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6:6,7) 언약궤 운반의 비밀(2)

조회 수 1085 추천 수 56 2009.11.19 2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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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운반의 비밀(2)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삼하6:6,7)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내려오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궤를 만진 웃사가 즉사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율법에 규정된 대로 제사장이 어께에 메어 운반하지 않은데다 손으로 거룩한 궤를 만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궤를 성의껏 모시려는 선한 뜻은 있었지만 그분의 계명을 순수하게 순종치 않은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련의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각본이 사전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일이 하나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나 웃사에게 잘못이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각본은 너무나 오묘해서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일이 인간 스스로의 판단, 해석, 결단, 행동한 결과일 뿐으로 당연히 그 죄책도 전적으로 인간에게 귀착됩니다.

여전히 죄에 묶인 인간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또 그 차원을 넘어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도록 모든 일의 경과를 계획, 주도, 결말지었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재량에 완전히 맡긴 채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 뜻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당신이 계획한 바가 수정, 연기, 포기되는 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완벽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서 모순, 왜곡, 이상(異常), 기형은 생길 수 없습니다.

앞글에서도 밝혔듯이 아비나답의 집은 산 위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궤를 수레에 싣고 내려와도 안전할 만큼 길이 잘 닦여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비록 가파른 산길은 인간보다 우마(牛馬)가 잘 탈 수 있지만 법궤를 짐승에게 메게 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율법의 규정 하나 몰라도 상식적으로도 어불성설입니다. 따라서 수레 통행이 힘들었거나 충분히 가능했거나 간에 반드시 제사장이 메었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했지만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나곤의 타작마당까지는 잘 도착했습니다. 고래로 타작이란 통풍이 잘 되는 약간 고지대의 넓은 공터에서 시행합니다. 산길을 힘들게 내려온 소가 여유롭게 한 숨을 돌릴만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소들이 날뛰었습니다. 분명히 뭔가에 놀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각본이라고 해서 소에게 영적인 기운을 갑자기 집어넣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를 강물로 뛰어들게 만든 것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십중팔구는 쥐에 놀랐을 것입니다. 타작마당에는 항상 곡식 낱알들이 많이 떨어져 있기에 쥐들의 놀이터인 셈입니다. 평평한 바닥인지라 소가 헛디디거나 돌부리에 걷어 채일 확률은 거의 제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곤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이 “준비 됐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 타작마당을 이번 언약궤 운반 행렬이 중도에 반드시 통과하게끔 이미 마련해 두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쥐들이 많아서 소가 뛰어 놀랄 것이며 또 그러면 웃사가, 사실은 누가 되었든지 간에 궤를 붙잡으려 손을 댈 것을 아신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블레셋이 탈취해 간 궤를 돌려보낼 때에 행했던 모든 일들, 나아가 궤가 빼앗기는 사건까지 그 전부가 하나님이 연출하신 원대하고 영원하신 드라마였던 것입니다. 요컨대 쥐를 준비시켜 소로 놀라게 만든 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삼상6:3-5)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법궤를 탈취해 간 아스돗 사람들에게 독종의 재앙을 내려 심판했습니다. 우상숭배에 물든 그들은 이스라엘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들어 속건제로 바쳤습니다. 독종의 형상과 쥐의 형상을 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쥐가 염병을 옮기는 숙주임을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 기록의 정교함이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이방 족속의 과학적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고 또 그것을 정확히 기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블레셋에게 독종 재앙을 내린 바로 그 쥐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블레셋의 전례를 따라 지금 소 수레로 궤를 운반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이스라엘더러 그 쥐를 보고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다윗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은 단순히 법궤를 제사장 어깨에 메지 않았다는 데 국한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것 중에서 최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바치고 행하지만 하나님이 정작 자기 백성에게 바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신께 온전히 항복하여 당신 뜻대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신앙이란 신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따라오는, 특별히 바친 만큼 비례해서 따라와야만 한다고 착각하는, 하나님의 능력만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 앞에 신자가 자신의 영적인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서 당신의 긍휼부터 구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웃사’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힘, 담력, 위엄, 안전 등입니다. 산길을 내려와야 하는 수레를 앞서 끌고 호위할 정도면 힘이 장사이고 담력이 대단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웃사는 자기 힘만 믿고 그 소중하고 귀한 법궤를 목숨 바쳐 지키리라 결단하고 또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자신의 힘에서 자기 안전을 구하는 자입니다. 스승을 골고다 십자가로 절대 보내드릴 수 없다고 큰소리친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단에 놀아났다는 야단만 맞았지 않습니까? 십자가 처형 직전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칼로 베었지만 또 다시 예수님께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꾸중만 들었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당신이 이름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웃사가 막지 않았어도 궤는 당신께서 지켰을 것입니다. 아무리 소가 놀라 뛰어도 언약궤는 공중에 떠있고 수레만 박살나는 기적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정반대로  언약궤가, 심지어 그 내용물까지 그 자리에서 박살이 나도 당신의 이름에는 전혀 누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새겨준 두 돌 판을 금송아지 앞에서 배교하는 백성의 죄악을 보고 통분하여 던져 깨트린 모세를 단 한 번도 야단치지 않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다우심을 오로지 자증(自證)할 뿐이며 세상 어느 것으로도 털끝만치도 영향 받지 않습니다. 실제로 지금은 언약궤가 완전 실종되어 도무지 찾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영원토록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 최대한 노력을 경주해도 말입니다. 만약 언약궤가 나타나면 궤를 열심히 섬기는 신흥종교가 틀림없이 등장할 것 아닙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와 속죄의 상징인 언약궤는 절대로 인간의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오락액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될지언정 말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공상소설로 전락시키는 일에 가장 열심을 낸 스필버그 감독이 유대인에다 사이언톨로지 이단의 신봉자라니, 이야말로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이지 않습니까? 현대의 또 다른 웃사가 사람들의 존경과 경외를 도맡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웃으실 뿐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라는 책에서 저자 토미 테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논리의 고속도로 한 복판에 과속 방지턱을 설치하시는 습관이 있다.” 다윗은 최고의 정성을 바쳐 하나님을 잘 모시겠다는 인간적 논리로 이제 막 안정된 나라를 고속도로 위에 올려서 질주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내를 모를 리 없는 하나님은 나곤의 타작마당을 과속 방치턱으로 이미 설치해 놓았던 것입니다.

또 예의 책에서 테니는 “언제나 당신의 영광을 옮길 특별한 그릇을 정해 두신다. 바로 그분의 거룩하심을 경외하고 존중함으로 성별된 사람들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율법의 문자적 규정에 능통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하고도 온전한 뜻을 확실히 깨달아 그분께 진정으로 겸비하게 항복한 자들만이 궤를 옮길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온전한 순종의 뜻으로 어깨에 메도록 한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신자의 온전한 죽음 위에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운행 통치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언약궤 같은 것에 제한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속죄소의 두 그룹들 사이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궤를 반드시 제사장더러 어깨에 메라고 명하며 그것을 어기고 직접 손을 댄 웃사를 죽이는 심판을 내리시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상자 속에 갇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이 상자를 떨치고 나와 인간의 자의적인 계획을, 그것도 하나님을 지극히 잘 모시려는 선의를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신자가 환난으로 고통스러울 때는 하나님 앞에 자연히 낮아지게 마련입니다. 비록 빨리 구출 받아야겠다는 조급증과 고집은 늘지언정 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위해 모든 열심과 정성을 다해서 잘하고 있다고 자부할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그분을 메려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자기 이름을 메려는 유혹에 쉽게, 스스로 인식은커녕 감도 못 잡는 경우도 많음, 빠져듭니다.

바로 그 때에 신자 앞에 나곤의 타작마당 같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방해물들이 나타납니다. 그대로 두면 필연적 실패가 기다리고 있는 신자를 하나님이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기에 그 길에서 되돌리려는 사랑과 긍휼을 베푼 결과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지금 빠져있는 문제와 고난이 얼마든지 하나님의 준비된 방해물일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신자는 당장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잔뜩 들어가 있는 어깨의 힘부터 빼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내가 기도를 뜨겁고도 열심히 했으니 하나님은 마땅히 나를 빨리 구출해 주어야 한다는 신앙적(?) 고집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는 신자가 거룩해진 데서만 일어납니다. 또 거룩은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서 그분께 대해 완전히 항복, 순종하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방해물을 많이 만날수록 오히려 거룩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단 지금까지 오던 길과는 방향을 달리 할 때만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신앙여정은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 소견에 따라 제 멋대로 살다가 죄악, 징계, 회개, 구출의 악순환만 겪을 뿐입니다. 자기 종교적 실력으로 하나님을 잘 모시려는 것도 당연히 자기 소견에 따라 행하는 일의 하나, 아니 신자가 가장 자주 범하는 대표적 잘못이자 죄임을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11/19/2009

김광찬

2009.11.20 00:37:34
*.169.140.6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을때 바로 그 때 나도 같이 죽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포도나무에 접붙임바 된 가지로, 새로 주신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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