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와 결혼은 분명 다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6,17)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만 하는 이유는 부부로서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좋을 때만 같이 살다가 어느 쪽이라도 싫어지면 아무 미련과 보상 없이 깨끗이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당연히 자녀를 갖거나 미래 대책을 세우는 등의 일은 아예 안중에 없습니다. 간혹 사업에 공동투자를 해도 각자 명의로 따로 할 뿐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싫고 귀찮은 일은 전부 제거하고 단지 함께 살기에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성적 혜택만 취하자는 목적입니다. 두 사람이 분명 함께 사는 것은 맞지만 연합된 것은 하나도 없고 사실상 두개의 개별적 삶만 존재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부합할 때만 함께 하는 것뿐입니다.
이에 비해 결혼은 법적 책임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함께 미래를 도모하며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책임도 분담합니다. 동거가 각자가 자기에게 유익한 면만 따로 얻으려는데 반해 결혼은 함께 함으로써만 발생하는 유익을 얻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자연히 함께 함으로써 생기는 불편과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무리 힘들어도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목적입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동행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이 내주하여 평생을 떠나지 않고 인도 간섭하십니다.
그런데도 왜 신자들은 때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요? 아무리 기도해도 현재의 환난이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크게 도집니다. 거기다 세상에서 의인은 고난 가운데 있는 반면에 악인이 형통하는 것만 보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 정도를 넘어서 아예 실종된 것 같은 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신자와 함께 하는 것은 신자가 그분에게서 유익만 취하려는 동거관계가 아니라 책임과 고난도 함께 감수해야할 결혼 관계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그분과 동거관계에 있는 신자라면 그분의 동행에 의심을 갖지만, 결혼관계에 있는 신자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주여 하는 신자가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고난을 주려는 부모란 없는 법인데도 본문은 신자를 결혼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까지 비유하고 있음에도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가운데 대부분이 하나님께 오직 내 유익만 구하려는 기복적 신앙과는 거리가 상당히 멉니다. 현재의 고난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구해만 달라는 뜻이며 또 단지 외부 대적으로부터 지켜달라는 너무나 소박한 간구입니다. 아무리 자녀를 연단시켜 성숙하게 만들려는 뜻이 있다고 해도 이제 어지간히 자랐고 정말로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지금쯤은 제발 저를 구해달라는 탄식 내지 절규가 절로 나오는데도 감감무소식이지 않습니까?
대체 이런 신앙상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또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우리의 하나님이 실종된 것 같은 의아심과 환난에서 구해달라는 간구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따로 있는 것입니까? 예컨대 그분은 신자 모두를 아예 순교자의 길로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런 의아심은 우리의 연약한 체질에 의한 자연발생적인 것이라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환난이 닥치면 당연히 구해달라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신자가 환난 가운데 혹은 외부 대적으로부터 계속 시달림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의아심을 정죄하지도 않으며 구원의 간구는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렇다고 신자를 더 연단시키려고 시기와 방식을 조절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를 순교로 내모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딜레마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신자가 생각하는 믿음의 우선순위와 하나님의 그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먹고 마시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결론은 물론 그것이지만, 단순히 다시 강조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감수해야할 고난과 그로 인해 받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잇다는 뜻입니다.
현실적 고난은 아담의 원죄로 함께 타락된 피조세계에선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겪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신자를 향한 사랑과는 무관하게 죄에 찌든 인간들 사이에 항상 발생합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일시로 공중권세를 사단에게 맡겨 놓았기에 더 그러합니다. 물론 신자 본인의 잘못된 판단과 과욕과 죄가 함께 작용된 경우도 많습니다. 신자만 피해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요컨대 신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아야 할 일차적 보상이 이런 현실적 환난에서의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후사이긴 한데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후사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럼 신자가 받을 고난도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이요, 신자가 받을 영광도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의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처럼 단순히 현실적 고난을 받은 것도 아니요,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그 고난에서 건짐 받는 영광을 누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과 영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 않습니까?
그분은 이 땅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같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거룩하고도 온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더러 하나님 같이 신령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악과 흑암의 세력 앞에 절대적으로 담대하게 맞서라는 것입니다. 공의를 굽게 하는 불법과 부패와 거짓과 사기는 곁에도 가지 말며 돈을 사랑하지 않고 무정하지 않는 반면에 어렵고 힘들며 소외된 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며 섬겨야 합니다.
한마디로 돈만 사랑하려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사는 세상 사람과는, 아주 경건하고 의로운 종교적 방식을 동원한 자들까지 포함하여, 전혀 다르게 하늘의 방식으로 살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고난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멸과 비방과 핍박을 감수했습니다. 종국에는 십자가 죽음까지 순종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신자가 이런 고난을 기꺼이 받을 때에 예수님과 온전히 닮아가며 천국에서 그분의 칭찬을 받을 진정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현재 아무리 기도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고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도 이런 고난을 기꺼이 또 완전히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 아닐까요? 나아가 진정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참 영광에 대한 열망이 부족하기에, 아니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동거관계에 들어선 것만은 분명한데 확정적으로 결혼할 생각은 아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종교적 활동의 헌신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종교가들은 오히려 저주했습니다. “형식적”이라는 말이 기복적, 외형적, 습관적, 의무적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은 아예 참 신앙이 아닙니다. 대신에 신자가 받을 진정한 영광은 잠시 잊어버리고 여전히 현실의 환난의 고달픔에만 매달린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아직도 예수님과 동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진짜 정식으로 결혼했습니까? 동거인데도 결혼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10/16/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