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창12:8,9)
한국 교인들의 최고 강점이자 동시에 가장 약점이 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겨도 믿음 만능주의로 이기려 든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환난이 생겨도, 죄나 시험이 닥쳐도, 남들에게 상처를 받아도 무조건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 일로 치부합니다. 또 믿음의 부족은 말씀과 기도에 나태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원론적 의미에선 맞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따지면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믿음=말씀과 기도에 열심인 것이 됩니다. 또 말씀과 기도에 열심만 쌓으면 아무 환난, 죄악,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는 데까지 이릅니다.
믿음이란 환난과 죄악을 예방하거나 없애는 ‘수단’이 아니라 그것에 올바르게 반응할 줄 아는 ‘힘’입니다. 또 말씀과 기도도 그런 힘을 쌓고 기르는 ‘수단’이 아니라 ‘통로’입니다. 수단이 되면 누구라도 말씀과 기도만 열심히 하면 자동적으로 문제를 이기는 힘이 생겨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말씀과 기도에 열심이어야 힘이 생기지 믿음이 없는 자는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그렇지 않습니다.
요컨대 환난과 죄악이 생기는 원인이 말씀과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며 믿음의 실체도 그런 종교적 행위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든 원인을 정확히 알아서 그것부터 제거해야 하지 원인도 파악하지 않고 모든 경우에 만능으로 처방되는 수단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 왕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였던 사건을 두고도 믿음이 없어서 혹은 약해서 그랬다고만 진단합니다. 치사하게 이기적 본성을 좇아 혼자만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처음 만나는 이방인들이 어여쁜 사라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지 몰라도 바른대로 말했더라면 하나님이 살려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설명이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궁극적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초에 애굽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무 문제가 안 생겼을 것입니다. 성경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면서도 그분의 뜻과 달리 자꾸 남방으로 가는 잘못을 범했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벧엘과 아이 사이의 땅이 외견상 너무 척박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려는 땅이 아닌가보다”라고 스스로 짐작 내지 판단한 것입니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겠다고 했기에 물과 목초가 풍부한 땅만 찾으러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다가 급기야는 아주 비옥한 애굽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니 믿음의 실체가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히 붙드는 힘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는 것에 대입하여 적응해 나가는 능력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그런 적응력을 키우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통로입니다.
바꿔 말해 보이는 모습은 항상 바라는 것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것과 바라는 것이 일치된다면 그것을 지켜내지 못할 바보는 없습니다. 또 믿음이 따로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보이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려니까 붙들 것이라고는 하나님과 그분이 주신 약속뿐인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단을 쌓을 때에는 아직 율법을 받기 전이라 성경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도는 아주 간절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보이는 것에 집착한, 즉 자기 정욕을 앞세운 기도를 하다 보니 하나님의 약속 대신 주위에 드러난 환경을 선택해버렸습니다. 그분의 전지전능함 대신 자기 판단력을 더 믿은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고 단순히 기도만 하면 믿음이 생기거나 하나님이 복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가시적 현실보다 비가시적 하나님을 선택해야 참된 힘이 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하나님은 점점 멀어지고 대신에 사단이 가까워집니다. 사단은 보이는 세계 안에서만 왕입니다. 그것도 당분간만 왕 노릇 하도록 용인 받은 것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진정한 실체적 영역의 절대자는 오직 여호와뿐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처음 받은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갈 바 모르지만 당신만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만으로도 그가 가야할 땅은 어떤 확정된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항상 갈 바 모르는 곳에 가야합니다. 무조건 가나안을 거쳐 애굽 같은 새 땅으로 가서 지구를 돌고 돌라는 뜻이 아닙니다. 갈 바를 모르니까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 절대로 그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가야할 땅은 애굽이나 가나안이라는 보이는 곳이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땅입니다. 가나안은 그의 후손이 창대케 되어 한 국가를 이룰 때에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혈혈단신이었기에 아직 그렇게 넓은 땅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땅보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자기 눈에 그 땅이 아무리 척박해 보였어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면 일단은 그곳에서 그분의 뜻을 알고자 머물렀어야 했습니다. 그럼 그 땅에 아무리 기근이 와도 신령한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주었을지 모릅니다. 하늘의 창고에 만나가 모자라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신자가 보이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소망과 연결시킬 힘만 있다면 말입니다. 다른 말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 당신을 구하는 것이 믿음이지 그분이 주시는 은혜만 바라는 것은 믿음도 소망도 심지어 그분을 사랑하는 것조차 아닙니다.
12/17/2007
귀한말씀 감사합니다