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도 하나님이 세우신다.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 그 모든 길로 행하게 하옵시며 우리 열조에게 명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 여호와의 앞에서 나의 간구한 이 말씀을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옵시고 또 주의 종의 일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을 날마다 당하는 대로 돌아보사.”(왕상8:58,59)
솔로몬은 나라를 부강케 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율법에 금지된 행위들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많은 처첩들 나라의 우상들을 좇기도 했습니다.(왕상11:4,5)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 적은 많습니다. 수(壽 )나 부(富)는 구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만 구해서 지혜 뿐 아니라 구하지 않은 것까지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또 잠언과 전도서는 모든 세대의 신자가 공감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자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성전봉헌 기도를 마치고 백성들을 향해 축복하는 가운데 여호와께 다시 간단히 간구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짧지만 눈여겨보고 배워야할 내용이 나옵니다. 어쩌면 구약에서 주님 가르치신 기도와 필적할 만합니다.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을 높여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조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56,57절)
그리고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또 모든 길로,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행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계명을 지키게 해달라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조금 다른 점이 있지 않습니까? 셋 다 인간이 행하면 되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며 나아가 계명을 잘 지킬 테니까 이런 저런 것들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더러 자기 믿음마저 책임져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일은 신자가 책임져야 하고,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나머지 모든 일을 책임져 주셔야 정상이 아닙니까? 솔로몬같이 현실적인 부귀와 영광을 가장 많이 누린 왕이라면 드릴 수 없는 기도 같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가 부귀영광은 얼마든지 자기 지혜로 쌓을 수 있으니 자기 믿음만 하나님이 바로 세워주면 좋겠다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신앙진리가 그의 기도 가운데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더러 당신께로 향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당신께로 붙들어 주지 않으면 항상 당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다른 곳은 자기나 세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가장 먼저 드려야 할 기도는 자기나 세상으로 향하려는 마음의 방향부터 주께로 향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또한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조금은 이상합니다. 이미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졌다는 뜻 아닙니까? 그럼에도 우리 마음부터 주께로 향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면 그 마음이 주께로 향하지 않고 즉, 자기와 세상을 향해 있는 채로 기도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따지고 보면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며 주님의 길로 행하고 계명을 지킬 테니까 이런 저런 것 해주시옵소.”라고 하면 실제로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저런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마음에 소원은 하나님 쪽이 아니라 이런 저런 것에 가 있을 뿐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솔로몬의 이어지는 간구를 보십시오. 자신이 드린 기도가 주야로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고 또 자신과 백성들의 일을 날마다 살펴달라고 합니다. 기도한 그대로 이뤄지게 해달라는 너무나 지당한 내용이라고 지나쳐선 안 됩니다. 물론 문자적으론 그런 뜻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간구한 내용대로 하자면, 우리 마음을 붙들어주어서 우리가 주의 길로 행하며 계명을 잘 지키는지 항상 살펴봐달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와 항상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고 혹시 생기더라도 구원해 달라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나아가 그가 궁극적으로 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에게 보물이 되어 그의 마음이 가있는 곳이 어디였습니까?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60절)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앞에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되 이스라엘 백성의 풍요롭고 형통해지는 모습 가운데가 아니라,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그분의 길로 행하며 계명을 지키는 가운데 드러나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신앙이 대단했다고 여겨집니까? 그의 평생을 두고 신앙 점수를 매기기는 아주 애매하지만 이 당시는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또 지혜자답게 비논리적, 비합리적인 신앙은 갖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초자연적이긴 해도 비논리적 비합리적인 측면이 없는데도 오히려 그런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더 좋은 신앙이 되었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만...)
말하자면 그가 기도한 대로 신자의 마음이 여호와를 향해져서 그분 계명을 지키며 그분 뜻대로 길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지 않습니까? 또 그분의 뜻이 드러나면 당연히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 만민이 알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이 얼마나 간단하고도 정확한 논리입니까?
본문은 이미 말한 대로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의 결론 부분입니다. 또 성전봉헌기도의 주 내용은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백성들더러 바로 자신들의 믿음을 하나님더러 책임져 달라는 기도를 항상 하게 해달라는 뜻이 됩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찌어다.”(61절)라고 요청했듯이 말입니다.
믿음을 바로 세우고 주님의 계명을 지킬 책임은 당연히 인간 쪽에 더 많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 마음이 얼마나 끈질기고도 완강하게 주님보다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지부터 철두철미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지부터 애통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주님께로만 향하도록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붙들어 달라는 간구부터 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이 세상 앞에 드러나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내가 형통하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것인지 기도하기 전부터 따져야 합니다. 기도를 위한 기도부터 미리 드려야 하는 셈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그분의 영광은 자연히 드러납니다. 또 우리 믿음이 바로 세워지려면 종교적 실력을 향상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그분의 마음과 화합하면 자연히 이뤄지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행동도 그 화합된 마음에서 필연적으로 우러나오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요컨대 지금 우리가 간구하고 있는 기도대로 응답 되었을 때에 과연 세상 만민 앞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인지, 우리의 형통함을 과시하게 될 지부터 잘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흔히 좋은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주님 제가 믿음도 키우고 주님 계명대로 살 테니 주님은 대신에 이런 저런 것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라는 기도와 지금 솔로몬이 드린 기도를 세밀하고도 진지하게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12/15/2009
기도를 세밀하고 진지하게 비교해 보고 따져 보고....
얻게된 결론은 늘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자아만 보이는 것을....
그런 신앙상태임을 애통하며 매일 울 수 밖에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