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6,27)
신자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때로는 기도마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절망의 늪에 빠지는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조차 그것도 엄청난 영적인 승리를 맛보고 난 직후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한탄하면서 탈진하듯이 말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도저히 빠져 나갈 구멍은 없고 오히려 그 막힌 벽들이 더 쪼여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신자는 실망이나 낙심은 해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의 의지력과 믿음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예수님이 신자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실망, 낙심, 좌절, 포기 등은 절대로 적용되지 않는 용어들입니다. 그분에게는 오직 회복, 생명, 능력, 부활 등이 있을 뿐입니다.
나아가 그런 때에 성령님이 기도마저 대신 해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은 알지도 아니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하는 권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많은 신자들이 그 큰 권세를 숫제 잊고 있거나 아니면 가만있어도 내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큰 사고를 저질러서 부모에게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때입니까? 몇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잘못이 커서 아무 변명도 못하고 그저 처분만 기다릴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도무지 제대로 알 수 없을 때, 자기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 되었을 때, 자기 쪽에는 아무 원인이 없는데도 큰일이 벌어졌을 때 등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에 현명한 부모라면 자녀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무조건 윽박지르기만 하면 아이의 말문은 더 막혀버립니다. 우선 아이의 마음부터 진정시키기 위해 달랩니다. 또 사태의 전후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차근차근히 하나씩 풀어나갑니다. 아이더러 설명하라고 하지 않고 마치 스무고개 하듯이 발단부터 아주 단순한 질문으로 따져 나갑니다. 답변하기 쉽게 예나 아니오 혹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할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갑니다.
그래서 사태의 전말을 완전히 파악한 뒤에는 아이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큰일도 부모는 잘 처리해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의 원인과 결과 등을 아이가 알아듣도록 쉽게 설명해 주고선 그 처리를 아이가 직접 하도록 하나씩 가르쳐 줍니다.
사방이 막힌 환난에 처한 신자를 대신해서 성령이 간구해 주는 방식도 이와 동일합니다. 무조건 모든 것을 몽땅 대신 간구해서 단 번에 처리해 주는 즉, 신자가 기대하듯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 뚝딱 해결해 주는 법은 없습니다.
성령은 가장 먼저 신자에게 환난을 이겨내는 힘을 주십니다.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을 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문에서 신자가 겪는 환난의 문맥상 의미는 세상의 죄악과 핍박에서부터 오는 고통이지 현실 생활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은 신자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또 그러기 위해선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도록 참아낼 수 있는 마음을 심어준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환난의 경우에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신자더러 기도하게 합니다. 너무 힘들어 기도도 안 나오지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신자의 영혼에 자꾸 간섭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믿음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런 때는 아예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해버릴까라는 생각으로 신자가 흔들리니까 당연히 그것부터 막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의미를 신자들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잘못으로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꼭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꼭 기도해야 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신자들이 잘 모르는 기도의 중요한 역할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더러 문제를 회피, 외면, 포기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마저 나오지 않는 경우란 완전히 손 놓고 신앙마저 버리고 싶은 심정마저 들 때입니다. 그럼에도 다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어쨌든 그 환난과 맞닥뜨리겠다는 각오를 한 셈입니다. 또 기도란 문제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사태를 차분히 분석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동안에 염려도 차츰 줄어서 결국에는 마음의 안정을 다시 찾게 됩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기도가 심리적 안정을 구하는 치료, 말하자면 마치 자기 최면을 거는 일은 아닙니다. 또 기도한다고 해서 즉시 응답되어 환난이 줄거나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현실적 고통과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차츰 회복되기 때문에 어쩔 줄 몰라 불안에 떨었던 생각들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환난에서 한 걸음씩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고 또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문제를 일으킨 아이가 부모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나면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야단을 맞든지, 아무 꾸중도 안 듣든지, 오히려 위로의 말을 듣든지 간에 일단 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은 자기 손을 떠나 부모에게 넘어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부모가 하나씩 잘 처리해 줄 것이라는 확신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침상을 눈물로 적셨다고 표현했듯이 정말 밤새도록 염려 불안으로 끙끙 앓느라 기도마저 안 나올 때가 닥칩니다. 기도도 믿음을 떠나 이성적으로 생각이 정리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도 비록 소리는 내지 않지만 정리된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무지 앞뒤가 꽉 막혀 어떤 생각도 들지 않으면 자연히 하나님에게마저 아무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은 바로 그럴 때에 우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뜻입니다. 심령의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보시고 영혼의 흐름까지 성령님이 파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우리가 믿음마저 포기해버릴까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러지 못하도록 탄식하며 간구해 주십니다. 아니면 아무리 힘들어도 신자가 믿음을 지키기는 하는데 그 고통이 너무 심해 괴로워하고 있다면 성령님도 탄식하며 함께 괴로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 영혼의 흐름을 바로 잡아 오직 예수님의 십자로 향하게 해주십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그분 가신 길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본문은 “이와 같이”라고 시작합니다. 바로 앞 구절인,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롬8:24,25)와 같이라는 뜻입니다. 즉 아무리 눈에 보이는 환난이 위급하고 중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지하고 있기에 주님의 구원을 소망하며 참음으로 기다릴 힘을 성령이 우리 영에 부어주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사방이 막히면 혼자서 모든 수단 방법을 다 강구하다가 안 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환난과 고통을 알고 계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방이 막힐수록 신자로선 위를 쳐다볼 수 있는 더 좋은 기회이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위를 쳐다보는 것마저 잊고 있어도 성령님이 대신 탄식하며 간구까지 해주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신분이며 엄청난 권세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최소한 알기라도 하십니까?
5/2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