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신하들의 손에 붙이리라 그럴찌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여전히 사람 살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하나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다 멸할찌라도 너는 아주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공도로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렘46:26,28)
신자들이 갖는 뿌리 깊은 신앙 상의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 생각, 말, 행동에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칠 정도입니다. 신자가 되었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당연히 더 많은 복을 주셔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불신자와 다르게 특별한 은총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신자에게는 특수 은총을, 불신자에게는 일반 은총을 구별되게 내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서로 다른데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대가 서로 완전히 일치하면 신자의 삶은 그야말로 넉넉히 승리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그렇지 못하면 항상 뭔가 부족한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기대가 일치하지 못하면 어느 쪽에 잘못이 있습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신자 쪽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신자의 기대를 하나님의 그것에 맞춰 나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오는 것이라고는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만뿐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서두에 말한 오해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반증입니다.
그 오해는 하나님은 자기를 불신자보다 더 선하고 의롭게 여길 것이라고 자신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의인은 하나 없고 모든 자가 하나님 앞에 똑 같이 죄인이라고 해도 분명히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죄를 적게 짓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수준에는 여전히 못 미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더 엄한 기준을 적용한다고 단순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분의 본성상 완전히 거룩하게 되지 않는 한 의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럼 신자가 특별 은총을 받기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이 신자를 따로 불러내신 이유는 바로 불신자와 다른 은총을 주기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특별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 있을 뿐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애굽과 유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후에 각각에 내린 결론입니다. 먼저 애굽은 바벨론을 통해 징계를 내리지만 그래도 “그 땅이 여전히 사람 살 곳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전쟁에서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기에 현실적으로 그 이전과 달라지는 점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동일하게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구원 받아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징계의 도구로 사용했던 열방들도 다 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아주 특이합니다. “너는 아주 멸하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 즉 포로 생활에서 구원해 준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공도로 징책하고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 하기” 위해서입니다. 쉬운 말로 바꾸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더 주기 위해서 살려 준다는 것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신자에 대한 기대로서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와 전혀 반대이지 않습니까?
애굽은 땅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현실 상황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애굽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면서 사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궁극적 지속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먹고 살게는 해준다는 것이 바로 일반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일반 은총과 특수 은총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에선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보다 그 본인에 대해 궁극적 지속적 관심을 갖고 있느냐 여부입니다. 당신과 온전한 교제를 이루며 매사에 함께 동행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교제하려면 공도로 징책하여 죄부터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하게 세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특수 은총입니다.
또 다시 하나님이 신자에 대한 기대가 불신자보다 도덕적으로 더 성결해지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신자가 절대 잊지 않고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이 따로 있다는 것을 세상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더 선해져야 하는 것은 분명 맞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치기는 불신자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신자다움을 증거 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참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부터 불신자로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미치는 것은 이차적인 일로서 무엇보다도 그런 의가 있다는 사실부터 밝혀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절대로 싫어하는 죄를 구별해서 자신은 절대 짓지 말아야 하고 또 그 죄가 얼마나 추하고 비참한지 사람들로 깨닫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죄인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는 자는 그분이 사랑으로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자신의 체험적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부터 증거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히려 신자가 살고 있는 땅을 어지럽히는 방법을 더 자주 동원하십니다. 그래야만 신자가 떡으로만 살지 않고 그분의 말씀에 더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 앞에 보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다른 말로 죄로 인해 징계 받는 것이 오히려 신자에게는 은혜 중의 참 은혜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주었지만 여전히 죄에 대한 징벌은 남겨두신 것이 바로 특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신자를 오직 당신의 기업을 물려줄 자로 대하십니다. 당신의 나라에 걸 맞는 백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신자가 어떻게 의와 평강과 희락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여 당신의 말씀대로 살 때에만 가능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특수 은총은 신자가 처한 환경이 아니라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신자에게 갖는 기대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기대도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만이 세상의 참 주인임을 특별히 불신자 앞에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또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특별 은총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떤 은총 가운데 있습니까? 왜 비가 제 때에 내리지 않아 소출이 적은 지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애굽입니다. 스스로 일반 은총만 기대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에게 특수 은총을 주지 않는다고 의심과 불만을 품고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그런 여러분이 과연 신자인지 의심과 불만을 품고 있지 않겠습니까?
6/6/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