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7,8)
성경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믿어야만 의인이 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서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만 노력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꾸 믿으려고 노력하는 바람에 더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신자란 이미 믿은 자입니다. 따로 더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말장난이거나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가 없는 믿음을 새로 가지거나 부족한 믿음에 더 보태려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는 이미 완전하고도 충분한 믿음 안에 들어와 있음을 확인만 하면 됩니다.
자꾸 믿으려 노력하는 신자들의 경우는 사실은 아브라함의 구원 과정, 다른 말로 자신의 구원 체험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 약속 자체를 바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신반의 했습니다.
약속이란 반드시 두 당사자가 온전히 믿고 지키기로 해야 약속으로서의 의미와 효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당사자들끼리의 사전 협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끼리의 경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일을 협의해서 서로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처음 구원을 얻는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선 단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더 정확하게는 그 결과에만 동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약속을 만들거나 그분으로부터 약속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열심히 믿으려 한다고 해서 없던 약속이 새로 생기거나 약했던 약속이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인간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의로움이나, 믿음을 보고, 심지어 그가 후손이 없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이삭을 주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 육신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제로였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주기로 서로 상의하여 약속하고 그에 따라 그 약속을 믿기로 노력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또 신자 쪽의 구원을 얻을 어떤 자격, 조건, 공로, 심지어 믿음을 보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저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오직 당신께서 선택하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셨고 신자는 단지 그 선물을 받기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후손을 뭇별처럼 창성케 해주신다는 약속을 처음에는 자신의 충실한 종으로, 나중에는 첩의 자식으로 자기가 이루려 했습니다. 둘 다 약속 밖의 씨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약속을 스스로 믿어보려고 노력했지 그 약속에 동참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약속을 협의하거나 자기가 만든 약속으로 대체하려 한 셈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창세전부터 택하고 그를 통해 믿음의 가계를 세우기로 계획하시고 실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있어 이삭이 있고, 이삭이 있었기에 야곱이, 또 야곱으로 요셉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을 통해 셋이 있고 셋을 통해 에녹과 노아가 있으며 노아가 있어 셈이 있었습니다. 요컨대 야곱이 복중에서부터 에서 대신에 선택되었기보다는 사실은 그 훨씬 이전에 약속의 가계 안에 그의 이름은 올라가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로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9:11,12)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이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9;16,18) 구원을 얻으려고 마음에 소원을 한다거나 신앙적 행위로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드는 것이 아니라고 확실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자 스스로 결단하고 회개하는 믿음을 보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하나님과 원수 된 자기 대신 그분이 죽음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이후라야 진정한 회개와 결단이 따르는 법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를 먼저 사랑해 주셨는데 원수 된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려고 결단하고 회개할 수 있습니까? 아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이처럼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스스로 계획한 약속이기에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단순히 너무 큰 은혜라고 감사만 할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한 가계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후손들이 이어지게 하기 위해 씨앗으로 심겨져 썩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그에 앞서 수없는 밀알들이, 믿는 선조든 안 믿는 선조든 간에, 그를 위해 썩어졌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얻은 그 신분이 얼마나 고귀하며 맡겨진 소명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큰일을 해 하나님께 보답해 드리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 믿으려 노력하지 말고 이미 그 약속 안에 참여된 자라는 것부터 제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계획이 이제 그 수많은 세대를 통해 이뤄졌고, 현재 이뤄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뤄질 것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란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자가 아니라 이이 믿은 자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하나님이 신자를 믿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차원 안으로 이미 초대되어 들어와 있는 자가 신자입니다.
구원이 나의 원함도, 달음박질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영원하신 약속 안에 일방적으로 불림을 받고 들어오게 되었지 않습니까? 또 그 약속 밖으로 추방당한 적이 결코 없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또 다시 그 약속을 새로 찾거나, 더 강화시키려 한다면 얼마나 헛된 낭비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했지 않습니까? 그것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나를 대신해 말입니다. 나의 믿음을 견고케 할 노력과 수단으로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신자가 더 잘 믿으려고 자꾸 노력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뭔가 부족해서 반대급부로 돌아오는 축복도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대가에만 관심이 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셨다면,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 또한 절대 줄지 않을 것 아닙니까? 믿음이란 새롭게 더 강하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신자를 위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현재 동원하고 있음을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꾸 스스로 믿으려 노력합니까? 이미 약속 안에 들어와 있는 신분임을 확신합니까? 후자가 아니라면 아직도 십자가 은혜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6/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