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같이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은 복을 위함이 아니요 화를 위함이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로 사르리라”(렘21:8-10)
성경의 주제는 신자더러 의를 위해선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포함해 자기의 모든 것이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선을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선 적군에게 항복하여서라도 순전히 육신의 생명부터 먼저 보전하라고 명합니다. 지금 바벨론은 하나님이 유다를 징계하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항복하라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먼저 병을 주고선 또 약을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자식이 잘못을 범했을 때에 회초리를 든 부모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때리고 닦달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식이 불쌍하고 안쓰러워 쓰리고 아픕니다. “어서 빨리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 그러면 당장 회초리를 던져버릴 텐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징계를 내렸지만 이와 똑 같은 심정으로 어서 빨리 항복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더러 잘못되었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의가 앞섰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에선 장렬히 전사하더라도 끝까지 적국에게 저항하는 것이 의입니다. 항상 자기가 남들보다 잘나야 합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보다 잘 되어야 하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끼리는 오직 누가 더 우월한가만 다투면서 평생을 허비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의는 다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분 앞에는 죄인입니다. 누가 더 악하고 덜 악하고의 차이는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의인도 그분 앞에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극악무도한 사형수도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도 더 나쁘지 않는 죄인입니다. 그분 앞에서 누가 더 의로운지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미가 공룡보고 힘을 겨루어보자고 덤비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따라서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로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조차 없음을 자백하는 자가 그분 보시기에 가장 의로운 자입니다. 또 그런 자는 세상의 신분과 계급과는 아무 상관없이 심지어 죄악 가운데 빠져 있어도 다 용서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바로 당신의 의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죄를 범한 유다에게 징계는 내리지만 어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도무지 회개하지 않을 것도 아시고 빨리 항복이라도 해서 생명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가 여호와께 경배드릴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면 그 때서야 당신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고 뉘우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 백성들은 죽으면 죽었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렸을 때에 부모에게 야단맞던 우리의 심경과 똑 같지 않습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때리는가? 혹시 잘못했다 하더라도 기껏 이런 정도로 이렇게 세게 때릴 수 있나? 남도 아닌 자식에게 말이야. 나한테 맡겨두면 내가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데 기회도 안 주고 야단만 치네.” 나중에는 부모에 대한 앙심에 사로잡혀 이를 악물며 잘못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어 “너희가 평안하리라. 재앙이 너희이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렘23:17)고 부추겼습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실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게 패하게 되면 여호와가 이방의 신에게 진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제 몸에서 난 자식은 아무리 잘못해도 벌주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오히려 눈물로 매를 듭니다. 빨리 잘못을 인정만 하면 나머지는 다 책임져 줄 준비를 갖추고서 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이방 민족도 사랑하십니다. 전쟁으로 양쪽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어쩔 수 없이 징계의 수단으로 전쟁이 동원될지라도 하루 속히 종결되기를 원합니다. 단 인간이 자기들 잘못을 뉘우친다면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세상에 전쟁 같은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주관 혹은 묵인하실 때는 반드시 당신만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무차별적으로 재앙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인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목적이 달성되면 재앙은 당연히 그치게 마련이며 만약 달성되지 않으면 재앙은 계속 되거나 다른 모습으로 또 다시 닥칩니다.
또 목적이 있는 재앙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목적이 이뤄지는 특정 대상과 지역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지목하여 그 앞에 생명과 사망의 두 가지 길을 제시했습니다. 당신의 일차적이고도 특별한 관심은 항상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에게로 향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신자가 생명의 길로 들어서면 바벨론도 징계의 수단으로 동원될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신자로 인해서 살게 됩니다. 그 반대로 신자가 회개치 않으면 세상도 함께 죽음의 길로 갑니다. 아니 항상 멸망으로 향해 가는 세상에 생명을 심을 자는 오직 신자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징계는 등 뒤로 던져지고 당신의 은혜와 권능만이 그 앞길에 풍성하게 펼쳐집니다.
마지막으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그 나라 자체가 멸망하는 셈입니다. 그것은 고대 사회에선 여호와가 이방 신에게 굴복하는 모습으로 비쳐진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금 항복하라고 명하고 있으며 또 그것이 오히려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에 궁극적인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끼리 우열을 다투는 일은 그분의 안중에는 아예 없습니다. 그분은 신자를 세상에서 형통케 하여 사람들 위에 세우는 것에도 당연히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절대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또 설령 신자가 우월한 위치에 섰어도 여전히 그 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의는 누더기 같을 뿐입니다.
왜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세상의 의로는 가장 비천하고 저주받은 모습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까? 바로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그만큼 다르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기 위해서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갖고 계시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관심은 한 죄인이 당신과 아름답고도 거룩한 인격적 관계로 이끄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과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런 관계가 무너지는 바로 그곳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는 분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병은 사실은 인간이 먼저 불러들인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선 죄악의 병폐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관점에선 그 병이 아니고는 죄인이 회개할 길이 도무지 없기에 허용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더러 벌 좀 받아서 고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병, 아니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언제 어디서든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 불과한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은 생명과 사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육신과 영혼까지 완전히 멸할 수 있는 하나님에게 항복하는 길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너무나도 엄중한 병을 받기 전에 말입니다.
5/3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