가 부여되었습니다. 본문에서 가르치는 장로를 가장 많이 존경하라고 권면한 그대로 시행된 것입니다.

2. 디모데의 직분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질문자처럼 디모데를 지금의 목사로 보면 한가지 해석상의 난제가 발생합니다. 즉 두 종류의 장로가 있기 때문에 “목사가 치리 장로를 존경하라”고 하는 뜻은 맞지만, “목사가 교회 안의 또 다른 목사를 존경하라”는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모순된 뜻이 되어버립니다. 초대 교회에선 현재 같이 여러 명의 목사들(장로나 감독의 의미가 아닌 현대 교회 직분 상의 목사 직분)이 있지 않았으므로 목사가 스스로를 존경하고 대우하라는 뜻이 되거나, 간혹 가르치는 장로가 여럿인 교회였다 할지라도 목사가 목사를 존경하라는 아주 제한된 의미가 되어버리니까 말입니다.

혹시라도 여기서 가르치는 장로를 오늘날의 주일학교 식의 교사로 판단해서 목사가 교사들을 존경하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주일학교는 산업혁명으로 공장이 대형화되어 학교 대신 공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당한 가난한 아이들을 교회에서라도 공교육을 시키기 위해  1780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제도입니다. 그 이전에는 교회 안에 현대식의 성경공부 제도는 없었습니다. 목사가 특수층의 극소수 성인들을 대상으로 그것도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겸임하였습니다.

물론 신약 성경에는 교사를 목사, 선지자, 사도와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고전12:28,29/ 엡4:11/ 딤후1:11) 초대 교회 당시는 성경이 필사본인데다 그 숫자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에 성경을 보관 계승하고 통달해서 가르쳐야 하는 직분이 따로 있어야 했고 또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한마디로 성경 자체를 책임지고 맡아 있는 직분으로 엄격하게 따져서 오늘 날의 교사 직분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고 현대적 의미에선 오히려 목사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딤후1:11에 바울도 스스로를 복음의 반포자, 사도,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한 명의 장로가 여러 직분을 겸임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오히려 ‘목사’로 표현된 직분(엡4:11)은 말 그대로 교인들을 양육하고 돌 보는 일(pasturing)만 전문으로 한 자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교사 직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본문과는 직접 연관이 없고, 최종적으로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디모데의 직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디모데를 일단 목사로 보고 해석을 시도했습니다만 저는 그 의견에 100%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여러 기록을 살펴 보건대 디모데는 바울과 거의 함께 일했던 선교 동역자였습니다. 바울과 동행했을 뿐 아니라 그의 대리자로서 여러 교회에 심부름을 했기에 한 교회를 오랜 기간 담임하는 목사라기보다는 순회 사역자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그 근거로 바울은 항상 디모데를 자기와 한 쌍으로 거론하고 있으며(고후, 빌, 골, 살전후, 몬, 1:1), 많은 심부름을 시킨 기록이 있습니다.(행17:14-15, 18:5, 19:22, 20:4, 롬16:21, 고전16:10, 고후1:19, 살전3:2,6) 예를 들어 바울이 고린도로 갈 수 없는 경우에 디모데를 보내어 자기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고 가르치게 했으며(고전4:17), 나중에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는 빌립보로 파송했습니다.(빌2:19) 바울이 그를 어느 누구보다 열정이 있고 헌신 된 것으로 평가 했기 때문입니다.(빌2:20-22)  

그리고 바울이 사역 말기에는 그에게 소명을 끝까지 지키라고 당부했으며(딤전1:18), 죽음을 앞두고는 디모데더러 자기에게 오라고 당부 했습니다.(딤후4:9), 디모데 생애 중에 어떤 때에는 그가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기록도 보입니다.(히13:23)

물론 바울이 디모데 전서를 기록했을 때는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맡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임시 직분(interim pastor)이었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4:11)고 했습니다. 나아가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고 했습니다. 바울이 현대적 의미의 목사로 디모데를 세웠다면 진보를 나타내라고, 즉 아직 많이 부족한 자라는 의미의 권면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여전히 그를 자신의 심부름꾼 내지 순회 사역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들과 전후 사정을 검토해 보면,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임시 목회를 할 때에는 아마 뚜렷한 담임 목사(장로)는 없이 서로 협동해서 목회를 했던 것 같습니다. 직분이 확연하게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이왕에 말씀을 가르치고 또 교회를 운영하는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존속하고 있었으니 그런 역할을 맡은 자들이 교회 내에 있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현대 교회처럼 담임 목사 제도가 없이 장로들이 그 역할을 분담해서 맡았다는 사실을 항상 주지하셔야 합니다.

반면에 디모데는 거짓 복음에 대항하여 바울에게서 전해 받은 참 복음의 진리를 다시 보충해서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이자 교회 설립자인 바울의 대리자였던 그로선 비록 연소하지만 중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것은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사람을 세울 때에 자격 기준과 목회 방침에 대해 바울이 상세하게 가르치려 했고 또 기존의 장로들(치리 장로, 교육 장로)을 절대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더 존경하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나이든 담임 목사가 있는 기존 교회에 교단에서 한시적으로 교회 운영을 감사(監査)하고 또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러 젊은 목사를 파견한 셈입니다. 그러면 젊은 목사를 파송한 측에선 더더욱 기존의 목사를 존경하되, 진리에서는 양보하지 말고, 실제 삶에서도 가르친 대로 실천하며, 연소한 것으로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겠습니까?

3. 개인적 서신으로서 성경

물론 디모데 전후서는 분명히 바울이 한 개인인 디모데를 수신자로 향한 서신이자 아직 신약 성경이 정경화 작업이 이뤄지기 훨씬 전에 쓰여졌습니다. 그 말은 바울이 쓰고자 하는 내용이 아무리 성령의 간섭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절대적 진리였다 할지라도, 정작 저자 본인으로선 지금 같이 정경화된 성경으로 채택되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을 향해 쓸 수 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특별히 신약 성경에는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 중에도, 지금처럼 모든 사람이 다 읽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일부 계층만을 염두에 두고 저작된 책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태 복음은 유대 율법과 전승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누가 복음은 그렇지 못한 이방인들을 주독자층으로 저작되었습니다. 히브리서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직분과 영단번의 완전한 제물로서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또 사복음서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전기이지만 각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마태는 율법의 완성자로서의 예수, 마가는 권능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누가는 이방인도 사랑하는 예수, 요한 복음은 영생을 주며 성령을 약속한 독생자 예수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의도한 독자들만이 강조된 주제에만 의존하여 그 성경을 해석하면 복음서로서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듯한 결과를 가져 옵니다.

사 복음서는 반드시 네 명의 저자에 의해 그런 주제들로 기록되어졌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완전하게 그려질 수 없고, 또 하나님이 모든 세대의 독자들에게 계시하고자 하는 당신의 뜻이 오해 될 수 있습니다. 네 책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불완전한 복음이 됩니다. 그러나 저작 당시 네 명의 저자는 하나님의 그런 완벽한 계획까지는 모르고 저작했습니다.

히브리서의 경우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뜻으로 저작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동물 희생제사에 익숙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대속제물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너무나 잘 설명해주는 책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유대인보다 비유대인에게 훨씬 은혜로운 결과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성경의 정경화에 숨겨진 하나님의 심오한 뜻이자 풍성한 은혜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아시는 대로 저작, 기록, 보관, 필사, 전승, 수집, 정경화, 번역 모든 과정에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간섭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디모데 전후서만 아니라 그런 특정 독자 대상의 책들도 결국에는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로 자리 매김하는 데 전혀 하자가 없었습니다. 그런 책들의 필사본이 교회마다 널리 회람되기 전까지는 당연히 개인적인 혹은 특정 독자 위주의 내용으로 해석되어졌겠지만, 일단 회람된 이후부터는, 즉 초대교회 당시부터도 하나님의 일반적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 말은 개인적 서신이라고 해서 꼭 그 개인에게만 적용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 쓰여진 당시 상황, 본문의 문법적 뜻을 알아 보기 위해선 꼭 필요하고 또 먼저 그런 해석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정경화 된 이후에는 당연히 모든 신자가 독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의 일반 진리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 하에 이뤄진 정경화로 인해 디모데전후서의 성격이 개인적 서신에서 일반적 서신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4. 문맥상의 해석

상기의 제 보충 설명들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점검할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본 구절의 앞뒤 문맥과 다른 성경에서는 어떤 해석을 지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8절은 “성경에 있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쒸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18절은 17절의 보충 설명으로 디모데가 존경해야 할 대상인 장로들을 받아서 수식하고 있습니다. 즉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듯이 장로도 존경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보충 설명으로 인해 바울이 말한 장로가 풀타임 사역자라는 해석이 더 타당성을 가지게 됩니다. 초대 교회는 몰라도 현대 교회로 치면 사례비를 받는 사역자란 자원하는 봉사직 장로가 아니라 풀타임 사역자인 목사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율법의 규정(신25:4)을 인용하여 일군의 삯을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소가 곡식을 밟아 떨 때에 망을 씌우지 말고 그 자리에 떨어진 이삭을 먹도록 해야 하듯이, 일군도 자기가 일한 일터에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곡식 떠는 소의 비유를 고전 9:1-11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구절의 뜻을 오늘 날로 적용하면 두말할 것 없이 풀타임 사역자는 당연히 자기가 사역하는 성도들로부터 존경과 사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을 ‘권’이라고 표현해 너무나 마땅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록 바울 본인은 복음 전파에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자신의 생활 경비는 장막 만드는 일과 선교 헌금 등으로 충당하여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았을지라도 말입니다.

바로 이 18절의 부연 설명으로 17절을 디모데가 목사임을 전제하여 해석하는 것은 무리임이 판명됩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목사가 또 다른 풀타임 사역자인 목사를 배나 존경하고 대우하라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서신 저작 당시는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고, 또 디모데 개인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그더러 장로들(그 중에는 지금의 장로와 목사 둘 다 포함하여)을 존경하라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성경은 모든 평신도 독자들을 수신 대상으로 목사와 장로등 교회 안에 직분을 맡은 모든 자들을 존경하되, 특별히 연장자들은 갑절로 존경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결론

보충 설명이 장황하게 길어졌습니다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질문자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교회를 이루는 지체 간의 성경적 행위지침은 '상호 존경’이라는 것 하나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목사들이 존경이든 사례든 두 배 혹은 그 이상을 받고자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과 모든 당시 상황과 또 성경 해석상의 원리에 따라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설명이 잘못되었으니 꼭 바꾸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약간의 보충은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해석에 고의로 기대어서 대우만 받으려 하는 잘못된 목사가 있다 할지라도 해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지 않고 진정으로 교회 안에서 서로 존경하는 겸손한 목회자들, 심지어 바울처럼 자비량으로 사역하는 목회자들도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물론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성도들에게 가르칠 때에 반드시 이 서신의 주 수신자는 디모데로 개인적 서신이라는 것은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질문자님의 지적대로 상호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10/25/2005

정순태

2005.10.26 13:22:45
*.152.78.29

목사님, 자세한 답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95% 공감입니다!

5%의 이견은, 디모데의 직분에 관한 것으로, 목사님은 사도에 버금가는(?) 순회사역자로 말씀하셨지만, 조금 달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란 특수직임으로서 13명으로 엄격히 제한되며 직임의 승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 교리는 사도-속사도-교부-교황으로 사도권이 이어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저는 이 견해를 옳다고 보지는 않습니다(심각한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므로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가 아는 영적 직분의 종류로 분류하기 어려운 분들이 몇 분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 예를 들면 바나바 같은 분입니다. 분명 사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속사도도 아니며, 굳이 말하면 장로라 할 수는 있을 것이며 또 순회 사역자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순회사역자라는 직분은 성경이 정하신 교회의 직분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세기까지의 초대교회의 확장형태는 사도 및 장로(집사 포함)의 전도에 의한 개척형태(사도바울에 의한 모든 교회들과 빌립 집사에 의한 사마리아 교회 등)와 전도자가 밝혀지지 않는 자생형태(안디옥 교회와 로마 교회 등)의 2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말해, 성경 기록만으로 볼 때, 바울 이외의 모든 사도들은 이방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유대지역에서조차 전도하여 교회를 개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겨우 전승에 의거할 때에만 사도들의 유대 및 이방 전도의 예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성경에 직분명이 기록되지 않은 ‘순회사역자’라는 직분을 가질 수 있는 분들은 아주 제한된 소수일 것입니다. 즉,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와 실라와 디모데와 디도 등이겠지요(아볼로도 포함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제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순회사역자’라는 직분(?)을 현대적으로는 어느 직분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한마디로 디모데는, 사도/속사도/교부/교황이 아니며, 오늘날의 교회에 연결시킬 수 있는 직분은 오직 ‘목사’ 이외에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디모데를 ‘목사’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목사님과 상이한 5%의 이견 부분입니다!

결국, 목사님과 저의 이견의 핵심은, 디모데를 집단지도체제 하에서의 한명의 목사로 보느냐 아니냐인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늘 지니고 있던 또 하나의 의문으로서, 아래의 보충설명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지도체제에 관한 것으로서, 초대교회들은 현대교회처럼 담임목사에 의한 일인지도체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과 몇 명의 장로들(예를 들면 야고보와 바나바 등)의 집단지도체제였고,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은 안디옥 교회도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한 5명의 집단지도체제였습니다(행13:1). 선지자라고 기록된 유다와 실라(행15:32)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질문 드렸던 딤전5:17에도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로 기록됨으로써, 에베소 교회 또한 집단지도체제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의 직임을 현대교회에 부합되는 직분과 연계시키려면, 집단지도체제에 속하는 1인의 목사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답변에 대해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혹 시간이 나신다면 저의 또 다른 의문, 즉 “초대교회는 집단지도체제였는가?”에 대해서도 목사님의 답변을 부탁드려도 되겠는지요?

운영자

2005.10.26 14:56:15
*.108.170.228

몇 가지 서로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보충 설명드리겠습니다.

디모데는 사도에 버금가는 자이거나, 바울이나 바나바 같은 위치와 역할을 한 순회 사역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곳에 정착하여 한 교회를 오래 담임하여 사역하지 않고 바울의 요청에 따라 여러 곳을 돌아 다니며 사역을 했다는 단순한 뜻에서 순회 사역자라고 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과 개인적 관계가 아주 밀접했던 제자이자, 개인 비서, 부교역자(요즘식으로치면), 대리인, 심부름꾼 등의 역할을 주로 맡은 자였다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직분은, 초대 교회만의 시대적 상황(context)에서 이해해야 할 줄 믿습니다. 복음이 최초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에도 전해져야만 하는데 전혀 종교적 조직이나 체계가 없는 맨주먹에서 사도들이 개별적으로 전도를 행하다가 구원 받는 숫자가 늘어나자 자연적으로 교회로 발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종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님의 인도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직분을 오늘날 세계적 종교가 되었고, 그것도 가장 민주적 체계(제 뜻은 중앙집권적인 조직이 아닌 개별교회 중심 체계라는 뜻에서, 교회마다 의사결정 과정의 민주성 여부는 불문하고)를 갖춘 개신교의 직분과 정확하게 상호 연결시키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며, 지적하신 바나바처럼 초대 교회에만 있었던 직분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디모데도 초대 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직분일 수 있습니다. 바울을 떼고는 그를 생각할 수 없고, 또 그의 사역 거의 모두가 바울을 위한 것이었고, 더 이상 바울 같은 자는 교회사에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제가 따로 답변드릴 것 없이 집단지도체제였습니다. 제 글에서 목사가 여러명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는데, 지적을 받고 나서 조금 수정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당연히 치리장로, 교육장로(교사로도 표현됨), 양육하는 장로(목사라고 표현됨), 감독, 집사까지 공동으로 의논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맡았던 역할만 달랐을 뿐입니다.

그러다 차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장로 중심으로 조직이 정비되어 갔지만 정확하게 언제, 어느 교회에서 어떤 형태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조직의 정비도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자 성령님의 간섭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사실은 초대 교회 당시도 바울이 여러 교회를 개척했고 직접 말씀을 전하고 치리하고 양육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개척 교회) 목사 역할을 맡은 가장 전형적이자 거의 유일한 인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교회에서 바울의 위치가 어떠했으며 또 성도를이 그를 어떻게 대우했겠습니까? 당연히 요즘 식의 목사 대우였을 것입니다. 한 가지 정기적 고정 계약된 사례금이 없다는 것 빼고는 말입니다.

제 뜻은 초대 교회 당시의 조직과 직분이 아무리 지금과 달랐다 할지라도 기독교 태동기 때 일시적으로는 당연히 그런 형태가 될 수 밖에 없었다는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지금과 같은 조직으로 교회가 바뀔 것이라는 개연성 내지 필연이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현재의 교회 조직을 초대 교회에 맞추어야 하지 않는가, 구조적으로 뜯어 고쳐야 되지 않는가라고 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의 교회에도 어떤 형태가 되었든 집단지도체제의 모양새를 갖춘 조직이 많고 또 실제로 그렇게 운용하는 민주적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목회 철학을 구현하려는 깨인 목회자들도 많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썽이 나는 것은 조직이나 체계의 잘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나아가 교회의 본질은 가시적 조직체가 아니라 인간끼리의 관계입니다.

님의 의견대로 디모데를 오늘 날의 목사로 해서 딤전5:17을 paraphase해서 쉬운 말로 고쳐 봅시다. 제 글에서 밝힌대로 "목사는 치리 장로를 배나 존경하고 교육장로(현재의 목사)를 그보다도 더 존경하라"가 됩니다. 집단 지도 체제 하에서 사역자들끼리 서로 존경하라는 아주 제한된 의미가 되며, 또 18절과의 연결도 매끄럽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제가 "3. 개인적 서신으로서의 성경" 부분을 길게 다른 성경의 예를 들어 설명한 이유입니다. 서신 저작 당시는 디모데가 목사였고 개인적 서신임이 분명했을지라도, 이미 저작 당시에 성령의 인도로 평신도에게 주는 서신으로 하나님은 예비하시고 바울에게도 유기적으로 영감을 작용시킨 것입니다.

어쨌든 서로 좋은 의견들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또 다시 하나입니다. 님께서 결론지은 그대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상호 존중입니다.

P.S. 집단 지도 체재에 대한 답변은 이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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