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로마서는 11장까지 십자가 복음의 내용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듯이 12장부터는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니까 자칫 육신적 고통과 연관해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 손해 보는 억울한 일을 겪어도 참아야 하거나, 경제적으로 검소하게 살아야 하거나,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야 하거나, 핍박에 대응하지 말고 순교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만 더 근본적인 뜻은 따로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아빠가 어린 딸에게 아빠에게 줄 선물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딸은 트리 밑에 쌓여 있는 선물 박스에서 리본을 하나 떼어 자기 머리에 꽂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를 보세요. 내가 바로 아빠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에요.”
신자 또한 자신의 전부 즉,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을 하나님에게 온전히 바치는 것이 바로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전부를 드리되 삶과 인생 자체가 그분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찬송과 기도와 말씀만 보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가 11장까지 구원의 진리를 12장부터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기 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첫 마디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 세대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로 예수 믿기 전의 신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자니까 이전보다 더 선한 삶을 살거나 믿음으로 현실의 문제를 이겨내는 차원이 아닙니다. 반드시 받는 자와 드려지는 선물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받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불신자도 세상사람 앞에 의를 보일 수 있습니다. 신자마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신자 스스로 자기의 관객층(Target Audience)을 사람들로 잡았는데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 객석에 하나님이 계실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또 선물로 몸을 드려야 하므로 자신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일시적, 간헐적, 기분 내키는 대로 드려져선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끝까지 신실하게 드려져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거나 종교적 행사를 할 때만 신자답게 경건하고 세상에선 이전과 똑 같이 산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신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잠시 경건했던 것은 순전히 겉으로만 그런 척 했거나 세상에서 형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한 것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재롱부리는 딸을 바라보는 아빠는 저 귀여운 모습을 평생 볼 수 있도록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끔 듭니다. 심지어 딸이 잘못을 저질러도 귀엽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딸이 전혀 자라지 않거나 매번 잘못만 범해도 좋을 아빠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그래도 부녀 관계가 바뀌지 않고 또 딸을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것과 아빠가 딸을 진정 기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반드시 뭔가 귀여운 모습이, 잘못을 범한 가운데도, 있어야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이 지은 인간을 사랑합니다. 죄를 범하고 심지어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어도 그분의 인간을 향한 근본적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십자가로 구원받아야 기뻐합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사랑은 받지만 그분의 기쁨과 자랑은 결코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예수 믿고도 아무 변함없이 불신자와 같다면 어떻게 됩니까?
어쨌든 결국 불신자 때보다 더 선하게 살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아직도 지울 수 없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5,16)
예수 믿은 자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를 드리라는 히브리서 말씀은 바로 오늘의 본문과 평행되는 내용입니다. 찬미의 제사, 선을 행함, 서로 나눠주는 것, 세 가지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럼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더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까?
로마서 12:1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듯이 본문에도 ‘이러므로’가 서두에 있습니다. 그 앞에 나온 내용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그 세 가지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한마디로 “이 땅에 영구한 도성, 즉 소망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확신 위에 신자의 실제 삶이 이뤄져야 합니다. 반면에 이 세대는 이 땅이 영구한 도성이 될 수 있다고 즉 소망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만 추구하고 경쟁하게 되며 필연적으로 남의 것을 탐하는 죄악과 하나님을 외면하는 배교만 행하게 됩니다.
신자는 영구한 도성만 바라보기에 당연히 그들과 달리 선을 행하고 나눠주어야 합니다. 이 땅에 소망할 것이 없는데 더 이상 모아 쌓아둘 필요가 없습니다. 이전에는 세상을 향해 피를 흘리며 즐거이 달려갔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은 그것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알게 됩니다. 비록 체질이 연약해 온전한 선을 행할 수는 없어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갈망, 최소한 하나님을 배반하는 삶은 절대 살지 않겠다는 소원은 있습니다.
바꿔 말해 이 땅이 영구한 도성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이 없고 또 장차 올 것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 가지 제사는 드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도덕적 종교적 삶을 살려는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불신자도 그렇게 합니다. 신자가 이 세대와 다른 유일한 점은 바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또 그 소망은 이 땅은 영구한 도성이 결코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거나 어떤 기독교적 신앙 행위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경건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정말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다시 죄와 거리가 먼 의로운 모습만 상상해선 안 됩니다. 오직 영구한 도성을 소망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혹시 천국이 현실적으로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면 최소한 이 땅에선 기대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철저한 자각만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선만 행하고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생명마저 다 나줘 주고 십자가에 달리신 뜻이 무엇입니까? 때로는 죄에 빠져 실패하고 넘어지는 모습이라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드리라는 것 아닙니까? 단 그 실패가 이 땅이 영구한 도성이 되지 못한다는 확신을 더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가 오히려 세상에서 실패한 모습을 회복해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고 예배를 드리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산 제사가 아니라 죽은 제사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 없는 제사입니다. 최소한 그분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분명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머리에 리본을 꽂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자기를 선물로 드릴 자신이 있습니까? 얼마나 착하게 살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얼마나 많이 없애버렸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6/1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