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1:3-5) 복음에서 교제하고 있는가?

조회 수 1079 추천 수 49 2009.12.05 17: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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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서 교제하고 있는가?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1:3-5)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의 간단한 인사말 가운데 크리스천이 행할 교제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에서 교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뜻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런 교제를 하고 있습니까? 구역예배로 모여 기도하고 잠시 성경공부하고 교회 일을 의논한 후에 각자의 잡다한 인생살이에 대한 서로의 충고를 구하는 것입니까?

신자의 교제라면 당연히 불신자의 그것과는 달라야, 아니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신자들이 세속적이고 추한 것으로만 교제한다고 속단해선 안 됩니다. 함께 모여 타락하고 죄를 짓자고 공모하는 것은 조폭 말고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대다수가 물질을 더 풍성하고 화려하게 차지하는데 상호 도움이 되는 교제만 합니다. 모였다 하면 대학입시, 부동산과 증권 정보, 출세와 성공 이야기, 연예계, 스포츠 같은 이야기로만 지샙니다.  

한마디로 서로 간에 반드시 현실적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만 교제가 이뤄집니다. 최소한 상대에게서 자기가 배워서 따를만한 인간적 매력이나 실력은 있어야 합니다. 교제가 계속 이어질 수 있는 끈은 오로지 내가 상대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유익성입니다. 어느 순간 만나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 교제는 시들해지고 맙니다. 아무리 상대가 나를 향한 짝사랑으로 덤벼봐야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리면 그만입니다.  

물론 불신자들 가운데도 정말 선하고 의로운 교제를 나누는 자도 꽤 있습니다. 서로 따뜻하게 포용하며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고받는 따뜻한 정이라는 상호 유익성이라도 있기에 교제하는 것입니다. 간혹 때로는 혼자서 일방적으로 손해보고 희생하며 섬기는 교제도 있지만 그 경우는 인격적 교제라기보다는 단순한 적선(積善)으로 간주할 뿐입니다. 그 속내로는 상대와 나를 동등한 위치, 자격, 신분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딘가 우월한 내가 어딘가 열등한 남을 도운 것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의를 행하는 것도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상호유익성이든 자기만족이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유익이 교제의 최우선 목표가 됩니다.  

바꿔 말하면 신자끼리 모여 기독교 혹은 예수님 이야기만 많이 한다고 해서 “복음에서 교제”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자칫 종교인끼리 종교적 의견을 나눈 것에 그칠 수 있습니다. 불신자의 교제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유익이 최우선 목표라면 그 반대가 되어야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유익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합니까? 이 또한 종교적 행위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릴 유익이,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취할 유익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가난해진 심령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신자가 이 땅에서 필히 지켜야 할 율법의 두 강령이 무엇이라고 가르쳤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분명히 둘째 계명이 첫째와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이웃도 하나님 사랑하듯이 똑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웃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달리 자신의 유익이 최우선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유익을, 신자는 상대의 유익을 앞세우는 인간관계를 이어가는지 여부가 신앙유무의 가장 확실한 실제적 점검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쓴 바울의 성도 간의 교제에 대한 자세를 살펴보십시오. 상대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먼저 나온다고 합니다. 또 그들을 위해서 기쁨으로 간구하게 된다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빌립보 교인들도 바울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먼저 나오며 또 기쁨으로 기도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인들 상호 간에 그러함도 당연합니다.

이제 내가 과연 성도다운 교제를 하는지 점검하는 기준이 하나 생겼지 않습니까? “상대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는지?, 또 상대를 위해서 정말로 기쁨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지?”라는 두 가지 척도로 따져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상대 또한 과연 나를 위해 그러고 있는지도 함께 따지면서 말입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한다고 단순히 현실적으로 물심양면의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니까 더 많은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며 더 열심히 섬겨야 한다는 정도로 그쳐서도 안 됩니다. 그래선 불신자의 교제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또 그런 측면에선 세상 사람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교제에 빠진 것으로, 정확히 말해선 그들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교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지 않습니까? 또 그 사랑과 권능에 함께 푹 잠겨서 누리며 사는 것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상대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불신자는 상대가 내게 유익을 주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신자는 상대가 아무 유익을 주지 않아도 감사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무 감사 거리가 없는 데 억지로 감사하는 것은 자칫 도덕적 종교적 의무감을 강요하게 됩니다. 복음에서 교제해도 즉, 상대의 유익을 앞세워도 신자에게 돌아오는 유익도 분명히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 같이 여러모로 부족한 모습까지 사용해서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상대를 붙여 주시고 또 그럴 소원과 여유와 힘을 주셨지 않습니까? 성도간의 교제에선 상대도 나를 대할 때에 동일한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처럼 하라고 해서 꼭 힘들고 어려운 자를 찾아가 그 사랑의 강도를 극대화 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럴 믿음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아닌 모두에게,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자기 가족이나 섬기는 교회 성도들에게 현재의 내 있는 모습 그대로, 아무리 부족해도 그 부족한 것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 통과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유익을 받아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모자라고 너무 무능력해도, 아내가 항상 불평을 달고 살아도, 자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문제만 일으켜도, 아무 주는 것 없이 미운 성도라도, 나보다 훨씬 잘나가는 이웃사촌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통해 그들에게 유익을 끼쳐 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막상 나를 둘러보면 아무 볼 품 없으나 그런 상태마저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들어가는 통로로 씀에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십니다. 아니 그분은 그 때 그 장소의 그 상대에게 내 있는 그대로를 가장 완전한 맞춤형의 도구로 바꾸어 쓰십니다.  

이런 하나님 사랑의 도구가 되기 위해선 바울처럼 간절한 기도가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사랑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상대의 전부를 끌어안고서 주님의 사랑이 자기를 통해 흘러가도록 구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복음에서 교제란 결국 모두가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자의 자세로 서는 것입니다. 또 남의 유익을 위해 간구해주려면 이미 그 마음에 참 사랑이, 최소한 미움과 분노는 제거되고 불쌍하게 여기는 상태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상대를 위해 간구하면 벌써 복음에서 교제의 유익을 누리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성도간의 교제가 불신자의 그것과 가장 다른 점은 내 부족이 상대의 유익이 되고 상대의 부족도 내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성도간의 기도를 통해 상호 교통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의 사랑은 오직 부족한 자를 통해서 똑 같이 부족한 자에게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내 겉모습이 아무리 후패해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12/5/2009

김광찬

2009.12.06 00:11:43
*.169.140.6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7)
목사님 말씀에 "내가 어찌할꼬" 하는 찔림과 뉘우침 그리고 회개가 심령안에서 터져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이제 이 믿음의 길, 교제의 길로 기꺼이 나를 붙들어 매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복음안에서 신령한 교제들이 생기고 더 풍성해 질것을 믿습니다. 아멘 †

김순희

2009.12.06 03:34:20
*.254.209.141

그분의 사랑은 오직 부족한 자를 통해서 똑같이 부족한 자에게만 흘러가는 것.....
부족하기에 사랑할 수 있고 부족하기에 사랑 받을 수 있는 것임을.....
아멘!

soo

2009.12.07 16:14:40
*.130.98.204

복음안에서의 저의 교제가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 오늘 어떤 계기로
저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았고, 또 마침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다시한번 께닫게 되네요. 하나님의 참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되어진다는 것의 의미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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