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나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각양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7:7,8)
불신자를 전도하다 보면 흔히 듣는 말이 나는 십계명을 어긴 적도 없는데 왜 죄인이라고 매도하며 꼭 예수를 믿어야만 된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관계의 5-10계명을 어긴 적이 없으니, 즉 남들에게 크게 죄 지은 적이 없으니 1-4계명대로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만큼 잘못된 말이 따로 없습니다.
아마 역사상 십계명을 가장 잘 지킨 자는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요즘 식으로 따져 십계명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예수가 필요 없다고 가장 크게 목청을 높인 자였습니다. 그것도 현대의 불신자와는 달리 1-4 계명도 완벽하게 따르면서 말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를 믿고 난 후로는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십계명을 어기지 않으니까 예수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는 바로 십계명 때문에라도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아무도 탐심(열 번째 계명)에서만은 자유로울 자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로선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같은 죄를 지은 적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죄는 구태여 십계명으로 규정하지 않아도 누구나 상식적으로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웃의 소유를 탐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기능 중에서 탐심의 죄만 예로 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죄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행동, 말, 이전에 마음 특별히 이웃의 것을 탐내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살인과 간음 같은 죄도 이웃의 것을 탐한 데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불신자들도 형제를 바보라 욕하는 것이 살인죄요,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이 간음죄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심오한 도덕으로 인정합니다. 그래도 그분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그분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있어야만 제대로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가 옵니다. 또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말씀대로 살아야겠다고 전 존재를 걸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성경의 어떤 귀한 말씀도 살아 역사하지 않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자신이 때로는 죄를 짓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받아야 할 만큼 철저한 죄인이라고는 자백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탐심이 죄의 본질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삶은 필연적으로 그 탐심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반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이 탐심이고 또 불신자는 탐심에 사로잡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해서 탐심을 아주 음흉하고 거창한 정욕이라고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탐심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린아이의 경우입니다. 어떤 분이 유아신경(Toddler’s Creed)을 이렇게 작성했습니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그건 내거야. 내가 네게 주었다가도 나중에 내가 마음을 바꾼다면 그건 내거야. 내게 네게서 빼앗을 수 있다면 그건 내거야. 내가 조금 전에 그걸 가지고 있었다면 그건 내거야. 그게 내 거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은 절대 그걸 가질 수 없어. 우리가 무엇을 함께 만들고 있었어도 전부 다 내거야. 만약 어떤 게 내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내거야"
그런데 유아에게 그렇게 하라고 어느 누구가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까? 그가 어른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입니까? 어른은 오히려 자꾸 동생하고 함께 갖고 놀아라, 원래 친구 것이니까 돌려주라고 가르칩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은 끝까지 막무가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탐심이 유아만 갖고 있는 특유의 성격입니까? 어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무리 아이들한테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고 꾸중해도 사실 어른들 마음속에도 그 탐심이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탐심이 바로 죄의 본질 즉 원죄이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욕심이 많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뜻과 기분대로 해야겠다는 심보입니다. 하나님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너무 방해가 되니까 그분의 반대편으로만 가겠다는 고집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한이 있어도 내 맘대로 하겠다는 마음 상태입니다.
단언컨대 바울은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천국을 바라 본 장면을 자신의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또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고 있는 줄 자신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도무지 그 사실이 믿어지지도, 이해도 안 되고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을 비롯해 예수 믿는 신자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시샘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네놈들은 어떤 사람이냐? 천하의 이단이 아니냐?”고 역으로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나에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갈등하며 몸부림쳤습니다. 자기 생명과도 바꾸었던 스데반의 예수를 향한 믿음이 너무 탐났습니다. 그가 누렸던 하늘에서 내려온 평강을 자기도 맛보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예수님이 하늘에서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 존재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왜 자기에게 스데반 같은 평강이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도덕적 허물이 아니라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며, 또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이웃을 시기하고 탐내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의 탐심은 자신의 종교적 우월성을 사람들 앞에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탐심을 채우고자 하나님마저 동원했습니다.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마저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그 탐심을 없앨 수가, 아니 깨달을 수조차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빛이 그의 내면의 철저히 부패한 심령에 비취자 드디어 그는 죄가 얼마나 교묘한 거짓인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열심히 따르는 자라도 그 영혼이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마저 자기 탐심의 제물로 삼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십계명을 잘 지켰으니 예수가 필요 없다고 반발하게 됩니다. 사단에 묶여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더욱 예수가 필요한 자입니다. 가장 경건하고 의로웠던 바울이 그러했는데 누가 감히 십자가 보혈이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신자가 되었다는 표징이 무엇입니까? 가장 두드러지게 바뀌어져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탐심이 죄의 본질이며 그 탐심을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무지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며 예수님이 나 대신 지셨던 십자가를 이제는 내가 대신 져야 합니다. 다른 말로 예를 든 유아신경의 반대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거야’라고 표현된 모든 부분을 ‘네 것과 하나님의 것’이라고 바꾸는 것입니다. 내 것이 하나님의 것과 네 것이 되었으니 그분과 이웃을 나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5/25/2007
그리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