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피조물의 정의(定意)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범하는 신앙상의 아주 큰 잘못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을 도덕적 혹은 종교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하고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전보다 조금 더 착하게 살고 있거나 교회 활동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으면 신앙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선 그런 기준으로 신앙 성숙 여부를 따져선 안 됩니다. 자기 노력으로 이뤄내는 선행 혹은 종교 활동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새 생명이 자신을 통해서 세상으로 전해지고 열매 맺어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도덕, 종교 이전에 생명 그 자체입니다.
생명이라고 해서 성령 은사나 기도 응답에 나타나는 초자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추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에 정말로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계시한 말씀 그대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이 온전히 변화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간절히 소망은, 자기가 이루지 않고 하나님이 이뤄주므로, 해야 합니다.
예컨대 예수 믿어 조금 착해졌고 주일 성수를 잘 지키니까 자기는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거니 간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새로운 피조물을 어떻게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여 실제 그렇게 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혹시 아니라면 애통한 심정으로 십자가 앞에 다시 나가 예수님더러 그렇게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럼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그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고후5:11-21)만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 무엇보다 주의 두려우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참 신자라고 알려져야 합니다. 결코 신자라고 자랑하지 않되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 자랑은 역설적인 자랑입니다.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 앞에 자랑하지 않는 것이 자랑이 되는 자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즉 외모로 자랑하는 세상 사람과는 달리 마음으로 자랑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위해선 온전히 미치고 사람들을 향해선 오직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종교적 열심과 도덕적 훈련에서 나와선 안 됩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속에 넘쳐나기에 자연스레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고 이웃은 자신의 것을 기꺼이 희생하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이 나를 죄 중에 있을 때에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했듯이 다른 사람도 외모로 절대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이전의 자신은 완전히 죽어 없어져야 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새 생명은 구체적으로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으로 세상 앞에 서는 자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자기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듯이 신자도 자기를 본 자는 예수를 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하나님이 있어 아버지와 하나 되었다고 했듯이 신자 또한 자기 안에 예수가 있어 그분과 하나 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실제 그러니까 아무 주저 없이 담담히 그렇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니 사실거의 모두가 아직 그러지 못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어야 합니다.
11/3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