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을 만한 때는?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넓게는 인류역사 좁게는 교회사를 되돌아보면 융성하게 번영한 때가 있었는가 하면 처참하게 불행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만 해도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여 기독교가 심한 핍박을 불러일으킬 만큼 정말 염병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바울이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말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때와 또 그러지 못한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역사를 시기적으로 구분하고자 말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후 재림하여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성육신 이후부터는 항상 인류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져 있는 복음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십자가의 권능과 은총이 절대 없어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 외의 다른 구원의 길은 없으며 또 그것을 수정 보완할 조처도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경륜을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으로 다 이룬 영단번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야말로 인류 전체로는 역사를 둘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며 각 개인에게는 저주받을 죽음이 참 생명으로 전환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짧고 한번 뿐인 인생을 하나님이 언제 종료시킬지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구원에는 복음을 듣는 순간 바로 ‘지금’ 받아들여야만 하는 절박성이 있습니다. 내일로 미룰 여유가 없습니다. 신자 또한 때를 얻든 못 얻든 만나는 자 모두에게 복음을 시급하게 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구원에는 그 시기의 절박성보다 더 중요한 측면이 따로 있습니다. 바울이 절박한 구원을 강조하고자 인용한 말씀(사49:8) 안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를 듣고 은혜를 베풀었고 너를 도와 구원해 주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도움 요청을 받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의 때와 날을 먼저 정해놓고 은혜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구원은 한 죄인이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그분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이 몸소 찾아와 주셔야 이뤄집니다. 단순히 죄를 아무 조건 없이 무한하신 긍휼로 용서해 주었다는 교리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실제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한 죄인에게, 본인은 의식도 잘 못하지만, 계속 간섭하신 결과입니다. 그 전에 그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어서 당신의 안타까운 심정이 전해지게 합니다.
물론 죄에 빠진 자가 그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들을 수 있는 귀조차 전혀 열려 있지 않습니다. 설령 영적으로 아주 깨인 사람이 어렴풋이 눈치를 채었다 할지라도 집중해서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본성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만 섬기려는 죄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혜를 쌓아가다가 결정적인 때에 성령이 임재토록 하셔서 당신의 은혜를 알게 해줍니다. 죄와 의와 심판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완악한 죄인이 한 번의 메시지로 당신께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기에 기다려 주면서 당신의 은총 앞에 엎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기까지 간섭하십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천국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 한 죄인의 이름표를 붙여 놓고는 그 자리에 어느 누구도 대신 앉게 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지금’ 받아야만 할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절박성보다 하나님 당신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셨다는 너무나도 큰 은혜 때문입니다. 당신 앞에 설 수조차 없는 나 같은 죄인을 택하신 이유를 도무지 모르니까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12/12/2007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