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6:6,7) 언약궤 운반의 비밀(1)

조회 수 1423 추천 수 53 2009.11.19 01: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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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운반의 비밀(1)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삼하6:6,7)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사방 대적을 물리치고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자 백성들을 영적으로 바르게 인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오랫동안 기랏여라림에 방치되어 있던 법궤를 옮겨온 후에 성전을 짓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첫 걸음부터 쓰라린 실패를 겪습니다. 반드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함에도 수레로 옮긴데다 웃사가 손으로 만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엄중한 벌을 받았습니다.

이 실패를 보는 후대의 독자는 너무나 율법적인 하나님인 것 같은 의아심이 듭니다. 웃사로선 궤가 땅에 떨어져 파손되는 것을 막으려는 선한 의도에서, 그것도 순간적으로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운반토록 한 다윗에게 오히려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또 다윗은 왜 그렇게까지 율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까? 흥미롭게도 성경은 그런 의아심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해석의 열쇠를 숨겨놓았습니다. 지나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2절)

분명히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궤를 메어 오려” 했습니다. 또 그 궤는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궤 운반 규정뿐만 아니라 그 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미하는 바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메어”라는 구체적 행동을 진술했으니 운반한다는 일반적 의미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또 본서의 저자가 사건이 다 일어난 후 율법 규정을 주지(周知)시키려 그렇게 기록했을 뿐이라는  해석도 앞뒤 상황을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 수레에 옮겨 실으면서 만약 어깨에 메지 않고 손을 대었다면 그 때에 벌써 몇 사람이 죽었을 것 아닙니까? 전혀 그런 기록이 없으므로 분명히 궤를 어깨에 메었고 또 아무도 손 댈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웃사는 얼떨결에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입니다.

정작 따져야 할 사항은 그런 율법 규정을 알고도 왜 구태여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었는지 여부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전례를(삼상6장) 따랐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법궤를 탈취해간 아스돗 사람들은 독종 재앙의 벌을 받자 이스라엘 지경으로 돌려주기로 했고 그들로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새 수레를 만들어 실었습니다. 율법 규정을 모르는 그들로선 궤를 수레에 옮겨 실으면서 손을 대었을(성경에는 구체적 기술이 없음)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미 독종의 벌로  많이 죽임을 당한 데다 하나님은 율법과 무관한 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법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궤는 이스라엘 지경의 벧세메스로 무사히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삼상6:15) 이때도 분명 수레에서 내리는 절차를 했음에도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번제를 드려서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번제는 내리고도 한참 후에 드려졌습니다. 율법대로 정확하게 레위인이 어깨에 메고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벧세마스 사람들이 궤를 들어다 봤을 때는 즉, 궤 뚜껑에 손을 대었기에 그 자리에서 칠십 인을 즉사시켰습니다.(삼상6:19) 궤를 만지는 동일한 잘못을 범한 이방인은 살려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차 없이 중벌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당신의 백성에게 집중됩니다. 그들을 통해서만 이 땅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기 소원하는 신자일수록 더욱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 기분대로 행하는 변덕쟁이가 아닙니다.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당신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라도 당신의 언약과 계명들을 절대 변개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영광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조금치라도 더럽혀지거나 영향 받게 되도록은 절대 방치하지 않습니다.

웃사 개인적으로는 조금 억울한 죽음이라는 동정의 여지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궤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좌정하여 인간에게 속죄를 베푸는 상징인 법궤 운반에는 더더욱 당신이 정한 규정을 당신께서조차 결코 어기기 않음을 보인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 운반에 동원한 백성이 물경 삼만 명이었고(삼하6:1) 또 수레를 따라 많은 찬양대가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전 백성들 앞에서 당신의 율법의 온전함을 여실히 증명해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은 결국 무엇입니까? 율법 규정을 몰랐거나 지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율법대로 지키되 자기들이 제멋대로 덧붙여서 더 좋게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율법을 모르는 이방족속이 행한 방식을 전혀 여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모방 차용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뜻은 선했습니다. 하나님을 이왕이면 더 안락하면서도 화려하게 잘 모시려 든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신들의 열심과 정성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 보이려 한 것입니다. 어쩌면 뚜껑을 열어보다 처참한 벌을 받은 벧세마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하려고 수레에 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잘못인 까닭은 단순히 율법대로 순종하면 되지 인간 방식을 첨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畢竟)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법궤를 꼭 레위인 지파의 고핫 자손이  그것도 어깨에 메어서 운반해야 한다는(민4:15) 의미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 규정을 잘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보려는 것입니까? 규칙적인 사회생활에 전혀 익숙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만 단순히 규정만 잘 지키게 만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율법에 규정을 위한 규정이란 없습니다. 모든 계명마다 하나님의 고유한 귀한 뜻이 따로 있는 법입니다.    

법궤를 어깨에 메라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 기물을 최대한의 존경과 예의를 갖추어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처음 의아했던 대로 독선적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은 행군할 때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앞장서야 합니다. 모든 행사에 제사장이 진두에서 지휘하되 그 어깨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또 법궤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의 두 돌 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가 든 항아리입니다. 그 셋을 넣어놓은 뜻을 간단히 요약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신의 계명을 잘 지키면 아무리 광야 같은 환경에 처해도 일용할 양식은 당신께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책임져 주신다는 것 아닙니까? 또 그런 일을 제사장이 솔선수범 하면서 백성들을 잘 계도하라는 것 아닙니까?

요컨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하나님은 그들 앞장서서 가시며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잘 모시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 사이에서 당신 마음껏 당신께서 먼저 행하시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어깨 위에 모시는 것이 최대한의 예의도 되지만 최대한의 순종의 표시도 되는데 후자가 더 우선입니다. 또 순종이란 신자가 그분을 위해서 행하는 것보다 그분이 신자보다 앞장서서 행하시도록 하는 것에 더 초점이 모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인간이 만든 수레 위에 그분을 꼼짝 못하도록 모셔 놓았습니다. 소에게 멍에를 지워서 끌도록 했습니다. 거룩하게 성별된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을 짐승에게 대행시켰습니다. 나아가 제사장 지파라는 언급이 전혀 없는 웃사와 아효가 앞장서 수레를 이끌었습니다. 성경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그들이 제사장 지파라고 속단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산 위에서 궤를 실어내려면 상식적으로도 수레보다는 어깨에 메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그들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왕으로써 최대한의 진심과 성의를 보이려 한 것입니다. 다윗의 어깨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의 짐이 지어졌어야 함에도, 그 대신에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과시하려는 인본주의적 힘이 들어간 것입니다. 비록 그로 인한 보상을 바라는 의도가 없었다 해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진 자세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백성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려는 다윗의 첫 조치부터 이런 벌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는 더더욱 제사장이 맡아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두 번째 영적 과업인 성전을 지으려 할 때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6,7)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전에 가만히 모셔져 있지 않고 항상 당신의 백성들과 더불어 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더러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7:5,11,16)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수레에 태워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히려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어깨에 메고 다니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다윗이 저지른 잘못을 모든 세대의 신자 모두가 너무나 흔하게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완전히 실종된 것은 둘째 치고 십자가 복음으로 율법도 다 폐지된 판국에 그런 잘못을 저지를 소지 자체가 없다고 봐선 성경을 너무나 근시안적으로 읽는 신앙 수준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잘못은 율법 준수를 떠나 하나님을 가만히 편하게 모셔두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능력과 정성과 열심을 가능한 많이 바쳐서 말입니다. 물론 오늘 날의 신자가 하나님의 상징물을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또 바친 정성에 비례해서 보상 받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는 참으로 신실한 신자도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뜨겁게 섬깁니다.

그러나 그 깊은 속내는 저희들이 경건하게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계시라고 요구합니다. 신자가 기도도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만 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우선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실력과 영성으로 교회를 크고도 화려하게 성장시키는 데에 전력투구합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하며 또 그분의 영광만 드러나길 소원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실제로는 목회자의 이름만 이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측면은 사실상 거의 없습니다.

성경이 지금 특별히 언약궤의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이름한다”고 말한 뜻이 무엇입니까? 그룹들 사이는 백성들의 죄가 어린양의 피로만 속죄되는 곳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죄에서 회개하여 돌아와 새사람을 입는 십자가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종된 채 교회라는 조직체와 담임 목사의 이름만 크게 드러난다면 그룹 사이에 하나님이 좌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이 궤를 새 수레로 모시고, 웃사가 그 궤를 손으로 만진 것과 하나 다름없습니다. 말하자면 죽음의 벌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로 모시어 놓는 일에 일반 신자라고 전혀 예외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저는 도무지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열심히 기도는 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자기 때와 방식으로만 도와주어야 한다고 보챕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고도 완전한 계획을 세워 그 뜻을 신자에게 펼칠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냥 간단하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가락 끝만 한번 움직여달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하나님을 고이 모셔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그분더러 직접 뛰어 들어오시게 해서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들끼리 모여서 그분이 통치하는 영역을 점점 더 아름답게 넓혀 나가는 일입니다. 그분이 마음껏 일하시도록 신자는 모든 가능성을 그분께만 열어 놓아야 합니다. 비록 그분의 생각과 길이 신자의 것과는 다르거나 정 반대라도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자가 언약궤를 정말 제대로 운반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웃사가 죽은 비밀을 조금이라도 깨닫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많은 신자와 목회자들이 오늘도 웃사와 똑 같은 벌을 받아 죽어 마땅하나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뒷전이니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당신의 진노를 누르고 인내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이나 웃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재차 강조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최소한 자신을 향한 그분의 역사와 간섭을 끝까지 기다리는 여유, 아니 인내심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분의 권능과 은총을 풍성히 누리길 소원한다면 그분이 마음껏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일뿐입니다.  

11/18/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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