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체면을 구기는 신자
“레위 지파만은 너는 계수치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민1:49)
민수기의 주제는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라”(1:3)고 했듯이 가나안 정복전쟁에 나설 군대 숫자의 점검입니다. 고대국가들은 군인과 납세자 숫자를 파악하고, 이스라엘은 또 땅 분배를 위해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가나안 정복전이라 군대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근본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막에서 제사장 역할을 감당할 레위 지파는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명했습니다. 조사에서 빠지는 것은 징집과 납세와 땅 분배에서 제외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업을 이룰 땅은 분배 받지 못했으나 거주할 집과 주변 밭은 할당 받았고 백성들의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전쟁에도 나가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대접만 받은 종교적 특권층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선 그들은 성전세는 물론, 받은 십일조에서 십일조를 내어야 했으니 납세 의무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었지만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陣)의 한가운데서 항상 함께 움직이는 성막을 보호할 의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성막 곁에 가까이 오는 자는 죽여도 된다는 명시적 허락까지 받았습니다. 이는 전쟁을 면하는 특권이라기보다 성막이 너무나 중하므로 목숨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키라는 뜻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레위인은 일상적 전쟁이 아닌 성막을 지키는 전쟁에 징집된 것입니다. 이웃나라와의 전쟁은 인간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또 전쟁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아니 전쟁을 치르는 때가, 가나안 정복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흔치 않습니다. 대신에 성막을 지키는 전쟁은 상시적(常時的)입니다. 단 한 순간도 쉴 수 없는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막을 치되 그 군대대로 각각 그 진과 기 곁에 칠 것이나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찌니라 하셨음이라.”(52,53절)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은 생업과 일반전쟁에 충실하고, 레위인만은 이스라엘 종교에 율법 규정과 다른 불의한 요소가 절대로 개입, 침범하지 못하게 그 사면에서 물샐틈없이 지키라고 합니다.
일차적으로 대적 군대에 의해 성막과 기물이 훼손, 파괴, 절도 당하는 일을 목숨 걸고 막아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임재하는 좌소이자, 당신의 은총과 권능으로 모든 열방과 특별히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통치하는 사역의 상징인 성막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끌라는 뜻입니다. 레위인은 언제 어디서나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회중에게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진의 한복판에 있는 성막의 사면에서 항상 지켜야 하기에 레위인은 절대 게으름을 부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임무에 태만하면 백성들 전체가 영적으로 영향을 받아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이스라엘 회중이 잘못하는 일을 그들이 바로 잡지 못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습니다. 일 년 내내 모든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교정하며 나아가 바르게 가르쳐 성숙시켜야 합니다. 혈과 육의 싸움은 다른 지파들이 감당하지만 레위인은 영적 전쟁의 최고 일선에서 지휘하는 여호와 군대의 장교입니다.
구약시대에 일반 전쟁도 주로 어떤 경우에 일어났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가나안 정복전쟁은 하나님이 명하신 예외적인 전쟁이었으므로 논의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반면에 다른 모든 전쟁이 사실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기에 그분이 주변 대적을 동원해서 징계 목적으로 주관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럼 그런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누구입니까? 죄에 빠진 백성이며, 나아가 그들을 잘못 인도한 레위인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단순히 율법의 제사를 수행하는 임무보다 오히려 일반전쟁을 이끌, 사실은 사전에 방지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레위인을 전쟁에서 면제시킨 것이 아니라 모든 전쟁의 지휘자로 더 막중한 임무를 맡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레위인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층으로 부름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전쟁을 이끄는 엄청난 책임이 있기에 백성의 십일조로 생계를 이어가게 한 것입니다. 다시 성경의 표현을 보십시오.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겉으로는 특혜를 누린 것 같지만 너무나 그 책임이 막중하기에 충성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직접 보상해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구약의 성막 내지는 성전이 맡은 기능과 역할이 오늘날의 교회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함께 모여 경배 드리고 또 죄를 멀리하여 영적으로 성숙케 되는 근본적 역할에선 동일합니다. 또 그런 임무를 사역자들이 주도하는 것도 일치합니다.
바꿔 말해 목사들이 성도의 대접을 받으며 특권을 누리는 신분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 년 내내 죄인들의 영혼을 주님의 보혈의 공로와 은혜로 깨끗케 하여서 거룩하게 성장시키는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또 그 책임을 성실히 지키면 자연히 회중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하나님도 반드시 은밀히 보상해 주십니다. 대접을 먼저 받으려 들면 삯군 목자가 되며 오히려 회중에게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게 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세상 불신자들을 향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서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권능에 붙잡혀 사는 자로서 그렇지 못하고 아예 흑암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 영적 진리를 밝히 보여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신자가 모인 곳에는 항상 성령의 진이 함께 임하기에 사단의 세력이 더 확장되지 못하게 패퇴시켜야 합니다.
신자는 빛과 소금 같은 존재로 세상 앞에 서있어야 합니다. 빛이 없어지면 흑암이 단 일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밀고 들어옵니다. 소금이 없어지면 당연히 썩어질 일밖에 남지 않습니다. 어떤 공동체라도 그에 속해 있는 신자 한 사람으로 인해 그 집단과 구성원들이 사단에게 넘어가서 부패하는 것을 막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금 많은 신자들이 이런 식의 기도를 예사로 하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또 그렇게 기도하라고, 나아가 그래야 믿음의 기도가 된다고 목사들이 가르치지 않습니까? “예수 잘 믿는 내가 망하면 하나님 체면이 세상 앞에 뭐가 됩니까? 결국 하나님도 망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나를 형통하게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거꾸로 알아도 유분수입니다. 신자가 현실적으로 형통하든 완전히 망하든 하나님이 망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신자 모두가 몽땅 망해도 당신의 영광에는 단 한 치의 손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데는 그분만의 완전하고도 거룩하며 신묘한 뜻이 있습니다. 신자 어느 누구도 그 뜻을 이해는커녕 추측, 상상조차 못 해도 그러합니다. 오히려 그런 기도를 하며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세상 앞에 하나님의 체면을 구기는 일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망하는 것을 염려해주는 것 같아도 오직 관심은 자기가 망하지 않는 데만 가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망하든 안 망하든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흥하면 하나님도 흥하고 자기가 망하면 하나님도 망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도 안중에 있을 리 없습니다. 또 하나님 영광을 위해 기도한답시고 교회에 열심히 모이는 데도 사회에선 기독교가 개독교로 변한지 오래인 까닭입니다.
11/1/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