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찌니라.”(겔2:1-5)
오늘날에 구약의 선지자를 가름할 자는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맡은 역할이 조금은 다르지만 기독교적 체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성경적으로는 당연히 같아야 합니다. 본문은 선지자가 맡을 역할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본문에서 말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목사가 하나님 앞에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본문에 표현된 그대로 해석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들에게 가서 죄를 회개하고 그분에게 돌아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죄악에 찌든 세상과 죄인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습니까? 아닙니다. 죄인을 찾아가야지 의인을 끌어 모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끌어 모아 놓은 의인들을 관리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선 더더욱 안 됩니다. 작금의 교회의 실정을 보십시오. 교인들끼리 모여서 박수치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행사는 흘러넘치며 그런 행사에 성실히 참석하면 경건하고 신령해진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죄인이 끼어들어 그런 분위기를 망칠까봐 목사나 교인이나 전전 긍긍합니다.
그렇다고 교회 밖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구제나 선행을 많이 베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 안과 밖을 불문하고 모든 죄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특별히 회개치 않으면 그분의 엄중한 징계와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현 세대가 에스겔 시대의 유다보다 죄악이 덜하고 훨씬 의로워졌기 때문에 그러지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나마 유다 백성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잘 믿으려고 노력은 했지 않습니까? 지금은 더 많은 종류의 죄악이 백주에 공공연히 자행되고 모든 사람의 일상사가 알게 모르게 죄와 교묘하게 연루되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죄를 안 짓고는 아예 정상 생활조차 하지 못할 정도이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하나님은 십자가에 당신의 독생자를 죽일 만큼 죄인을 사랑하시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입니까? 십자가의 근본 의미는 당신께서 직접 죽을 만큼 철저하게 죄를 증오한 것입니다. 죄의 저주 없이 죄인에게 구원만 베푸는 것은 절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을 향한 당신의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렘29:11) 그러나 재앙은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여서 다시 당신께로 되돌리려는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평안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재앙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죄를 깨끗케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신자 스스로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로 회개케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성령이 신자의 영혼에 강권하는 것입니다만 이것은 결국 신자 스스로 회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마저 실패하면 즉 모든 수단을 동원해 회개하도록 이끌어 봤지만 도저히 안 될 때에는 현실적인 징계가 동원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악 중에 있는 신자는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절대로 신자를 먼저 외면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신자를 사랑하기에 항상 함께 해 주십니다. 그러나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일은 신자가 회개할 때까지 잠시 유보합니다. 쉽게 말해 신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잘 응답해 주지 않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죄부터 먼저 씻지 않는 어떤 신앙 활동도 사실은 허사입니다. 강단에서 회개에 대한 촉구를 하지 않는 교회에는 아무리 많은 교인들이 모여 거창한 행사를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서로 인간적 감정에 젖어 흥겨워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뭐라고 당부했습니까?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찌니라.” 요즘 식으로 바꾸면 교인들이 모이든지 안 모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최소한 목사가 할 바는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패역했기에 당연히 귀를 막으려 들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전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최소한 선지자가 살아 있다는 것, 즉 죄를 너무나 저주하는 하나님이 분명히 있다는 것만은 밝히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교인들이 듣지 아니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주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인간끼리 모여서 인간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나님의 종, 선지자가 아닌 인간 목사가 자기 생각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전해들은 말이 없거나 있어도 사람과 세상의 눈치를 보느라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는 “인자”라는 말이 92 회나 등장합니다. 그것도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한 것을 패역한 백성에게 전하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그만큼 죄악 된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절박하다는 증거입니다. 인자는 본서에선 선지자 에스겔을, 오늘날로는 목사를 지칭합니다. 평신도라서 해당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자란 사람의 아들 즉 모든 인간을 뜻할 뿐 아니라 신구약 공히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세상 앞에 제사장과 선지자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모든 신자를 향해 “일어서라 패역한 세상을 향해 죄를 회개하라고 외쳐라”고 92 회나 말씀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가만히 앉아 있거나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고 있겠습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엄청난 배짱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92회나 고의로 거역했으니 말입니다.
혹시라도 에스겔은 하나님에게 직접 음성을 들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발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더러 그런 초자연적 직접 계시를 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뜻은 성경 속에 이미 다 드러나 있습니다. 성경을 무시하지 않는 한 반드시 그렇게 전해야 하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만 전하면 됩니다. 비록 세상이 회개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죄를 증오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만 알게 하면 됩니다. 가시적인 조직체 교회가 흥하든 망하든 말입니다. 도대체 인자들은 작금 다 어디에 가 있습니까?
6/27/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