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 진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복잡한 형식과 절차가 따로 필요 없다는 뜻이지 내용마저 가볍거나 쉽게 대처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심오한 진리일수록 표현은 간단한 법입니다. 그럼에도 반대로 입으로 시인하는 형식에만 중점을 두고 마음으로 믿는 내용은 쉽게 취급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흔히 믿는다는 것을 육체를 동원해 행동하는 것과 대비해 생각으로 동의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과정으로만 간주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그런 과정을 단지 말로만 표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복음의 원리를 전하고 그것에 수긍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영접 기도를 시키며 그 후로는 구원받은 자로 자타가 공인(?)해 줍니다.
물론 말로 전한 복음을 상대가 순수하게 받아들여 믿기로 결단하여 입으로 시인하는 과정 중에 구원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믿어 보아야지, 안 믿는 것보다는 낫지, 혹은 그래 내가 죄인이니까 앞으로 착하게 살기 위해 예수를 믿어 봐야지 식으로 스스로 결단하는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기로 결단하는 것, 즉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특정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으로 믿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수긍해 영접기도하기로 결단하는 것 같은 일회적인 사고활동과 마음은 다릅니다. 사고, 말, 행동을 결정짓게 만드는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상태, 경향, 힘이 마음입니다. 마음 자체는 순간순간 따로 활동하지 않으며 인간이 자기 내면에 항상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이란 어떤 사안이나 사물을 보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지게 만드는 이미 형성되어 고착되어 있는 가치관 같은 것입니다. 지정의를 다 포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절, 통제, 활동케 하는 전인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한 개인을 그 사람답게 만드는 본질입니다. 심지어 마음이 바로 그 사람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마음으로 믿으라는 의미는 전인격을 동원해 그분에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인생에 대한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나야 하며 엄격히 말하면 그 사람 전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입니다. 또 전인이 바뀐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 즉 생명까지 걸고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절차도 단순히 기독교에 귀의하여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을 밝히는 것으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구원은커녕 믿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으며 믿음이 시작된 것조차 아닙니다. 주(the Lord)는 노예를 소유한 주인이나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에게 적용되는 말로서 모든 삶을 주관하고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도덕 선생 혹은 종교 교주가 아니라 인생을 실제로 인도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예수가 주되심은 한 마디로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이 온전히 그분께 달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그분의 십자가에 비춰볼 때에 자기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정녕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가 없었다면 오직 죽음뿐이었고 소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던 인생임을 절감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기 전과 후가 죽음과 삶으로 확실히 구분되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본이나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좀 더 선하게 혹은 덜 악하게 고쳐 보려는 시도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한 후에는 그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고 당연히 마음에서 따라 나오는 생각, 말, 행동도 그 전과는 정반대로 달라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마음으로 믿은 것을 구태여 또 입으로 시인하라고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지금같이 단순히 영접 기도하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만천하 사람들 앞에 공언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조롱과 멸시와 핍박이 따르더라도 예수 없이는 나는 한 시도 살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핍박을 넘어 순교까지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준비입니다. 쉽게 말해 공산당이 예수 믿는다는 자는 죽이겠다고 총부리를 겨누는 앞에서 “나에게는 예수 말고는 주가 없으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 그 참 의미입니다.
결국 입술로 시인하는 것이나 마음으로 믿는 것, 둘 다 자기 생명과 예수를 맞바꾸는 것이며 또 그렇게 실제로 전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어 신자를 구원해 주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연 이런 믿음이 단순히 복음의 진리에 동의하여 결단하는 것만으로 생기겠습니까? 요컨대 총부리 앞에서 예수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이 잠시 생각해보고 한 번 기도한다고 쉽게 되는 있는 일입니까? 믿음이란 예수에 대한 비호감 내지 무지를 예수에 대한 호감 내지 인정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믿음이 좋은 구원 받은 신자라도 막상 총부리 앞에 서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았을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과 등을 지고 세상의 쾌락과 죄악만 쫓던 그래서 그분과 원수 된 자가 스스로 결단하여 그분과 화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피해자인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주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놀랍게도 성경의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가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수동태란 알다시피 동작의 주체가 본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그렇게 만들어 주는 제 삼의 근본적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인간의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만 믿음으로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의 전부가 바뀌었다는 것은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어떤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구원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건은 당연히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체험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지는 극적인 전환이 있습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신령해졌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예수로 인해 이전의 나는 죽었고 이제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오직 그분의 통치만 받기 위해 자기 전부를 그분께 내어드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자 끝입니다. 영원도록 변함없이 우주의 주인이시자 만물의 주관자입니다. 당연히 인간에게도 처음이자 끝으로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그분이 주관하십니다. 구원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죄인의 외부에서부터 성령을 통해 그 죄인의 마음을 바꾸는 일을 예수님이 직접 해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이며 그 후에야 예수 믿기로 결단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핍박이 없는 현대에는 마음으로 믿어진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반영인 그 사람의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영접기도 했는지 여부를 따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외부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예수님의 주되심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지 또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지만 보면 됩니다. 요컨대 더 이상 악화되려야 될 수 없는 절망의 끝에 섰을 때도 예수가 아니면 아무 살 가치가 없다고, 아니 예수 때문에 살 의미가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자신하는지 여부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마음으로 믿고 말로 시인하고 있습니까?
6/5/2007
나의 주인되어주심을 다시한번 감사드리는 귀한 시간임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나의 주인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