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2-24)
인간은 하나님은 몰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절대 스스로 찾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구하고 찾는 표적과 지혜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온 것도 그렇지만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아예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은 반드시 말로 전해져야 합니다. 상상도 못하는 일인지라 혼자서는 그런 진리가 있다는 것조차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이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3,14)
비록 전해지는 내용이 듣는 사람에게 거리끼고 미련해 보여도 또 전하는 자마저 이렇게도 못 알아먹는 일을 미련스럽게 전해야 하는지 의심이 들어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간혹 아마존 밀림에 사는 미개 종족에게 인터넷, 인공위성 같은 첨단 문명은 상상도 못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고 전하는 것과 같이 복음도 전해져야 한다고 비유합니다.
그러나 그 비유가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미개해도 차츰 과학적 지식을 교육 받다 보면 첨단 문명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 꼭 전해야할 당위성과 시급성은 없습니다. 그 비유는 단지 전함을 받은 자가 전혀 알아먹지 못한다는 것만 대변할 뿐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절대로 인간이 교육을 받아 깨우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나아가 전해도 그만 전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도 시급하게 전해야만 합니다. 참 복음 안에 들어와 있는 자는 불신자를 향한 애끓는 심정 때문에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고 고백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큰 표적이 일어나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거나, 복음을 지혜롭게 설명해서 납득이 되어도 예수만은 끝까지 배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전해지는 방식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 주어도 복음의 내용이 표적과 지혜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문 설명대로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 복음을 깨닫게 됩니다.
뒤집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표적으로 구원해 주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자기들만 특별히 더 사랑해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자랑하게 될 것 아닙니까?. 헬라인이 원하는 대로 깨우침으로 구원을 얻게 되면 마치 자기가 똑똑해서 구원 받은 양 자랑할 것 아닙니까? 사람들 사이에선 남들보다 영적으로 더 깨우친 자였으며 하나님 앞에선 자기는 구원 받을 자격 요건이 충분했다고 자랑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고전1:8) 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과연 그분 앞에서조차 자기는 구원 받을 만큼 충분히 의로웠다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구태여 따지면 그분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라야 그나마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자칫 그것마저 회개했다는 은연중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방식의 구원은 어떤 형태로도 결코 허용하지 않으며 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택한 자에게만 당신의 능력과 주권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일뿐입니다. 간혹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향한 초대를 했고 사람들은 그 초대에 자신의 의지를 동원해 결단하고 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렀고 또 그 부름에 응하는 것조차 하나님이 해주었다는 뜻 아닙니까? 말하자면 “누구든지 부르심에 응한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표현에서 부르심은 같습니다. 즉 골고다 십자가는 누구나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과 ‘누구든지’, 또 ‘입은’과 ‘응한’이 다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에, 아니면 인간의 결단에 힘입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뜻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예수를 믿을 때 지정의를 동원해서 부르심에 응하는 결단의 모습은 반드시 따릅니다. 그러나 그 단계는 이미 부르심을 완전히 입었기에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으로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지정의 영역 안에서만 느끼고 깨닫고 결단할 수 있을 뿐이기에 마치 자신이 결단하여 믿은 것처럼, 즉 부르심에 응한 것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가 믿음의 결단을 하는 것마저도, 스스로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은 못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본문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고 나면 자기가 믿게 된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힘입은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랑할 것이라고는 자기 쪽에는 한 치도 없게 됩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거룩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한 영적 순례 중에도 혹시라도 자랑하고픈 유혹이 생기면 부르심을 입었을 때의 은혜로 되돌아가 모든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오직 자기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절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르심 밖에 있는 자들에겐 그런 부르심조차 아주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예정은 구원 받은 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로 나와서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난 당신의 독생자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어졌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입는 것만이 신자 된 시작이자 끝입니다. 신자가 가지는 지혜, 의로움,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신자가 자랑할 것은 표적이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세상에선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해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지금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아니 유일한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언뜻 생각해 십자가가 아닌 어떤 다른 것이 떠오른다면 뭔가 영적으로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말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진리를 모르거나 잊고 있다는 뜻입니다.
6/28/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