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진짜 이름을 아는가?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13:18)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나타나 잉태치 못하는 아내가 장차 이스라엘의 사가가 될 삼손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가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자 “기묘(奇妙)”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인간이 아닌 천사로 나타났기 때문입니까? 잉태치 못하는 아내에게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까?
그와 아내는 그 약속에 감사해 염소새끼를 여호와께 번제로 드렸는데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불꽃 가운데로 사자도 좇아 올라갔습니다.(20절) 비로소 그들은 그 사자가 바로 하나님인 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기묘였던 것입니다.
마노아는 즉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22절)고 한탄했습니다. 반면에 아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러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23절)고 남편의 실망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직접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단 한 치의 더러운 죄악과는 단 한 순간도 공존할 수 없습니다. 죄에 찌든 인간은 그분을 보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간청한 모세에게조차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2)고 하면서 눈을 가리게 한 채 지나가시고선 당신의 등만 보여주었지 않습니까?
그럼 악과 절대 공존하지 않고 당신을 보는 인간은 그 즉시 소멸되어버리니까 기묘하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묘란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놀랍고 신기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기묘의 히브리어 ‘펠라’도 “경이로운”(wonderful) 또 “이해를 초월하는”(beyond understanding) 등의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는 것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인데다 너무나 지당한 진리이지 기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이해를 초월하는 경이로운 존재라는 사실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꼭 기묘한 축에 들지 않습니다. 그럼 과연 무엇이 기묘한 것입니까? 아내의 태를 열어주어서 아들을 얻게 된 것보다, 하나님을 보면 누구나 죽어야 하는데도 죽지 않았으니 기묘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단순히 당신의 이름만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마노아더러 직접 겪은 생생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하나님다우심을 깨달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예수님을 동일한 히브리어를 사용해 기묘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의 기준으로는 모든 인간을 죽였어야 마땅함에도 그러지 않고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을 대속 제물로 죽이셨습니다. 또 그렇게 구원하신 당신의 자녀들에게 날마다 참 생명의 은혜와 권능을 새롭게 부어주시니 이보다 더 기묘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이 없었고 십자가 대속진리는 전혀 몰랐던 마노아 부부도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을 만나자 사실상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신자는 정말 그분을 만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생생한 체험을 해야 합니다. 또 매일 아침 말씀과 기도 가운데 그분을 만나 죽음에서 되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서 환난에서 구출되는 것보다 주님과의 대면이 오히려 더 기묘하다고 절감해야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큰 능력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더 소중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11/1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