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들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렘44:17-19)
불신자 집안에서 누군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온 식구들이 난리를 칩니다. 집안에 우환이 생겨 누구 망하는 꼴 보게 만들 것이냐고 반발하며 실제로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경우 더 복을 주셔야 집안사람들도 예수를 믿으니까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구나라고 여겨 함께 믿게 될 것 아닙니까?
애굽에 집단 이주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와 똑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우상 바알 신의 아내 되는 아스다롯 하늘 여신에게 분향할 때는 식물이 풍부하다가 그것을 폐하니까 재앙이 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대체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욥기의 경우에서 보듯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손아래서 조종당하는 경우도 많으며 또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같은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단과 하나님이 각기 그렇게 하는 이유를 따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은 자기에게 분향하면 형통을 주다가 그만두니까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죄를 두고 보고 있다가 우상숭배를 멈추자 오히려 징계했고 사람들은 다시 우상 숭배로 돌아 가버렸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밀린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사단이 서로의 계획과 일정을 미리 맞춘 것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사단의 계략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아시며 참으로 어리석고도 연약한 존재라는 것까지 감안하십니다. 당신의 뜻과 계획을 그 모든 것을 아울린 바탕 위에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당신에게 온전하게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말하자면 현실적 형편이 인간의 눈에 축복이든 재앙이든 간에 당신만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함께 교제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보시는 이유도 현실적인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 아님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당신은 우상들과 그 배후에 있는 사단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여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정성을 바치면 복 주고 안 바치면 안 주는 신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바치는 것에 비례해서 복을 주는 신이 아닐뿐더러 또 그런 신은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위해 선한 일을 해야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그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또 그런 관계에선 진정한 사랑과 신뢰가 절대 싹틀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잠시 감정적인 분노는 치밀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본질적인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식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당신에게 바치는 것과 상관없이, 나아가 언제 어떤 상태에 있던지 사랑하는 이유도 오직 하나 그분은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유일한 소원은 인간이 당신을 기뻐해주며 당신과 함께 교제해 주는 것뿐입니다.
반면에 사단은 인간이 바치면 복 주고 바치지 않으면 벌을 줍니다. 사단의 관심은 오직 인간에게서 받아 내려는 것뿐으로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노예로 삼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사단에게 바라는 것도 오직 하나 현실에서 복을 받거나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늘 여신과 진정으로 교제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점치러가는 자들이 현실 문제만 묻지 그 신과 교제하려고는 꿈도 꾸지 않듯이 말입니다.
불신자 집안에서 그 동안에 사단의 권세 아래 붙들려 있던 한 사람이 그 수중을 떠나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집안에 종종 우환이 생기는 경우 또한 사단과 하나님 두 측면에서 따져 보아야 합니다. 사단으로선 당연히 나머지 식구들더러 겁을 먹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예수 믿는 자가 나오지 않고 또 이왕에 믿기 시작한 자도 집안의 안위가 염려되어 다시 되돌아오게 만들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그런 일을 두고 보십니까? 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천국에선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지 않습니까? 심지어 새로 믿기 시작한 신자에게마저 나쁜 일이 생겨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단에 비해 능력이 약해서가 절대 아닙니다. 사단의 흉계를 깨려면 힘을 사용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바치면 상주고 안 바치면 벌주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간더러 깨닫게 하려면 그 반대의 모습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마저 바치면 상주고 안 바치면 벌주면 당신과 사단이 다를 바가 하나 없지 않습니까?
사단은 인간이 겁을 먹고 자기에게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 마치 자기가 세상을 다스리는 힘과 권세를 가진 양 사람들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만 찾지 않으면 구태여 나쁜 일을 일으키지 않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세상의 형통만 바라기에 필연적으로 서로 물고 뜯고 싸워서 모두 망하기에 사단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기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험해질수록 점치는 집만 돈을 벌듯이 말입니다.
사단의 그런 농간을 하나님은 언제든 그만두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 사단 자체를 지금 당장이라도 없앨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행사하지 않을 뿐입니다. 능력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해야만 능력으로서 제대로 행사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배제된 능력은 폭력으로 독재일 뿐입니다. 무조건 야단만 치는 부모는 부모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자식 또한 단지 그 벌이 무서워서 앞에서만 순종하는 척 할 뿐입니다.
하나님도 같이 힘을 동원하면 사단의 계략에 말려들어 더 힘센 독재자만 될 뿐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원하지도 않지만 당신의 품성 상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힘은 힘으로 결코 이기지 못하고 오직 사랑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깨트릴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언제 어디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사단에 묶여 죄 중에 빠져 있든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든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만이 한 죄인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을 사단의 결박에서 풀어내어 하나님과 진정한 부모 자식의 관계로 다시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단이 자기를 떠나면 사람들로 겁을 먹게 만들려 해도 일차적으로 그 집안만 훼방하지 신자에게는 함부로,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지 않는 한, 손을 절대 대지 못합니다. 그 집안은 여전히 사단의 수중에 있지만 신자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권세 아래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단은 인간이 오직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발악합니다. 때로는 축복을 주고 급하면 재앙을 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도 두고 보십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상벌이 아니라 그 영혼이 새롭게 되는 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영혼에 성령이 이미 내주해 있는 신자에게 사단이 아무리 현실적 방해를 놓더라도 그 영혼의 뿌리는 절대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새롭게 변한 신자는 이제 사단의 속임수를 속속들이 알게 됩니다. 그 동안 사단에게 어떤 식으로 속아서 살았는지 또 그렇게 된 이유를 깨닫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 절실히 체험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족들이 참으로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 일이 사단이 그들을 결정적으로 영원히 망하게 만들려는 흉계인줄 여전히 모릅니다. 예수 믿는 일이 영원히 사는 길임에도 거꾸로 믿지 못하게 말리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가족의 현실적 형편이 나빠져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붙잡혀 인간이라면 진정으로 누려야 할 참 기쁨과 행복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메어집니다. 하나님은 새로 믿은 신자더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현실의 형통이나 도덕적 종교적 깨우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라고 가족 앞에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사단이 세상과 인간들에게 어떤 농간을 부리더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에 그냥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신자더러 사단과 싸워 이기며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확장하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그 은혜 가운데 들어 와있는 신자에게 사단은 절대로 꼼짝달싹 못합니다. 신자가 사단과 죄악에게 예수님의 이름만, 그 십자가의 권세를 붙들고, 제대로 선포하면 그것들은 단번에 무력해집니다.
여러분은 지금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전에 경배했던 세상 신들에게 돌아가려 하지는 않습니까?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기독교를 포기하려 하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치면 상주고 안 바치면 벌주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6/4/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