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5-7)
신자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궁극적이라고 해서 시기적으로 최종적인 목표 즉 죽을 때에 이뤄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신자로 반드시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 깊은 내면의 방향성 내지 규범입니다. 쉽게 말해 사관학교 생도들이 나라를 위하여 살고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하듯이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방식을 너무나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종교적 모습을 띈 일, 그것도 아주 큰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컨대 개인적으로는 성경 통독이나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한 것을 필두로 교회적으로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성전을 거창하게 지어 봉헌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신자로부터 영광을 받는 모습은 다릅니다. 간단한 예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힘든 일을 겪을 때에 하나님을 찾아 구원을 간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고 합니다. 당신의 백성을 환난에서 건져 주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이제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율법으로는 저주 받은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할 길이 열리기에 하나님으로선 너무나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반드시 당신께서 기뻐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너희도 서로 받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받는다’는 헬라어는 연약한 형제를 위해 남의 약점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서로 간에 죄나 허물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남의 고통에 동참하여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은 모습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분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어떤 죄와 허물에 빠져 있든지 간에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나오는 자를 물리친 적이 없습니다. 결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정말 본문 표현 그대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완벽하게 닮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단지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 이전에 확실하게 해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전반에서 하나님이 서로 뜻을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노력 이전에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신자의 공동체 안에선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감정과 의지가 생기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평생을 통해 정말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으려는 자세가 확립된 신자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죽지 않는 자들 사이에는 한 마음과 한 입이 되지 앉아서 서로 받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자신(하나님 대신 인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도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기를 소원하는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서로 간에 자랑과 경쟁하는 모습이 나타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교회 건물을 신축하면서 분쟁이 생겨 교회가 나눠져도 그 건물로 하나님 일을 더 잘할 수 있고 또 비록 상처 받은 영광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신자가 일 년에 성경 통독을 몇 번씩 했어도 동료 성도들 앞에 자랑까지 하지 않더라도, 그 말씀으로 자신부터 거룩해져 이웃을 섬기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의 의만 쌓은 것뿐이지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문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받은 모습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인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었고 또 그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이방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고 합니다.(8,9절)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율법을 준수하여 완성했을 뿐 아니라, 율법을 가진 동족들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이방인들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은 죽고 다른 사람은 살렸습니다. 단순히 희생하고 수고하여 선한 행위를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변화 받은 다른 사람더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 것입니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절) 열방이 주의 백성과 함께 주를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궁극적인 모습이 어떤 것이지 분명해졌습니다. 신자가 그 이웃으로, 동료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이웃에게 베풀어질 수 있도록 신자가 먼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기꺼이 그들을 섬기는 것뿐입니다.
신자나 교회가 종교적 업적을 거창하게 이뤄냈다고 함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거려선 안 됩니다. 그분이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통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인간을 구원해 주신 통로가 십자가뿐이듯이 구원 이후에도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간을 다스리십니다. 신자가 자신이 죽기까지 이웃을 사랑으로 섬겨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선하신 다스림이 실현되지 않으면 그 분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심지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단순히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 그것도 각 사람의 형편에 맞추어 자기를 완전히 낮추면서까지 전한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합니다.
혹시라도 전파한 복음을 가릴까 자신을 항상 쳐서 자신부터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 했습니다. 정말 그는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하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고 있습니까? 요컨대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당신을 그들이 함께 즐거워해 줍니까? 아니면 예수쟁이가 자기들과 똑 같거나 더 하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습니까?
6/22/2007
주님을 머리로 한 주님의 몸된 교회(공동체), 즉 지체를 위하여 사는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